2023, 계묘

술해진사..천라지망

청향고은 2023. 10. 30. 15:41

‘깨달음’을 한자로 ‘각성覺聲’이라고 한다. 깨달을 각覺에 소리 음音인데 '각음'이라고 하여도 되지만 소리 성을 써서 깨달은 소리라고 한다. '음/성'이라고 하는 한자가 소리음音 소리성聲으로 문자자체가 다른데, 소리음은 해日가 오르면立 삼라만상에서 나오는 소리 sound를 뜻하는 ' 입과 혀를 그린 가로曰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지시하는 것이고, 소리 성은 声: 경쇠 경, 殳: 몽둥이/창(칠) 아래  귀 이耳를 아래 쓰는 글자로 音聲은 '사람이 내는 목소리[音]와 악기가 내는 소리[聲]'가 속뜻인데, 언어학에서는 '발음기관에서 생기는 음향'이라 정의한다. 音은 내가 내보내는 소리이고 성은 외부의 소리를 당겨 들이는 수신하는 소리다.  
 
노자의 음(音), 성(聲) 개념은 선진 시대의 악론의 중요 개념인 “성(聲), 음(音), 악(樂)”이라는 개념이 이루는 의미 맥락에 따라 일관성 있게 이해되었을 때 본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 수 있다. 선진 시기의 악론(樂論)에서 나타나는 聲-音-樂의 중층적 관계를 검토해 보면 음과 성이 대립 구도를 이루면서 악(樂)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禮記 樂記에 따르면 “성(聲)”은 드러난 소리(發聲)로서 자연 상태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포괄하며, “음(音)”은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여 체계화한 음조(音調)이며, “악(樂)”은 이러한 음조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더욱 고양되어 도덕적 가치가 부여된 예술을 뜻한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聲과 音의 관계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발성되어 드러난 소리인 “성(聲)”은 동물도 들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적 개념을 부여하고 규칙을 부여하여 인지하는 “음(音)”은 인간이라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므로 자연히 인간 사회에서 의미 있게 취급되는 것은 “음(音)”이다.  
 
음-성 관계에 대해 인간이 부여하는 가치를 놓고 본다면 음(音)은 의미 있는 것이고, 성(聲)은 동물도 들을 수 있는 것으로서 하찮은 것이 된다. 그런데 음(音)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는 문제를 따져본다면 음(音)은 본래 자연 상태의 소리(聲)로부터 온 것으로 소리(聲)가 음(音)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소리는 음보다 더욱 근원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소리가 음보다 우월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인간이 개념화한 음(音), 마음속에 떠오른 음(音)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다시금 소리(聲)라는 드러난 형태로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노자의 “大音希聲”이라는 명제와 “音聲相和”라는 명제는 이와 같은 聲과 音이 지니는 역동적이면서도 서로 팽팽한 긴장 관계를 잘 보여준다. 
 
우선 “音聲相和”라는 명제는 사람들이 우월하게 생각하는 가치 관념이 반대 개념을 전제하고 이루어지는 것임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기게 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어지게 하며, 길고 짧음은 서로 나타나게 하고, 높고 낮음은 서로 존재하게 하며, 음과 성은 서로 어우러지게 하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르게 한다.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여기서 대비 개념의 앞쪽을 이루고 있는 有, 難, 長, 高, 前은 인간이 가치를 부여하고 선호하는 것들의 이름으로서 音도 여기에 해당한다.  
 
뒤쪽에 놓여있는 無, 易, 短, 下, 後는 대체로 노자에서 도의 특성으로 거론되기도 하는 개념들로서 인간이 무시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들의 이름으로서 노자는 聲을 여기에 놓았다. 진실한 사태, 진정한 도의 모습이 있음과 대립적인 없음, 복잡함이 사라진 간이함, 앞에는 절대로 서지 않고 뒤를 지키는 것과 같은 어느 한편에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에서 유약함, 간이함, 뒤처짐 등이 부각되는 것은 그것들이 인간세상의 눈으로 볼 때 평가절하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개념들은 온전한 사태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보게 하기 위해 사용된다. 音, 聲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보여주는 고정관념은 노자의 이러한 지적을 유효하게 만든다. 
 
“大音希聲”이라는 명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반성, 그리고 구체적이고 감각 가능한 세계를 포괄하면서 통하게 하는 도(道)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려는 것이다. 이 부분 역시 “음성상화”와 마찬가지로 앞 뒤 문맥과 이어서 읽어야 한다. “大音希聲”은 “大象無形”과 짝을 이루는 구절이다. 소리(聲)와 형태(形)는 인간이 없더라도 자연계에 놓여 있는 것이고 우리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 자체로는 해독 불가능한 것이다.  
 
반면에 음(音)과 상(象)은 우리가 해득해 낸 체계이자 방식이다. 우리에게 아무 체계도 기준도 없다면 가지가지 사물들을 묶고 나누어 인식할 방법이 없다. 어떤 형태, 어떤 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했을 때 그 어떤 형태 및 소리와 다른 어떤 형태 및 소리는 제각기 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비슷한 형태들을 취하여 낱낱의 차이는 무시한 채로 어떠한 표상(象)을 떠올려 형태(形)를 파악하고, 그 비슷한 소리들을 취하여 음색과 길이, 높이, 음량 등 무수히 조금씩 다른 차이를 버리고 고저장단이라는 사성을 취하여 소통하게 된다. 
 
귀를 가지고 있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다. 목소리가 노화되듯이 귀도 노화가 되어 귀가 먼다聾(귀머거리 聾, 농(聾)은 용(龍)과 이(耳)의 합체자로서, 용·뱀의 귀를 나타낸다. 고대인들은 뱀·용에게는 귀가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잘 못 알아듣다.” 혹은 “안 들리다.”의 뜻을 가진 글자를 만들어 냈다. 『장자(莊子)』에서는 “기유형해유농맹재(豈唯形骸有聾盲哉)”라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귀먹고 눈먼 것이 다만 육체에만 있으리오. 귀머거리와 장님은 지식이나 정신면에서도 존재한다.”는 뜻이다. 
 
어제 글에서는 혀떨기舌振훈련을 통하여 목소리를 건강하고 젊게 관리하는 방법을 설명했는데 오늘은 귀를 젊고 건강하게 관리하는 훈련법을 설명해보자. 아설순치 후 오음에서 치후음이 귀의 건강과 관련된 것으로 이를 치齒라고 하는데 상하악관절이 만나는 나루턱齷을 꼭 누르고 사자후를 토해내는 훈련을 하면 귀가 건강해진다. 입을 크게 벌리고 혀를 쑤욱 빼고 으헝!!!! 개소리戌聲훈련을 해도 좋다.  
 
목소리가 건강하고 귀가 건강해야 듣고 말하는 것이 아름답게 되는데 귀가 멀었다고 할 때 상대방의 의도를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생각으로 듣는 경우를 의미한다. 귀가 멀다고 하는 것이 듣지 못한다도 되지만 말하는 이의 의도를 모른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실 너의 말의 의도를 알아듣는 귀는 영체의 귀가 생겨야 가능한 것이고 그것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한 그 귀가 너의 말에 담긴 무늬를 듣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내가 무엇이라 떠들면 네가 알아들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자유지만 착각이다. 내가 너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듯이 너도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글도 돌아서 3초면 잊어버리지만 말도 소리울림이 사라지면 잊힌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이라 하였을 때 네가 3초 이후면 잊어버린다는 것을 기억하면 나도 너의 말을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것을 인정하면 너에게 과한 기대를 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건강한 삶을 만들기 위해서 인정할 첫째 덕목이다. 내가 많이 떠들지만 너에게 떠드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말하는 듯하지만 나에게 떠드는 것이라 설명한다. 너는 나에게 말을 반사시키는 거울역할로 경면鏡麵이다. 너에게 하는 말의 발화자는 나 이기 때문에 그 말은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래서 어떤 말을 해도 누워서 침 뱉기라고 한다는 것을 항상 명심할 것.  
 
사람들은 모두 그러한 구조로 가동된다 내 청력 내 시력 내 언력 내 글력 내 악력.... 이 기준으로 이 기준으로 너를 대한다 그러니까 너는 나를 알 수 없다 나 역시 너를 알 수 없다 네가 아는 나는 네가 만든 ‘나’이고 내가 아는 너는 내가 만든 ‘너’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만든 ‘상’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너와 나를 마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너를 이해한다는 말은 모순이니 너를 이해하고자 노력하지 마라 헛수고니라. 내가 내 오온과 오감의 구조와 기능을 이해하려 노력해라 

 

나는 너를 알 수 없다. 내가 너를 인식하는 내 인식이 어디서 출발하는지를 ‘알識’려고 하는 것이 정신공부이고, 영생공부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고 이 공부가 깊어지면 나는 너를 알 수 있는 길이 없구나 내가 나를 아는 길만 알 수 있구나 그래서 천상천하유아독존, 독생자..라고 하는 설명이 나오는구나 알게 되고 더 이상 너를 가르치려고 하는 오만함을 버리게 된다는 것이지. 내가 너를 가르쳐 너를 변화시키려 드는 것은 생명에 대한 오만함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알아가면서 자기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한 존재 다는 것을 이번에 다시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지. 내가 나를 가르치기 위한 인연으로 너라는 거울을 만나는 것이라고 내가 나를 비췸 하기 위하여 '너'를 만나는 것이라는 것. 
 
공부라는 것은 360도를 원(O)으로 180도를 반지름(D)으로 90도를 정각(ㄴ,ㄱ)으로 하는 원리를 세우는 것에서 하는데 ‘각도角度’라는 말을 보면 '각자도생'을 압축한 글자이기도 한데, 깨달을 각에 길 도로 깨달음의 길이라고 하지만 나는 각(口)을 이루는 도수度數라고 이해한다. 1도에서 360도 그리고 저마다 도에 주어지는 셈값  히브리어에는 알파벳에 수가 주어져 있다 한글의 자음도 ㄱ에서 ㅎ까지 순서가 주어져 있는데 ㄱ~ㅎ까지의 흐름은 에너지무게 값이다. ㄱ의 에너지덧셈의 순서가 ㄱㅋㄲ.인 것은 알겠지? ㄴ의 에너지값 덧셈이 ㄴㄷㅌㄸ.. 이듯이.  
 
동그라마로 돌아가는 과정의 각도가 만드는 힘의 세기를  사주에서 형충파해합살刑沖破害合煞이라고 하는데 도수로 계절의 흐름을 풀어내는 것이고 한계절 여섯 절기가 가지고 있는 정보값이기도 하다. 입춘-형, 우수- 충, 경칩- 파, 춘분- 해, 청명- 합, 곡우 -살 이런 연결로 풀어보는 것이라고.. 입하-형, 소만-충, 망종-파.. 이런 잇기..
말머리를 잡고 공부하는 선가에서는 말머리를 화두話頭라고 하고  화두를 잡고 화두에 맞는 화신話身 즉 말몸을 만들어내는 것을 수신공부라 하고 머리말에 몸말을 붙였을 때 몸을 얻었다 한 소식했다.. 한집 일가를 이루었다 화두를 깬다고 했다. 몸을 얻어야 대를 이어 내리게 되는 것이고.. 남자를 머리, 여자를 몸이라고 하여 글체나 연체원리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네. 
 
그 과정을 파악했을 때 내지른 소리, 깨달음, 파열음로 대표적으로  ‘할 割, 갈曷’이 있고, 유레카라고 하기도 하고,  ‘할렐루야!!라고 하기도 한다. 깨달았을 때 나온 소리, 새벽닭울음소리로도 설명한다. 
 
 
닭은 서쪽 구월에 주어진 십이지신에서 거울(옥경 팔지경)을 가지고 있는 ‘달신’이다  지신마다 가지고 있는 도구가 있는데 그것을 계절의 품이라 힘이라고 한다 한 계절 석 달을 삼품으로 하고 물건 품品이라 하여 입구 셋을 쓴다. 
 
새벽 닭晨丣,酉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品) 부인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로 잘 알려진 내가 세 번 나를 부인한 내 말,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방귀인지 모르고 하는  내 상태를 자기 꼴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를 ‘각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각성을 하면 각성이전의 정보들을 다 불사른다 물로 씻는다 버린다 비운다 새로운 출발이다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깨달음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에서 내가 감각 없이 쓰던 말살이에서 아!!! 하는 티가 발견되는 것이다 
그냥 마냥좋음에서 어,  이건 아니구나 하게 되거나 모든 것이 어둠이다가 거미줄 같은 실빛이 문득 보일 때 그런 때 
하품 흠을 입크게 벌리고 기지개를 켜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가 어제 흠欠이 있어서 상품이 되지 않은 하품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고 예순넷이 되어서야 하품 흠을 알게 되었고, 하이고라는 무릎침이 생긴 것처럼 그리고 이 일깨움 즉 한나를 깨친 것을 남편에게 공유하였더라 이렇게 제대로 모르던 것을 바로 알아가는 것이 글공부이며 정신수양 
일상 숨처럼 익숙했던 개념이 재채기처럼 툭 튀어나오는 체험을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지 
 
숨길 수 없는 것이 ‘재채기’라고 하듯이 나의 모름, 정말 모르던 정보를 알게 되면 깨달음이라고 하지 않는데 너무나 잘 알아 명확하다고 자신있다고 확신하던 개념이 쨍그랑 깨어지는 체험에서 깨달음이 생겼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도 기억하자
모르던 것을 아는 것은 배움이다 아는 것의 실천현장을 겪는 것이 깨달음이다 
 
모르던 것을 듣고 알게 되고 의심없이 수용하여 안다고 생각하던 익숙한 안일한 정보의 본래면목을 만나게 되었을 때 아하 나는 왜 이 생각에까지 닿지 않았을까 생각이 짧구나 라는 ‘현실자각’이 생기는 그때를 깨달음이라고 하여 말 그대로 이전에 짜던 글 무늬가 깨어지고 새로운 무늬 짜기가 생성되는 것이다 
 
하품 흠이란 것을 안다 생각하여 의문도 하지 않았다가 본질적인 출발 모자르다 부족하다 빠트리다 등등의 뜻이라는 것을 놓친 것을 이번에 바랄 욕을 풀어보면서 마주하게 현실각성 
 
현실은 그간 하품에 대한 아홉달 채움의 과정을 거치었기에 바랄 욕에서 비로소 모자라다 부족하다 빠트리다는 본디 뜻을 만나게 되면서 ‘흠’과 ‘티’와 ‘주름 잡힘’이라고 하는 그 ‘흠’이 바로 ‘하품’이라는 것이구나 ‘헐,!!!!’ 하는 ‘하품 흠이라는 문자에 대하여 현실각성을 한 것이다 10월 29일인 어제다 
 
ㅌ 를 상하에 세우든 엎던 하여 가운데 선을 만드는 재봉질을 꿸 관毌이라 풀었다.
열매 실이란 한자의 현실을 마주하면서 말이다 그 공부의 덤으로 바랄 욕을 다시 풀고 하품 흠을 마주한 것이지 ’흠과‘ 하품의 과일 
 
새로운 마당에 들어서게 되면서 즉 빛을 더 큰 빛으로 어둠을 더 깊은 푸른어둠으로 마주하게 되는 무색계에서 처음 마주한 어둠을 더 깊은 어둠으로 알게 된 글자가 하품 흠이라니 이것도 즐겁다 무엇인가 하나 깨어지면 조각조각이 나오고 그것이 새로운 단초가 된다 
 
입으로 토해내는‘기의 부족’ 현상이 사실은 골 곡 하구의 물부족현상이 만드는 ‘곡성’이라는 것이네.  물이 없어서 기갈 든 상황에서 하늘에 비를 구하는 것을 바랄 욕이라 하는 것이고 여기서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라는 말도 나온다는 것이지 
 
하늘을 봐야 별을 따고 하품의 물부족사태를 하늘이 비를 내려 골짜기마다 채움으로 해갈하여 풍년가가 울려나게 되는 것을 ‘바랄 욕’의 성취로 ‘목욕할 욕浴’으로 골짜기에 물이 넘실대는 문자로 그려냈다 
 
하품에 물이 넘치도록 하는 일을 운우지정이라고도 하는 것이지. 음양이 만나 윗실과 아랫북실이 가운데서 서로 걸려 땀 땀을 박아가는 운동을 운우지정이라고 상락아정이라고 열반이라고 해탈이라고 그리고 깨달음이라고 해조음이라고 해인이라고 많은 물소리 와도 같고 거문고소리와도 같아 십사만 사천 외에는 부르지 못하는 노래라고 하는 물이 물을 부르고 불이 불을 댕겨 빛으로   빛을 더욱더 새파란케 세차게 하고 어둠을 더 깊고 푸른 어둠으로 할렐루야 하는 일이 골짜기에 물이 넘치게 되면 생기는 ‘은총’이라는 것이지 
 
생식의 은총은 불에 불이 물에 물이 더해지는 너를 딛는 듯보이지만 현실각성의 현장이다 섹스는 전쟁이다 둘이 싸워 둘이 이겨야 되는 무색계에너지를 배우는 공부다 
 
물이 물을 당겨 물이 넘치고, 불이 불을 당겨 물이 펄펄 끓게 되는 것이 하품의 곡신이 바라는 소망이고 그렇게 끓어 넘치는 에너지가 향이 되어  상품하늘에 닿는 현실자각이다 
 
깨달음이라는 각覺은 배울 학學과 아랫자리에 아들 자子를 쓰는가 볼 견見을 쓰는가로 설명하는데, 배울 학은 기초정보를 익히는 과정이다고 보면 된다 깨달을 각은 기초정보를 배우고 나서 그 정보를 현장에서 검증하여 배움 값의 허실嘘實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見은 目儿으로 이뤄진 글자로 儿은 천천히 걷는 사람인이라고 하는데 찬찬히 과정을 살피는 모습을 그린 글자라고 한다. 열매 실의 아랫글은 조개 貝로 눈 목에 여덟 팔이 붙어있다. 사방팔방으로 펼쳐가는 에너지라면 見은 그렇게 펼쳐진 에너지장을 찬찬히 살펴보는 에너지라는 것이지. 
 
배우고 익혀서 배움을 현장에서 활용할 때 현실로 체험하는 것이 깨달을 각이라는 것으로 배운다는 것은 너라는 대상이 전해주는 지식을 듣고 반복으로 익히는 것이고 깨닫는다는 것은 학숩한 지식을 현장체험으로 그 정보값을 산출하는 일이다.

 

이론을 익히고 그 이론을 현장에서 실천하여 결과값이 배운 것과 같은 값으로 산출되는지를 확인하여 값이 같을 때는 올바른 진리를 인식함이 되고, 결괏값이 ‘흠, 하품’이 될 때는 그릇된 지식이 된다. 올바름은 그릇됨이 있어야 알 수 있고 그릇됨은 올바름이 있을 때 알 수 있다. 이런 거울 보기를 너를 통해서 공부하는 과정을 음양이라고 하지만 어느 날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던 과정에서 거울을 깨고 빛으로 빛을 어둠으로 어둠을 보게 되는 단계에 들어서게 되는 것을 하품에서 상품으로 위치가 옮겨졌다고 표현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 
 
오늘 해돋음시간이 6시 45분대더라. 점점 늦어지는 일출시간이고 그 시간을 따라나가는 나의 집을 나서는 시간도 늦어진다. 최저온도를 확인한다. 남편은 시지로 일을 하려 간다고 여섯 시에 나선다고 했다. 나는 다섯 시 50분에 나섰다. 잘 다녀오세요.. 저도 잘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한다. 欠에 대한 일깨움을 나누고 나서 歆은 音欠으로 구조되어 있으면서 '받을 흠'이 되는데 음험하다.. 할 때 이 한자를 풀어서 쓰는 것일까나? 音이 하품이다. 다시 말하면 발하는 소리값이 가치가 낮다는 뜻이 받을 흠이 되는데 음흠을 어떤 경우에 쓰는 것일까나..  음, 흠... 무엇인가 에너지가 생성되어 궁구를 하게 되는 과정에서 나오게 되는 소리가 음.... 흠...이라고 보면 받을 이라는 것은 뱉을 밭아내는 소리가 되는 것이지 않을까나 그래서 소리를 받아내는 훈련을 통하여 에너지가 모이고 결을 만들어 하품에서 점점 상품으로 에너지가 높아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지 않을까나.. 배탈이 나고 나서 요즘 '묵언'수행을 하고 있는 중이고, 몸의 기운 돌리기를 점검하고 있는 중인데 급탈急奪이었던 만큼 회복하는 것도 급속도로 돌아오고 있어서 오늘은 춤도 이십 분 추어보고 후프도 삼십 분 돌리고 그리고 해맏이 신단에서 내려와 공항교까지 가을빛 속을 천천히 걸어서 공항교로 왔는데 오는 길에 억새 흐드러진 길을 지나 공항교 좌 우에 연분홍 나팔꽃 같은 꽃너울이 이어진 풍경이 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연분홍은 봄의 색이라는 인식이 있어서일 것이다. 제3 아양교라고 하던 다리이름이 공항교로 정해지고 나도 언젠가부터 당연하듯이 공항교空港橋라 부르고 있다네  
 
신단 천문도가 그려진 가운데 동구라미안에서 신을 벗고 기체조를 하게 되더라. 발이 가벼워지니 춤동작도 나풀나풀한 것인데 오늘 내가 늦은 것인지 늘 나오시던 분이 보이지 않았더라. 그리고 운동기구에서도 낮익은 얼굴은 없는데 내가 효목동이라고 이름 준 분이 손을 흔들었다. 이 분도 루틴을 정확하게 지키시는 분이신데 내가 건네는 사탕에 손사래 하시다가 사탕은 사랑이고 가을사랑이라고.. 그랬더니 전날 준 사탕 집에서 한 입에 물고 녹이니 한동안 녹이더라고 하시더라. 츄파춥스... 요즘 글이 정말 술술 풀리고여서 후프를 돌리면서 글을 만드는데 글은 모자람이 없건만 손이 시리움은 어쩌랴.. 
 
글을 만들면서 후프를 돌리다보면 삼십 분을 금방 지나가게 되는 것이니 나로서는 운동도 되고 글도 두드리고 일석이조가 되는 것이지. 나를 마주하는 공부는 혼자일 수 있어야 되는 것이어서 홀로 가을빛 속을 거닐어가는 아침이 정말 좋다. 실속 있게 시간을 갈무리하는 것이 모여서 내공이 되는 것이고 세월을 내 것으로 잡아놓게 되는 것이지. 길마다의 정취가 향기롭고 이윽하고 정감이 인다는 것. 혼자여야 알아채는 것들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외로우면 혼자이지 못하지만 내실이 가득하면 혼자임이 즐거워진다. 그래서 홀로임惚(囫)爐絍(恁)을 즐기는 이들을 보게 되면 영혼의 빛이 찬란하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그러함으로..   
 
계절을 익히는 것은 세월을 반복함으로 생긴 결을 딛고 간다. 그래서 나이테 년륜이라는 것이 중요한 재산이 되기도 하는 것이고 세월이 더해진 이들의 능력은 '기억과 성찰'이다. 돌아보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하더라. 사랑 愛는 머물렀던 곳을 떠나며 돌아보는 마음을 그린 글자로 지나간 계절을 돌아보아 무엇을 잡고 무엇을 털었는지를 성찰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나는 늘 일기를 두드려 대기 때문에 일 년의 궤도를 돌 때 한해의 지나가는 길목에서 마주하는 기억도 반복이 되는구나 한다. 
 
반복함으로 흠과 티와 주름잡힘이 없는 완벽으로 절차탁마하는 것을 살아있음이라는 설명이지 현실자각이라는 넉자를 너무나 익숙하게 발화하지만 그 넉자의 무게값은 쉽게 말해질 만큼 가벼운 말이 아니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고 넉자의 한자마다 천금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봄아침을 걷는 느낌과 가을아침을 걷는 느낌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은 봄기운은 생장지기여서 아이같은 에너지라고 하는 것이어 까불거리는 것이고 가을기운은 숙살지기어서 어쩐지 점잖아지고 무게감을 만들어내는 것인가.. 하게 되는 것이지. 봄은 가볍고 가을은 무겁고... 옷색조차도 그러한가 한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같은 공감각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공통적인 정보다. 내년 2024년 갑진년인데 4차혁명이 시작되는 출발이라고 하네. 인묘는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에너지라면 사 오는 업데이트된 정보를 활성화하는 에너지인데 '辰'은 묘를 사에게 바통터치를 하여주는 에너지라고 보는 것이지. 내 공부마당도 갑진을 만나면 일간 을목이 타고 오를 나무가 들어오는 것이니 이 또한 나의 4차 혁명이 일어나는 에너지일 것이다.
 
4차혁명이라 봄 여름 가울 겨울을 통합하는 통찰력이 가동되는 레벨이 된다고 본다네  
 
올해 나의 성장은 '너'에 대하여 내가 운韵을 달  수가 없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이전에는 너에게 나의 가치를 스미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착각을 했는데 이 착각도 버리게 된 계묘년, 시월이다. 癸卯. 내가 무엇을 안다고 너에 대하여 운을 뗄 수 있을 것인가.. 그간 멋모르고 운을 떼거나 토를 달던 것들을 다 제하는 것.
 
시월은 나에게 힘든 달이다고 첫날부터 가르쳐 주시더니 그 힘듬을 몸으로 받아내면서 11월 1일은 음력 9월 18일 술월 계해로 시작을 하는데 술달 해일, 술해는 천라로 저승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하는데 나도 이제는 한 마디 자란 자리에서 이승을 관조할 수 있으려나 한다. 저승은 술문에서 열리고 이승은 진문에서 열리는 것이어서 술해 진사를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귀문이라고 하는 것이라네. 세월은 흐르고 나도 흐르는 것이 영생복락을 얻는 공부라고 하더라. 세월은 흐르고 나만 남는 것은 타락이라고 하더라. 그대의 시간을 흐르게 하라. 계절과 같이 흐르는 것. 흐르는 것은 강물만 아니라 강물 따라 걸어가는 내 생각과 마음도 흐르더라. 피어나는 것은 꽃만 아니라 글결도 말빛도 찬란하게 피더라.. 긴긴 세월 두고 그렇게 흘러온 길을 나도 따라 흘러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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