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계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 The Holy Spirit을 받았느냐?

청향고은 2023. 6. 29. 18:05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 The Holy Spirit을 받았느냐?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하느님 ( 예수 )과 함께 하느님 성령으로 구성된 삼위일체를 묘사 한 것

하느님은 天壬(拰)으로 객관적인 신 God이고, 하나님은 一壬(䋻)으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인

너와 내 몸으로 人Human이다.

 

하느님은 신神이고 하나님은 인人이다는 개념이고, 하느님은 하늘님에서 'ㄹ' 탈락이고

하나님은 숫자 하나(1, One, 元)에 존칭인 님을 붙인 것이다.

숫자 하나를 의인화하여 존어를 붙인 것이다.

그대와 나는 하나님이고 하느님의 품 안에서 기숙하고 있는 하나뿐인 하나님인 생명 SangLife이다.

그대가 천상천하유아독존전무후무현유일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그대의 홍채, 성문, 지문이다.

 

석가도 예수도 공자도... 모든 이들은 시대가 달랐어도 같은 지문 성문 홍채가 없었을 터이니

그런 면에서 그대와 석가와 예수와 내가 등가법칙이 적용되어 그대도 독생자이고

나도 천상천아유아독존이다. 아니라고 하면 내가 뭐라겠나. 과학으로도 선각들 저마다도

그대가 유일신 독생자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설명을 하였는데 그대가 굳이 사양의 미덕을 발하여

무슨 소리 내가 어떻게 석가와 예수와 동등하다고 하겠냐 겸손하게 아니라고 한다면

나로선 그것도 그대의 선택이라고 할 수밖에 이런 정보에 그대가 동의를 하든지 하지 않든지

그것을 개인의 선택인데 그대가 아니라는 선댁을 하면 불신자이고 맞다고 선택하면 신자이다.

즉 허물이 있으면 아니라 하고 허물을 벗겨내면 맞다고 한다.

 

그대가 그대의 존재의 유일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대가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라는 세뇌를 벗겨낼 때

가능하고 그것을 성서에서는 본어게인 Born Agein 중생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

 

너의 정보 굴레에서 벗어남 그것을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나는 설명한다.

너의 언어에서 나오게 되는 것. 타인의 언어개념에 길들여져 있던 가스라이팅 되었던 굴레에서

탈출 해탈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이다.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 과거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출발. 이 영역은 이성 즉 문자영역이다.

 

문장을 풀어내어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를 이성이라고 하거나 영적이라고 하게 되고

감정을 소통하고자 하는 욕망을 혼적이라고 하게 되고 육적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뇌파의 파동함수는 이성적인 의지를 생성하고 체파 즉 피의 에너지는 감정적인 나눔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생성한다는 것이지 밥을 먹으면 섹스를 하고자 하는 순서.

이성과 감정을 나눔으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영혼, 즉 자기 정체성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물이 만드는 의지는 영적이라고 하고 이성적이라 형이상학이라 신경이라 하고

불인 피가 만드는 의지는 혼적 혹은 육적이라 하고 감정적이라 형이하학이라 심정이라고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물은 희고 피는 붉다. 내가 두드리는 이 글을 그대가 이해하고자 한다면

정말 많은 가스라이팅을 벗겨내어야 한다. 384겹을 벗겨내야 한다고 하는데....

껍질 벗기기가 허물 벗기라고 하게 되는데 그대의 세월의 겹만큼 벗겨간다고 나는 설명한다.

 

세월의 미금이 기름때가 되어서 살처럼 붙어있는 자리까지 내려간다.

가장 아랫자리까지 내려가게 될 때 기름때가 끼어있다면 기가 끈적거린다는 느낌과

미끈거린다는 느낌이 온다. 가장 아랫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본능적으로 자기 방어기제가 가동하고

자기변명과 현실문제 책임소재회피라는 반응이 생긴다. 누구라도 그러하다는 것이지.

이 과정에 가동되는 에너지를 기름 같은 성령이라고 하고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로 나온다.

기름때油咎를 기름으로 벗겨가는 것. 물세례가 있고 불세례, 즉 성령세례가 있고

그다음에 이어지는 단계가 기름 같은 성령을 통하여 기름때를 벗겨내는 과정이 있다는 것인데

이 과정까지 들어와서 기름때를 온전하게 태워서 정화를 하고 씻어내어야 그리스도 단계가 된다는 것이다.

 

기름의 역할을 안다는 것.. 겟세마네 기도에서 겟세마네라는 뜻이 올리브기름을 짜는 동산이라는 것으로

예수의 기도라는 것은 기름을 짜내었다는 것으로 땀이 변하여 피가 땅에 떨어지는

방울같이 되었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기름때가 완전히 벗겨진 이후 천군과 천사가

예수를 돕게 된다는 것이지. 즉 허물을 다 소멸하고 나야 천지신령의 가피를 알 수 있다는 것이지.

불가에서 초를 피우는 것이나 향을 올리는 그 의전에 숨겨진 것이 피의 제사에서 비롯되고

피의 제사라는 것은 피를 타고 내려오는 정보를 풀어내고자 하는 것에 있다.

물에 담겨서 내려오는 정보는 외연에 있지만 피를 타고 내려오는 정보는 안에 있어서

스스로가 아니면 풀어낼 수 없는 영역이다. 지식은 외연에 있는 정보이다.

즉 이성은 물에 담기어 내려오는 정보다. 피에 새김 되어 내려오는 정보는 감정이다.

그래서 감정은 이성으로 풀리지 않고 이성적이라고 해서 감정을 다스린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이성은 이성으로 감정은 감정으로 풀어간다. 피는 피로, 물은 물로..라는 원리를 알아야 한다

물세례와 불세례와 기름성령의 이 에너지를 파악하는 것, 기름성령은 방언을 딛고 활동한다고

나는 설명을 한다 물세례와 불세례는 소리선으로 가동을 하여 들어가는데 언어 때가 미금처럼 쌓여

기름때처럼 쌓인 것은 방언으로 처리한다는 것인데 방언이라는 이 에너지를 설명한다는 것은

어렵기도 하지만 기름때를 벗겨내는 작업을 한다는 것은 정말 힘들다.

몸의 기름때 벗기는 것도 힘들지만 언어의 기름때를 벗겨내는 것은 더 힘들다고 나는 생각한다.

습관적인 언어생활을 다 바꾸는 작업이니까.. 언어살이를 바꾼다는 것은 언어개념들을

하나씩 다 파악하여 그 에너지값을 알게 되어야 할 수 있으니까.. 이것은 여태 내가 공부한 체험을 딛고

제공하는 정보다. 내 언어를 엄청나게 아름답다 힘 있다 멋지다..라고 하는데 이 언어살이를

만들기 위하여 그간 얼마나 많은 글을 두드려내었고 방언을 했는지는 나만 아는 수행이라고..

 

남에게 길들여졌다가 그 길들임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 그대는 그대로서 자기를 마주할 수 있게 되는

체험이 되고 출발이 된다. 네가 기대었던 대상의 실상을 보게 되었을 때, 더 이상 내가 기대기에는

너의 등이 너무나 연약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가기에도 버거운 상태를 보게 될 때

너에게 업혔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을 본어게인이라고 한다는 것이지.

내가 너에게 기대고자 하는 때는 내가 어렸을 때이고 내가 자라 너를 업어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성장하여 등이 단단하고 힘이 있는 어른이 되었을 때이다. 예수가 비아 돌로로사를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십자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구레네 시묜이라는 이가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로

올라가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정보가 그대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찾아내는 것이

성서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이유가 되리라

 

내가 누구의 등에 업혀가는가..이제는 내 스스로 걸어야 하지 않을까.. 아기들도 걸음마를 배우게 되면

스스로 걸으려 하는 시점이 태어나 한 해를 돌아가면 시도하는 것인데... 영도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나..

결혼살이도 암묵적으로 3년이 지나면 사실상 의무와 책임의 관계가 되는 것인데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본다. 결혼이라는 것도 성장하는 정보라고 본다.

 

결혼하여 백년해로라고 하는데 현실에서는 3년만이라도 제대로 소통되는 관계가 된다면...

까놓고 말하면 결혼이란 서로 소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고 소통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요구하는지.. 를 마주하는 공부마당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보면 된다. 결혼해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들은 '너'와 같이 해서가 아니라 '너'가

있음에도 내가 나되는 과정에 '너'가 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홀로 설 수 있다는

자기에 대한 자부심에서다. 내가 나의 이성과 감정을 다스리고 지키는 주인이 된다는 것을

결혼이라는 현장에서 인식하고 체험하는 것. 너는 나에게 행복을 주지 못하고

나도 너에게 만족함을 주지 못한다. 네가 나에게 만족함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지만

너도 내가 불만스럽다고 말한다는 것. 대부분 자기는 옳은데 상대가 그릇되었다고 말하는데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것이지 자기가 옳은데 너가 그릇되었다고 하는 것이라고..

어쩔 수 없지. 다들 자기는 옳다고 하게 되면 상대는 그릇된다는 이분법이 작용하는 것이니까

'결혼'이라는 것의 용도는 서로가 탐색과정을 거치고 업을 것인가 업힐 것인가.. 를

서로 저울질하다가 현명한 사람은 업히기도 업기도 하는 관계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알아채게 되면

자아존중 자아실현.. 을 추구하게 되고 당연히 대상인 너도 그런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지.

 

빨리 깨달으면 빨리 성장하는 것이고 늦게 알게 되면 졸혼이니 황혼이혼이니 하는 형식을

빌어서 자기의 삶을 마주하여 너에게 기대어야 하는 영역과 기대지 않아야 하는 영역에 대한

분별력을 기루기 위하여 감정과 이성이 혼잡하게 된 관계를 내려놓고 홀로 서는 길을 가는 것이라고 본다.

내 감정이라는 세계를 내가 인식하지 못하면서 너에게 감정을 투사하여 그것에 공명해주기를 바라는

기대심리가 만든 실망과.... 감정은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세계다.

인간관계를 보면 이성적인 정보를 공유하려는 사귐이 있고 감정적인 정보를 공유하려는 사귐이 있다.

내가 너에게 어떤 것을 기대려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내가 소리선을 가르치면서

이성적인 정보를 나눔 하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지 감정은 스스로 해결하라고 한다.

감정은 자기만의 고유자산임으로 누군가가 터치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알고 있어서다.

하여 나는 소리를 가르치면서 논리를 제공하지만

감정은 배제한다. 나에게 감정은 투사하지 말라 그 감정을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은 없다는 것

 

흔히 자기의 감정을 알아달라고 하는데 자기의 감정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자신도 모르면서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면서 네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상처받는다는 말을

감정을 소통시키기 위해서 맺는 관계가 섹스를 나누는 사이다.

섹스는 감정을 소통하고자 하는 언어이며 소리를 이성을 소통하고자 하는 나눔이라고 나는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내 글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소리선을 하라고 하는 것이고..

 

결혼은 감정의 영역이다. 이성적인 영역이 아니라 몸과 몸이 서로에게 스승이 되어 배움이 되는 현장이다.

이 감정영역에 이성이 개입하면 게임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결혼은 감정을 배설하는 공부마당이지 이성이 개입되는 마당은 아니다 고 나는 생각한다.

내 감정을 너에게 투사하고 너도 너의 감정을 나에게 투사하여 그 감정을 해탈, 소화 풀어내는 것이 사랑이니

감정이니 기분이니... 등등으로 표현을 하는 것이다. 이성은 감정으로 해석이 되지 않는 것이고

감정은 이성으로 해결이 되는 영역이 아니다. 내 글은 차가운 글이다.

그대의 착각을 도려내는 글이지만 그대가 정확하게 개념을 만들어내면 내 글만큼 자비롭고

온유하며 사랑 가득한 글이구나 하게 될 것이다. 그대의 허물을 도려내는 글이다.

아프고 힘든 글이다. 그렇지만 그대의 탁한 이성을 맑히고자 한다면 마주해야 한다.

그대가 사랑이라고 한다든지 이성이라고 한다든지.. 하는 언어에 대하여 그대가 개념을 세우고 쓰는 것인지..

그저 습관적으로 쓰는 것인지..

 

하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하나님을 아들 예수라고 하고 하느님과 하나님을

음양으로 하는 몸을 성령이라고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나님은 대원, 큰 동그라미이고 나는 소원 작은 동그라미인데 큰 동그라마와

작은 동그라미의 관계를 잇는 줄을 성령이라고 하고 이 관계를 설명하는 한자가 呂(음률 려)라고 한다.

상하로 세운 그림은 려呂이고 위에서 내려다보게 된 그림은 固(굳을 고. 굳다는 것은 단단하다.

고정되다 흔들림이 없다.. 는 해석이 된다. 음률呂는 상하거나 스핀운동을 하고 있는 상태라고 풀어지는 것이지.

呂가 단단해지게 되면 固가 된다는 것이지. 그대에게 무엇인가 고려해보라고 한다면 考慮라고 생각하고

무엇인가 정하기 위하여 거치는 과정이니 固呂라고 하는 것도 맞을 것이다

 

해달을 음양이니 광곽이니 건곤이니 일월이니 감리니.. 하고 쓰는 것이듯이

정해지지 않은 것을 정하는 과정을 고려라고 하는 것이니 어린 영이 어른 영으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나는 해석을 하지 고려가 세워지면 골骨이라고 하는 것이고 골격을 갖추기 위하여 하는 것이

고려하는 것이고 고려하는 실행은 음률을 훈련하여 주파수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나는 설명한다

파동을 주파수로 만들어내는 것을 고려라고 하는 것이라고..

우리나라 이름이 한때는 고려이고 지금의 코리아가 고려에서 나온 것이다. Corea

 

어린 영 Baby Spirit인 유령幽靈이 어른 영인 성령聖靈이 되는 과정에 작용하는 것이

말言의 씀庸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내가 줄곧 강조하는 것이 언어의 민낯,

첫 뜻을 아는 것이 말씀공부라고 하는 것이니 문장에 코가 꿰이지 말고 낱말을 하나 들고

그 낱말이 창조된 과정을 찾아보라는 것이지. 그 낱자를 그대 이름으로 하라는 것이지.

밑져야 본전장사라고.. 내 이름으로 오기 이전에 이미 이 낱말들은 존재하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이 세계는 내가 짓지 않은 문자언어가 존재하고 이 문자언어를 '신'이라 하는 것이니

그대의 '신'개념을 만들어라. 글자가 없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신'은 해와 달과 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네시 반에 나서려다 다섯 시를 넘겨서 나섰다.

비가 있나 예보를 보니 열한 시대에 비소식이 있더라.

가벼움으로 나선 길에서 다라아래서 김옥자 채순자여사님과 화잇팅하고 불로천을 건너서

수연이를 만나 소원과 대원에 대한 설명을 했는데 소원은 입을 크게 벌리는 것이고

대원은 팔을 크게 돌려 동그라미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 되네.. 하면서

하얗게 입고 나간 나를 보고 명품이네.. 하길래 사람이 명품이면 입은 옷도 따라 명품이지 했더니

맞다고.. 담아간 아이스브레이크스를 나눔 했는데 이상례여사님도 오시고

정문숙여사님도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다. 여소원여사님도 만나고 문숙언니의 근황을 들으면서

올라가다가 김점분, 이타임 정곡지 여사님들을 만나 나눔 하고 벤치에서 허임복 님을 만나고..

그렇게 내 길복음에 열심이다. 정문숙언니는 나의 이 활발 발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궁금해하시길래 고함을 질러대니 기가 강해지는 것이지요 했더라.

이시아로 가는 굴 앞에서 헤어지고 봉무동 벤치에 도착했더니 종순 씨가 왔다.

 

상주에 일하려 갔다가 일요일에 왔다가 이틀 쉬고 오늘 나온 것이라 했다.

만나서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이름을 부르고 그다음에 붙이는 말이 화잇팅, 최고다를 넘어서 액설런트로 갔다.

액설런트를 했더니 오 색다르다고 해서 둘이 신나게 액설런트를 하였는데

권오준선생님이 커다란 안경을 쓰고 흔들흔들하시며 나타나니 종순 씨가 얼굴도 작은데

안경을 그렇게 큰 것을 썼는가? 하니까 백내장 수술을 했다고 하시더라

청춘의 눈을 찾으셨네요.. 하고 나더러 어디 갔었느냐 안 나타났냐 하길래

저쪽으로 현장파견 다녀왔다고 권 선생님은 가시고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하고

이름 부르기에 붙이는 주문이 액설런트가 되도록 그 주문을 받아오느라고 낙단루에서 풀 뽑은 이야기를 하면서

종순 씨는 내가 없던 기간 본인도 상주로 일을 하려 가기 전에 봉무동 길의 풀을 정성 들여 뽑았다고 하더라.

그려.. 그렇게 같이 걷는 길에 손을 더하면서 우리의 정원이 되게 하는 것이지.

 

혼자 걸을 때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참 좋은 일이라고 길도 이뻐지지만 운동도 되고

그리고 풀을 걷어내면서 내 안의 잡념들도 걷어내는 것이라 의미부여도 하면 되고..

이런 게 통하는 것이 좋지. 같이 풀을 걷어내면서 오다가 헤어지는 자리 다리아래서

액설런트 주문을 담아 이름 세 번 부르기를 다시 하고 헤어졌다. 화잇팅 최고다

액설런트 Excellent(영어로 '우수한', '아주 훌륭한' '너무나 멋진'이라는을 가진 형용사.

북미권에서도 원더풀 판타스틱 등과 비슷한 의미에 감탄사로 많이 쓴다)에서

액설런트가 가장 좋다고 하길래 힘이 센 주문이지.. 했다. 발성을 할 때

액설런트라는 발음을 하면 정말 힘이 가득해진다.

 

전신의 힘을 당겨서 액설런트를 해봐라.. 그대도 해보면 이런 게 기를 당기고

불어내고 채움하는 것이구나 동의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렇게 원리를 가르쳐 줘도

누군가가 옆에서 같이해주지 않는 한 그대 혼자 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좋은 것을 알지만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지. 나는 나를 만나는 이들에게 기운동을 하는 방법을 전달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내가 너와 같이할 수 있는 기운 동이기도 하지.

 

어제 김순자여사님의 ESP수행법을 설명하시는 것에서 기를 불어넣는 것은 어쨌든지

고함을 질러야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기운찬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사람.. 의

에너지를 만들어가는 것이 고함지르기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으로,..

내가 글을 이렇게 두드려대는 것은 그대로 하여금 그대 이름을 부르고 액설런트를 외치도록 하려는 의도이지

그 외의 의도는 없다. 나를 만나는 이들은 이런 좋은 정보를 많은 사람에게 가르쳐 주면 좋을 것이다고 하길래

나는 내게 맞는 수준의 한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중요하지

나와 레벨이 맞지 않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내 격이 실추되는 선택을

내가 하는 것이 되는데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겠냐고 내 정보가 귀한 만큼

귀하고 귀한 이에게만 전하고 싶은 것이라고 경자에게 내가 글을 길게 쓰는 이유를 설명했더랬다.

길게 쓰면 중간에 읽다가 포기하라고.. 그만큼 귀한 정보는 아무나 얻는 것이 아니라고..

인내가 있고 지루함을 견디어내는 이에게만 달달한 힘이 되고 내공이 되고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라고

 

예수라는 말씀을 가르치던 메시아가 같이했을 때는 ‘너의 믿음대로’된다고 했다.

즉 예수라는 대상이 같이 있을 때는 예수에 대한 나의 의지나 개념이나 이해라는 것으로 해석되는 ‘믿음’에 따라

현장이 생긴다는 것이지. 보기를 원하면 그 원함의 크기만큼 이 믿음이고 듣기를 원하면

그 원함의 크기만큼이 믿음이고... 즉 믿음=원함이 된다 믿음대로 된다는 것 무엇을 얼마의 극진함으로

원하는가에 따른 행동이 있을 것이고 그 행동의 결과가 믿음대로라는 것이다

 

그대가 믿음을 말하면서 믿음(피스티스, 믿음(Belief, Faith)은 어떠한 가치관, 종교사람사실 등에

대해 다른 사람의 동의와 관계없이 확고한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개인적인 심리 상태)의 개념이나

실천 Action을 설명하거나 행동하지 못하면 자가의 체험을 통하여 형성한 믿음생활자가 아니라

전습되는 교리나 사상으로 세뇌된 것이어서 가스라이팅 당한 종교의 먹잇감일 따름이다.

 

그대가 그대의 믿음 즉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부터 확실하게 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그래서 믿음은 개인적인 심리상태이기 때문에 객관화가 되지 않고 객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과학적인 분석이나 정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다. 믿음은 개인적인 심리상태 즉 감정이라고 나는 파악한다.

사람에게서 소통되지 않는 감정을 가상의 상상의... 무엇엔가 의지하는 것으로 나 역시 믿음이 있는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의 증거라고 하듯이 나의 믿음은 내 몸을 근거하로 하여

몸이 발생시키는 몸짓과 소리와 언어와 글자들을 알고자 하는 도전이라고 설명한다.

 

믿음은 도전이다. 믿음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도전이다고 생각하고 내가 이해하지 못한 말쓰임을 만나면

그것을 풀어가려고 도전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설명한다는 것이지. 나와 이 믿음이라는 개념을 같이한다면

나와 같이 공부하자.. 믿음대로 된다는 예수의 말씀이 그러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성령에게 물으라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보혜사 성령에게 물으라는 가르침을 나는 지킨다.

모르면 하늘 향해 외치고 부르짖는다. 하늘 향해 외치는 자 구원 얻는다 하늘 향해 외치는 자 영생 얻는다..

이 말을 나는 소리선을 통하여 방언을 통하여 실천한다. 예수가 다 이루었다고 한 성령을 부르짖음으로 당기면

그 성령이 내 어린 영을 보살피고 가르치고... 한다는 것이 내 체험이다.

나는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 의문이 생기면 하늘 향해 외쳐 성령에게 도우심을 구한다.

나의 자존심이다. 성령이 되기를 다 이 룸 한 예수의 그 복음을 따르는 것이지

성경을 풀어내는 이들의 말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보혜사 성령이 가르치는 가르침을 능가하는 이들은 만나지 못했다.

 

성령의 주파수에 내 주파수를 맞추려고 나는 고함을 지르고 부르짖고 방언을 하고..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그런다. 다른 목적이 없고 다만 나는 보혜사 성령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배우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대의 종교는 믿음을 설명하는 현장의 한 쪼가리영역일 수 있지만 중심은 아니다

즉 줄기에서 삭아서 떨어진 나뭇가지일 수는 있다. 땔감으로 아궁이에 던져질 삭정이를 붙들고

믿음이라 착각하는 것도 그대의 자유이고 선택이니 누가 뭐라 하겠는가마는

그대의 도달할 자리는 아궁이다 불심판이라고 하는 것이지.

 

그대가 잡고 있는 믿음가지가 가지가지지만 그 가지가 줄기에서 나온 산가지인지는

그대 스스로가 확인해야 한다. 교리에 따른 종교생활을 배우고 그 교리를 따라 종교생활을 한다면

그대는 종교인이지 신앙인이라 하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일 것이다.

교회당의 교리나 예배 절의 법문이나 예불들을 섬기고 사는 것은 종교생활이다.

신앙생활 즉 믿고 우르르 다는 뜻인 신앙은 종교와는 차원이 다르다.

종교는 외부의 가스라이팅에 의해 길들여지는 ‘길들임’에 중심이 있고

신앙은 스스로의 의문을 마주하는 ‘올곧음’에 중심이 있다

 

종교인의 특징은 의문의 답을 스스로 신앙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유명하다 신령하다 등등으로

알려진 카더라라는 양탄자를 타고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잡히고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는 이들이

거느린 숫자가 뭔가 되는 듯이 그들을 추종하는 노예살이를 하면서 착각을 한다.

 

언어를 들어보면 나온다 주의 일, 주의 종, 하나님의 일꾼 주의 성사업 등등 그런 낱말들을

열심히 발화하는 이들을 만나면 재빨리 떠나라 물론 절에서도 불사니 뭐니 하면서

앵벌이 언어를 던지거나 천라지망으로 위협공갈로 투척하거든 바람같이 멀어져라

그들은 자기 배를 채우고 자기의 의식주를 붓다나 예수나 등등의 이름을 팔아서 채우려는

장사꾼이지 정작 그대의 믿음이나 영혼엔 관심이 없다.

자기의 영혼의 상태도 파악하지 못하여 어린 영인지 어른 영이 되었는지도

증명하지 못하는 자가 남의 영혼을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대중들을 선동하는 이들의 레벨은 모인 대중의 레벨과 같다고 본다.

왜냐 유유상종이거든. 모여든 자들의 수준이 모이게 한 이의 수준이라는 것이지.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나는 추종자를 두지 않는다. 왜냐 나를 따르는 이가 나의 수준을 나타내기에

내 수준이 너에 의하여 정의되는 것을 사양하기 때문이다.

 

소리는 내가 가르칠 수 있지만 내 의식은 가르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으로

나를 추종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지. 나는 언어개념을 풀어가는 글을 쓴다.

물론 내가 만들어가는 개념이다. 너에게 강요할 정보도 아니고 가르친다고 그대가 동의할 수도 없는 정보다.

내 글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나와 같이 성령에게 구하면 된다.

은사는 다르지만 성령은 하나라고 나를 가르치시는 성령이 너도 가르치면 나와 같은 개념을 가지고

 

붓다시대에서 예수 그리스도 시대로 진화하였고 그리고 성령시대로 진화하였다.

그대는 지금 성령시대를 사는데 성령시대를 살려면 그대가 성령이 되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그대가 어린 영인지 영이 있기나 한지부터 살피라고 하는 것이고

내가 그대의 영의 실체를 그대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고 이름을 부르는 훈련을 통하여

성령이 되는 과정을 가게 된다고 나중에 왜 이름을 그렇게 부르게 하는지..

이름이라는 명패를 붙이고 불러대야 자기력이 되는 이유에서라고..

예수나 붓다 부르지 말고 그대 이름을 불러라. 입을 크게 하고 두 팔을 크게 벌리고..

그대 이름을 불러 액설런트를 해봐라.. 하기 쉽다는 생각은 그대의 착각이다.

전력을 다해 할 수 있으려면 훈련을 꾸준히 해서 단전을 단단하게 하여야 한다.

종순 씨도 아직은 혼자 자기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나는? 열나 잘 부르지..

너에게 부르라 가르치는 내가 잘 부르도록 훈련하는 것도 내 성장이지 않겠는가..

그대의 이름을 부르라 그렇게 그대의 영혼이 꽃이 핀다.

천만 송이 꽃이 피도록 그대의 이름을 땀방울이 피 방울로 떨어지도록 불러라.

불러보면 내가 왜 이렇게 이름 부르기를 강조하는지.. 알 것이다

가장 쉬운 일인데 가장 어려운 미션이 그대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기다.

 

 

https://youtu.be/f1WZntBscz8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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