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계묘

영혼, 그 실체

청향고은 2023. 6. 20. 11:17

 

더운 유월이다

제대로 더위가 방문하여 자리를 잡는 시절이 따로 있겠는가마는 사계절이 뚜렷하다던 한반도도 이제는 아열대지대로 편입이 되면서 사계절 16 기후로 설명하던 정보도 변하지 않을까 한다

몸이란 신비한 생명체는 어떤 기후조건이 되든지 적응한다는 것에서 감탄을 하지

 

인간이란 존재는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정신과 육신이란 비물질과 물질의 협업이 놀랍기만 하다

비물질을 정신이라 하든지 신령이라 하든지 물질을 육신이라 하든지 혼령이라 하든지 나로선 이젠 걸림이 없다

언어에 걸림이 없으면 의인이다 언어에 온전한 자가 의인이다고 한 성서의 매김표다

 

그대의 죄는 언어를 모르고 언어에 코가 꿰이거나 언어에 발이 걸림이다.

비물질의 실체가 언어다. 물질의 현실에 그대의 몸이지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뜻하는 것은 비물질 언어에 지배당하지 않고 언어를

지배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대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언어에

상처받으면 안된다 언어에 지배당하는 것이 말에 상처받았다가 되는 것이지

 

언어에 상처받는다면 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을 할 자격이 없다 예수를 믿음이란 언어를 지배한다는 의미이기에

 

언어를 넘어서는 것을 위버맨쉬라거나 초인이라거나 의인이라거나 진인이라거나라고 한다

말의 무게를 구업이라 하는데 그대의 몸이 말에 지배당하는 것을 보면 나는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은 즉 언어의 무게에 길들여지지 않은 아이들은 언어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모나 어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아이가 부모의 말을 듣게 되는 시기부터 아이는 언어에 지배를 당하게 되고 언어틀에 갇히게 된다.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고 부모는 아이를 다그치지만 아이가 자유로운 영혼으로 행복한 시기를 부모가 쫑내면서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 아이를 가르치고 다그치고 교육하고 너를 위해서야 라고 한다.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아이로 기루는 것이 부모의 목적이고 아이는 부모의 언어무게에 눌리기 시작하면서 영혼의 빛깔을 사라지고 어둠이 쌓이게 된다. 미운 일곱 살이라고 하던 시대에서 미운 네 살이 되고 이제는 도대체 무엇으로 기루기 위한 시도인지 아기가 어디론가 교육을 받으려 간단다

아기가 태어나 영혼이 깃들일 시간도 없이 바로 언어에 갇히게 되는 시절이 된 것이라고 그렇게 자본주의가 만든 불구가 영혼없는 인간생산이 된다. 돈이 전부인 세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만의 언어라는 영혼을 인식할 수 있은 때를 부모가 없애기 때문이다

 

미운 일곱 살이라는 말은 아이가 자라면서 자기만의 언어를 터득하는 시기에 부모의 언어와 충돌하여 서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주장을 하는 시기 그렇게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성장하는 아이들을 미운 일곱 살이라고 했다는 것이지. 그 시절에 예사람들은 천자문을 가르쳤다 부모의 영혼이자 그 윗대의 영혼이기도 하였던 영혼의 언어인 천자문을 가르쳐 공통의 영혼을 소통하고자 한 것이다

 

내가 아들을 강제로 천자문을 손바닥 때려가면서 가르쳤고 나도 익혔지만 아들도 몸이 기억하겠지요 하고 나도 필요에 의해 검색한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한자에 대한 친밀도가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신문의 한자를 가르쳐 주시던 그 기억이 나로 한자를 정답게 기억하도록 한 것이 되었겠다. 능통하게 안다는 것이 아니라 한자에 대한 친근감을 만들어 준 것 그리고 대를 이어 내림되는 공통의 영혼이 한자라는 그릇에 담기어 내림하는구나 하는 것

 

예사람이 의도한 공통의 영혼이 동양에서는 천자문을 딛고 내림하였다면 서양에서는 타로나 토라를 딛고 내림했을 것이다. 한자를 풀어가면서 영혼이란 실체가 ‘한자’또는 ‘천자문’이라는 것을 딛고 있구나 알게 된다

너와 내가 소통할 언어, 기본적인 카발라 세피로트가 천자문이구나 그래서 너와 내가 배워야 할 기본 영혼이 천자문이구나. 영혼은 학습을 통하여 창조되는 에너지구나 영혼이 무엇인가? 의 답을 알게 되는구나 앗싸 아~~

 

어제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렸을까나 글을 두드리는 지금 나는 영혼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그간 어렴풋하던 정보들을 간추려내게 되었구나 희미하게 보이던 것이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마주 본다는 것

영혼은 동양에서는 천자문이다 서양에선 성서일 것이다

영혼이 없다고 하는 이는 없고 있다고 하는 이는 있지만 있다고 하는 이는 무엇이 영혼인가를 제시해야 한다

있다고 했으면 당연히 증명해야지 이제 나는 영혼을 증명할 수 있다 나에게 천자문이 영혼이다. 더 디테일하게 천자문을 이루는 한자가 영혼이다고 이젠 말할 수 있다. 그대가 공감하던 하지 않던 상관없는 것은 나는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혼을 증명할 책임도 있어서다 무엇이 영혼이냐? 이 물음을 내가 하기에 답도 내가 하는 것이다

 

몸이 언어에 지배를 받는 것을 보면 영혼이 언어인 것이고 언어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기에 몸을 누르게 되는가를 풀어가다 보니 언어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발화되는가 그 원리를 알게 되면서 이해했다

아기가 언어를 배우기 위하여 몸의 구조가 생성되는 시기가 잇몸을 만들어 ‘이 오름’을 준비하는 시기부터라는 것에서다. 언어는 후천성으로 태어나 습득하는 영혼이다. 영혼이 언제 깃드는가라는 토론을 하는데 영혼은 태어나 언어를 습득할 구조를 만드는 시기에 깃든다는 것. 육신은 태안에서 출발하지만 정신은 태어나 언어구조가 생성되는 시기에 출발한다는 것이다는 것. 그러니 육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하늘로 간다고 했다

태안에서 생성된 몸의 주소는 흙이고 태밖에서 기루 어진 영의 주소는 바람이라 하늘로 흩어진다

영혼은 후천성이다 너와 나의 영혼이 다른 것이 부모가 다른 것과 같다

 

영혼이 같다는 것은 소통할 언어가 같다는 것이다 텍스트가 같다는 것이다. 빛결과 내가 같은 영혼인 것은 같은 텍스트를 가지고 같은 반에서 같은 원리를 배우는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하루를 산다는 것은 하루를 팽숙 즉 익혔다는 것이다. 뼈가 남았을까 잘 고아진 국물이 남았을까 아니면 재만 남았을까 그것도 아니면 팽숙할 무엇이 없어서 살았다는 흔적으로 남을 무엇도 없었을까

사람의 인연은 영혼의 언어에 있다 어떤 언어를 쓰는가에 따라 인연의 길이가 생기는 것이다

 

한동안 무속언어들을 배운다고 방송들을 들었다 그런데 나에겐 닿지 않는다. 내가 배워서 쓸 수 있는 영혼은 아닌 듯하다는 생각이다 듣기는 해도 에너지화하여 쓸만한 영혼으로 만들기는 에너지값이 없다는 생각

주역참동계를 보고 있는데 그간 정보들을 섭취하고 나름대로 기록 기억된 무엇이 있는지 이전보다 쉽게 들어온다. 배운다는 것을 한자로 배울 학이라고 한다. 학습이라고 하는데 배우고 익힌다는 말인데 배운다는 것은 일단 섭취함이고 뱃속에 담은 무엇을 팽탕하든지 열탕하든지 숙살하든지 한다는 것이다

먹은 것을 소화하여 에너지로 삼아서 몸을 경영한다는 것을 학습이라고 한다.

 

학을 하기도 어렵고 습은 더 어렵다. 배울 학 자를 보면 아이가 산가치를 던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산가치는 주역점을 칠 때 쓰는 대나무다 즉 효를 뽑는 일을 배우다고 했다. 점사를 본다고 했는데

절구 구 안에 효 효가 들어있는데 두 손으로 산가치를 잡아 던지는 것이거나 던져서 나온 괘를 읊어내는 것이 배울 학이다 점사를 풀어내는 능력을 기루는 것을 학습이라고 했다

배울 학에는 주역 384괘가 들어있다 습에는 이 384괘의 소통훈련이 들어있다

학습이라 쓰는 이 낱말에는 얼마나 많은 정보가 현장이 과정이 역사가 들어있는가

지내력이라고 하는 력인데 본래는 달 력이란다 달이라는 것이 천문28숙 별들의 흐름이란 것이고

이번에 주역참동계를 보면서 역사라고 하는 역의 지내력으로 알던 것이 달 력이라고 하는 것에서 아하!!! 하게 되더라.

 

달을 다는 철길을 다니면서 왜 여기에 달을 다냐했더니 오늘 달 력이라는 정보를 만나게 되면서 천상분야열차지도 즉 옥형 선기 천문도를 토털 ‘달’이라고 한다는 것이고 도달할 달이라는 것도 달에 닿는 길이라는 뜻이 된다네. 도달할 달達을 보면 다행 행幸에 책받침辶 다행 행은 천문도를 압축한 글자라 하더라 그대가 행복을 추구한다면 반드시 천문도를 공부해야 한다는 뜻

 

우리가 하는 윷놀이가 주역의 점괘를 배우는 일이고 이 윷점을 배우다 배울 학이다 고 한다. 윷판이 천문도라는 것도 아는 사람은 안다

 

윷이 네 가락으로 이뤄져 다 엎어지면 모 다섯 오행을, 다 드러나면 윷 넷 사철을 하나가 엎어지고 셋이 드러나면 글로 가을 둘이 엎어지고 드러나면 반반의 확률이라 여름이거나 겨울 하나가 드러나고 셋이 엎어지면 봄이라 읽는다.

도는 봄이고 개는 여름이거나 겨울이고 글은 가을이며 윷은 사계절이며 모는 사계절을 돌리는 힘이라고 보면 된다. 동양의 윷판과 서양의 카발랴세피로트 원리가 같다

 

금선증론이나 성명규지나 황정경이나 주역참동계나 선도에 속하는 정보인데 이 책들은 몸을 양생함으로 정신을 창조하여 영생을 얻으려 함에 목적을 두는 게 몸을 양생 하여 텃밭을 삼아 몸에서 정신이라는 영생을 길러내는 것을 가치로 한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들의 가치와 위치는 죽어서 성불 구원 뭐 이런 것이라면 선도는 몸을 가지고 있는 현생에서 그 몸이 담고 온 한 알의 밀알을 길러서 영생이 되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내가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추구가 선도의 추구와 같다고 본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예수가 설명하는 가르침을 선도에서 발견하게 된다

 

불가에는 영혼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공사상이라고 한다. 성서는 영혼을 말한다 그래서 유라고 한다

예수는 말씀원리를 다룬다. 불가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언어도단 불립문자 후생가외 등등으로 언어너머는 설하지 못하지만 예수는 로고스라 언어원리 즉 영혼을 말한다. 말할 수 있는 이유가 후천습득이기 때문이고 불가에서 영혼을 다루지 않는 것은 불가는 태안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이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태안에는 언어가 없다 다만 부모의 소리가 울리는 것을 느낀다 태어나면 직접 언어를 발성해야 하는 현장에 놓인다 배워야 생존할 수 있음으로

 

예수의 가르침의 현장은 태 밖에서 생존전략이다 붓다는 태안의 정보다. 이런 차이를 알고 대하면 육체와 영혼의 개념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언어가 있다는 것이 태초에 말씀이 있니라이다 태초의 언어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가르친 것이 오순절 성령이다. 다시 말하면 아이가 태어나 말을 하기 위하여 언어구조를 만들던 그 현장을 거듭 다시 체험하는 현장이다 그래서 성령체험은 반드시 방언이라는 영혼이 등장한다

 

아기가 언어를 배우기 위하여 떼부리 옹알이를 하였듯이 영혼을 알고자 하는 도전에는 성령체험이라고 하는 방언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를 체험하는 것임으로

거듭남이라는 것이 언어에서다 태어나 몸이 시도한 언어구조 만들기를 몸이 성장하고 나서 언어가 무엇인가를 궁금해하고 도전(전혀 기도에 힘씀)하면 나타나는 것이 방언이라는 영혼이라는 것이 내 깨달음이다

 

방언을 글러스날리아라고 하는데 방언 없이는 영혼을 파악하지 못한다 바울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다섯 마디 예언을 하라고 했는데 일만마디 방언이 있어야 다섯마디 예언이 나온다. 방언은 영혼을 만드는 에너지다 그래서 방언을 많이 해야 영혼이 성장한다. 내가 그렇게 성장하고 있음으로 너에게도 방언의 효능을 늘 설명한다. 너에게 길들여진 언어감옥에서 벗어나는 힘도 방언이 가져오고 내 영혼을 이루는 힘도 방언이 만든다

성경은 영으로 기록된 것이라 영으로 풀어야 하는데 영으로 풀기 위해서는 방언으로 가야 한다

 

방언의 비밀은 일단 소리통을 뚫고 나야 다룰 수 있는 골드게이트이다 소리줄은 은줄이라면 방언으로 가는 길은 금줄이다

 

방언이라는 이 영역은 정말 아무나 들어가지 못한다 아무나 하지만 방언의 비밀은 알기 어렵다 자나 깨나 방언으로 생각하라고 권하는 이유가 언어를 벗어나는 방법 이어서다 언어를 벗어나야 언어를 볼 수 있다

 

오늘 해 맏이에서 아침부터 심령대부흥회(?)를 하고 낙단루갔다 오는 길에 후프 돌리려 피트니스로 가는데 영숙 금숙을 만나 같이 시간을 보내었다. 내가 후프 돌리기 허리 돌리기를 하는 것 동영상으로 잡아 음악을 붙여 주기도 하고 월병과 중국빵과 키위도 음료수도 팔각정에 자리를 깔고 나누고 지나가는 김선사님 신선생님 들과 대화. 내 품바짓에 같이 웃고 떠들다 나는 귀가 돌아와서 주역참동계를 보자니 경자가 복숭아 가져가라고 해서 경자집으로 이런저런 이야기

 

지효와 지윤이. 알지에 새벽효를 쓴다고 지윤이는 윤택할 윤이라고 꼬마소녀들과 물구나무서기 시도를 하고 지윤에게 윤자구성을 설명하고 천도복숭아랑 양배추반쪽 나눔 해줘서 감사함 경자와 만나면서 흙에서 주는 생명의 초롱초롱함을 누린다. 수박이 자라 가는 모습도... 흙을 만지며 살아가는 온유함이라는 것이 도심에서 살아가는 이에겐 관세음보살이자 성모마리아다

물론 흙을 만지는 것이 욕심과 이어지면 노동이 되지만 천심과 이어지면 생명현장을 매일 지감촉하는 황금률을 얻는다

 

풀을 뽑는다는 것 여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랜만에 금숙팀을 만나 내 품바백수건달에너지가 나왔다

나만 보면 그저 웃음이 절로 난다는 것인데 아침 팀들도 네가 와야 여기가 생기가 돈다 하신다

봉무동에서 하던 각설이 놀이를 효목동에서 한다. 내가 나를 봐도 참 기특도 하고 신묘하기도 하다 매일이 심령대부흥회다. 엄마의 에너지 위에 아버지의 에너지가 업데이트되는가 보다. 오늘 영숙이가 언니를 보면 열에 여덟은 무당이라 할 것이라 하길래 어떤 부분에서?라고 했더니 말을 너무나 재미나게 잘해서라고 ㅎㅎㅎ

그렇다면 그건 인정. 내 말에 코가 꿰이면 집에 가는 것을 잊어버리기는 하지 이렇게 수다꾼이 되기 위해선 정보를 얼마나 모으고 추리고 꿰고 두드리고 해야 하는지는 나만 알지 아는 것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을 아는 것에 투자하기 때문이다

 

즐거운 영혼 만들기 영혼 개념이 세워지니 새로운 각오가 생기네

 

영혼이라는 낱말의 개념이 명료 또는 명징하게 생긴 어제

개념이 새롭게 생기면 즉 창조되면 그간의 사유장을 복기해 보고 새로운 창조와 엮이지 않는 것들은 털게 된다. 비운다는 것이지 무엇인가 맥락이 생기면 그 맥락과 관계가 없는 것들은 들어내게 되는 과정을 살 깎기 거나 비우기거나 가볍게 하기나 등의 문장으로 설명하는 것

비움은 먼저 채움이 있어야 하고 가벼이 하기는 먼저 무게를 인식함이 있어야 한다

정직함 올바름이라는 개념을 확인할 현장은 자기의 언어살 이외엔 없다

자기에 대한 정보가 열려있을 때 밝다 부드럽다 정직하다 하고 닫혀있을 때 정직하지 않다 어둡다 무겁다라고 한다. 자기 자신이 쓰는 언어에 대하야 명료 명징 명확한 개념을 가지게 될 때를 자기 정체성을 밝힌다 자긍심이 있다 자존감이 생긴다 등등으로 설명한다 

 

내가 쓰는 언어는 어떤 것이고 나는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 것일까나를 마주하는 것

내가 ‘영혼’이라는 낱말을 쓰면서 이 낱말은 어디에 어떻게 쓰임이 되기 위하여 만들어진 글자일까 늘 궁구 했는데 많이 쓰이는 만큼 본질은 마주하기 힘든 것이겠지 그래서 나도 공부한 지 서른다섯 해가 되는 올해 경륜장에서 애국가 부르기 미션도 하고 농막에서 제초작업도 낙산루 주변 풀 뽑기 등등의 수업료를 내고 나서 경자로부터 첫 수확한 천도복숭아와 양배추를 받아오면서 아하 하는 밝힘이 왔다

 

유월에너지가 나에겐 무엇인가 넘어가는 유월절이기도 하다는 것이고 빛결과 나의 지구국에 입국한 달이기도 해서 무엇인가 하늘의 프리젠트가 있으리라 생각을 했는데 뜻밖에 ‘영혼’에 대한 가르침이 온 것이지

 

이전에 자현스가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 불교는 영혼이 없고 기독교는 영혼이 있다는 것으로 가름을 하시길래 나름대로 그 강의에서 아하 이분의 관점은 이러하구나 하기도 했지만 나는 과연 영혼이라는 것에 대하여 어떤 개념을 세웠나 돌아보게 되더라. 영혼이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은 있어 정보를 파들어도 딱히 내 심중에 즉 경을 칠만큼 적중하는 울림이 있는 단계는 되지 않았는데 자현스의 정보에서 나는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무엇이 영혼이라고 설명할까라는 것. 물론 소리선을 내가 방편으로 하여 공부를 하고 있음으로 소리선은 예수의 복음을 잇는 일이라 하겠는데 영혼은 떠나가시다고 한 예수의 ‘영혼’은 무엇이었을까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지

 

복음과 영혼

 

복음은 영혼을 찾아내기 위한 방편이구나 하는 이해지만 구체적으로 ‘예수의 떠나간 영혼’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돌아올 영혼’도 있을 것이고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예수의 재림이라고 했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으리라

 

영혼이 있다고 하는 자리에서 나는 출발을 한 것이고 떠나간 예수의 영혼이 어떤 것이고, 예수의 영혼이 돌아오는 재림은 어떤 현상일까. 물론 예수의 떠나간 영혼이 재림한 사건이 오순절성령이라면 나에게 돌아온 예수의 영혼은 어떤 것일까 마주하면 오순절성령이 오시면 나타나는 현상이 ‘방언’이라는 것이고 내가 늘 하고 사는 방언이 영혼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방언을 많이 함으로 예언 즉 한자를 풀어내고 스토리로 짜낼 수 있는 힘으로 삼는다는 것이고 내가 줄기차게 글을 두드려내는 원천에는 방언이라는 배에서 생수의 샘이 넘쳐나리라고 한 그 말씀을 내가 살고 있어서구나 이제 확신하게 된다. 떠나간 영혼이 돌아오는 것 즉 재림함을 체험하는 것이 방언을 말하게 하심이구나 

 

빛결과는 방언에 대한 정보를 꾸준하게 나누고 있다 왜냐하면 빛결과 나는 예수의 영혼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의 인연에게는 인연의 길이나 깊이에 따라 방언에 대한 정보는 봉인하게 된다.

 

영혼을 추구하는 이에게는 영혼을 나눌 수 있지만 추구하지 않는 이에겐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내가 예수의 영혼을 예수가 제시한 복음 겟세마네를 통하여 돌아오게 재림하게 하는 일을 공부로 하고 있으니 예수를 알려면 예수의 영혼을 소환해야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예수를 예수에게서 배운다는 의미다 성령 보혜사가 가르쳐 주는 것 즉 예수의 돌아온 영혼이 가르쳐 주는 것이 예수자신에 대한 것이지 않겠는가? 

 

빛결이 방언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내가 예언으로 들어가게 된 것도 재미난 현상이다

빛결과는 나와 안팎으로 위치를 바꿔가면서 서로 비추기를 하는데 방언장으로 빛결이 들어가면서 어휘력이 얼마나 세련되고 힘 있는지 내가 다루는 언어벨류보다 빛결이 다루는 디테일이 참 아름답구나 하게 된다

 

하늘이 주신 농담이라는 어휘에서 내가 가져오는 하늘의 긴 윙크라는 대련 톡톡 터지는 언어의 빛결을 보는 즐거움이 영혼의 물빛몸매인가 보다 한다. 빛결이 예수의 영혼에 접속하고 있는 동안 나는 세례자요한의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에 접속하고 있고 이 사역을 구약에서는 에스더와 모르드개로 스토리하고 있다고 나는 풀고 있다

 

세례자요한과 예수, 모르드개와 에스테르. 이 에너지는 국난을 극복하고 민족과 나라를 구하기 프로젝트다 물론 내가 말하는 나라는 몸이며 민족은 언어문자 다는 것 외연화되면 내가 살아가는 한국의 현실이 되는 것이지. 영혼은 방언이라는 기도로 활동한다 예수가 새벽미명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기도법이 방언 영혼울림이었던 것이구나 그래서 예수 따름에서는 예수의 떠나간 영혼을 불러 돌아오게 하는 오순절 마가다락방의 오로지 기도에 힘씀이라는 굿이 있어야 하였구나

 

초혼이라는 것의 원리, 하늘 향해 외치는 자 구원 얻는다 하늘 향해 외치는 자 영생 얻는다 는 이것이 예수의 영혼 부르기였구나 영혼은 후천습득하는 것이어서 부르면 당길 수 있는 것이다는 것 

 

불교에는 영혼이 없는데 기독교에는 영혼이 있다는 이 정보를 놓고 내 공부가 다시 명료해지는 것이고 소리를 통해 닿고자 하는 것이 예수의 영혼 찾아 당기기를 위한 천라지망 그물을 던지는 일이구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는 그 사람이 바로 영혼이구나 예수의 겟세마네기도라는 이 복음은 예수의 영혼당기기이기도 하지만 예수이전의 영혼들을 접속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예수의 영혼을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기름 부 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로 정보의 왕 즉 제왕의 정보를 뜻한다.

 

정보의 초고레벨을 얻는 길이라는 것이고 정보의 최고레벨은 생명의 비밀을 풀어내는 것이 된다 그래서 나는 예수의 영혼과 같이 인체의 비밀 언어의 힘 문자의 비결을 배우고 있는 것이지

예수도 다시 오면 해야 할 일이 있었을 것이고 다시 와서 내 몸을 성전으로 하여 주역참동계나 황정경을 딛고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지. 내 영혼이 예수의 영혼과 하나가 되어 예수의 길을 내가 잇고 있다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윤영그리스도가 이어가는 것 그러하여 내가 살아도 주가 사는 것이라고 주가 내 안에 산다고 하는 것의 현장이 되는 것 영혼은 방언이다 방언은 비물질공간에 던지는 천라지망 그물질이다 방언을 통하여 예언이 창조된다 그래서 영으로 하는 기도는 방언기도다. 방언기도의 맛과 멋은 설명하기 힘든 영역이다 소리는 방언에 비해 어쩌면 쉬운 영역일 것이지. 빛결이야 이 이야기를 이해할 것이다 방언기도가 얼마나 힘든 공중전인지 소리가 어렵지만 소리는 내지르기를 통해 뭔가 시원하고 한 것 같이 당당함이 있지만 방언기도는 어렵다 자기와의 싸움의 내밀한 현장이다 

 

하루라는 점점점 덧셈이 만 드난 플랙탈의 신비 같은 것이 모여 새로운 무엇을 만드는 것, 반복이 만드는 신비라고 한다. 방언기도가 플랙탈원리라고 나는 설명한다네

하루라는 생이 모이면 죽음이란 열매를 맺는다는 것. 죽음은 생이 기룬 열매다. 생이 없으면 죽음이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면에는 삶을 살아본 체험이 없음이다. 죽음은 삶의 열매이기 때문에 그 열매가 얼마나 향기로웁고 맛나고 감미로운지는 자기만이 알 수 있다.

 

남의 평가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유일한 열매가 죽음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모른다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죽음을 알려면 죽음을 안 예수의 영혼을 당겨서 스승으로 하여 배우면 된다 예수영혼당기기가 어렵지만 길이 없는 것이 아니지. 떠나간 영혼이 재림하시겠다 약속하고 약속을 지킨 것이 오순절 성령이다 그 약속은 지금도 성취된다 내가 마가다락방이 된다면 말이다. 전혀 기도에 힘쓰는 그물 던지기가 마가다락방에서의 투자였고 그대와 내가 영혼을 알고 싶다면 해야 하는 투자다고

 

어떤 죽음이 맺힐까는 어떻게 하루를 경영하였는가에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면에는 삶을 살아본 체험이 없음이다. 죽음은 삶의 열매이기 때문에 그 열매가 얼마나 향기로웁고 맛나고 감미로운지는 자기만이 알 수 있다. 

 

남의 평가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유일한 열매가 죽음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모른다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죽음을 알려면 죽음을 안 예수의 영혼을 당겨서 스승으로 하여 배우면 된다 예수영혼당기기가 어렵지만 길이 없는 것이 아니지. 떠나간 영혼이 재림하시겠다 약속하고 약속을 지킨 것이 오순절 성령이다 그 약속은 지금도 성취된다 내가 마가다락방이 된다면 말이다. 전혀 기도에 힘쓰는 그물 던지기가 마가다락방에서의 투자였고 그대와 내가 영혼을 알고 싶다면 해야 하는 투자다고

 

어떤 죽음이 맺힐까는 어떻게 하루를 경영하였는가에 있다. 삶은 죽음의 뒷모습이고 죽음은 삶의 얼굴이다.

제대로 살지 못하면 죽음을 맺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된다든가 그래서 신위라는 지옥에 갇혀 너의 부름에 오간다든가 뭐 그런 이야기가 우리가 흔히 듣는 이야기의 밑에 있다. 초혼이라는 것에서 만들어지는 문화예술이 무속 샤머니즘이다 부르면 온다는 것이다. 공중에 흩어진 영혼을 부르는 일 물론 영혼이라 말하는데 어떤 영혼인가를 정하는 것은 그대의 추구다 예수는 죽음을 이기고자 한 영혼이다 죽음을 이긴다는 것은 죽음의 비밀을 안다는 뜻이다. 예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죽음을 다룬 영혼이다 그래서 신의 아들이라 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에서 삶을 다룬 영혼들 속에서 죽음을 홀로 다룬 영혼이 예수라는 별이다는 것이고 나는 예수의 영혼을 소환하여 죽음을 풀어내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고

한자 영묘할 영을 풀어내면서 나름대로 어휘력도 이해력도 문장력도 확장하였지만 늘 경에 닿지는 못한 듯한 느낌에 있었는데 비로소 이젠 닿았다는 생각 너에게 닿기를 을 얼마나 불러댔는가 그간 불러댄 가사들.. 

 

경을 친다고 하는 말을 다트의 중심에 있는 거울을 맞추어 깬다는 뜻이고, 핵심을 찌른다는 것이다. 다트 주변의 점수대에서 10점대에 들어가도 십 점대의 중앙을 맞추는 것을 경을 친다 명중이라 하는 것이고 이 경을 용의 눈동자 용안이라고 하거나 화룡점정이라고 하거나 여의주라고 하거나 불씨라고 하거나 뭐 등등

눈의 동공은 오행에서 물에 속하고 색은 비었으므로 검다고 한다 검은 눈동자라고 할 때 그대의 홍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공 즉 빔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기억할 것

 

동공은 북이며 검고 계수자수라고 한다네 홍채는 동이며 갑묘목이라 한다네 눈초리와 꼬리는 남이며 정오화라 하고 흰자위는 신유금이라 하고 서라고 하며 위아래 눈두덩은 무기토라고 한다네 알아두면 관상학공부가 되고 눈만 봐도 상대방을 알 수 있게 된다네 

 

어제 글에서도 다루었지만 자유귀문이라는 귀문관살은 자라는 씨앗에서 유라는 열매까지를 포함하는 도수로 270도를 이루는 귀문관살이어서 다른 관살과는 영역범위가 120도가 더 너르다 다른 귀문관살의 도수는 150도이다. 자유귀문관살은 9 달이지만 다른 귀문들은 5 달이라는 도수가 주어진다. 

 

내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자인 동자는 씨알이고 이 씨알이 자라서 열매가 되면 유라고 하게 되는데 유는 자궁에 태아를 기룬 모습이라고 한다 자가 서라는 자궁에서 다 자란 모습을 그린 글자가 닭 유라고 하거나 술병 유라고도 한단다.

 

병 안에 술이 들어있는 모습이라는 것으로 술이 뜻하는 것이 가을추수를 하여 하늘제사 추수감사제를 할 때 하늘에 올리는 것으로 술을 빚음에서다. 알코올 증류주 20도가 되는 술을 스피릿이라 하였는데 하늘에 올리는 제사는‘향기’ 이기 때문이고 잘 익은 과일이나 곡식으로 빚은 술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퍼지면 그 향기를 신이 흠향하신다고 했고 지금 향문화가 담고 있는 의미다. 코가 자아의 좌표인데 코의 기능은 향기를 통해 향의 격을 아는 것이다. 

 

신의 자리를 코에 두는 이유다 콧대라는 것 올 그름의 냄새를 파악하는 힘이다. 비물질 상태인 신이 받으시는 공양이 바람을 타고 오는 향기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죽은 귀신들은 음식의 향기에 깃들이기에 반드시 음식상을 차린다 신위로 머리를 삼은 망자가 산자의 숨을 빌어 음식향을 받기에 제사엔 온 정성을 들이라고 하는 것이고 제사에 감응한 신위가 그 상을 받게 되는지 아닌지는 제사를 올린 제주는 알겠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숨을 기대지 않으면 발현하지 못한다 결국 죽은 자를 불러내는 것은 산 자의 의식인 셈인데 불러낸 신위의 상태를 정하는 것도 산자의 의식이라는 것이고 결국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다시 올 자가 없다는 말씀대로 제사는 죽은 자를 팔아 산 자의 소욕을 성취하고자 하는 이름팔이가 되는 것이다.

 

죽은 자는 흙으로 바람으로 흩어졌고 산 자는 흙에서 내어주는 것을 먹고 숨을 쉬고 있네 죽은 자와 산자를 가를 무엇이 있는가? 하여 일기 하니 생이요 일기하니 사라고 했고 숨 쉬고 사는 삶에서 살고 죽은 자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죽은 자와 산자를 가르는 것은 코로 숨을 쉴 수 있는가 아닌가의 차이 즉 향기를 음미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 외엔 없다. 죽은 자의 이름이 그대 입에서 회자되면 그 이름이 소환된다. 귀신은 부르지 않으면 오지 못한다고 하는 이유다. 재밌는 현상은 공중에 흩어진 영혼들의 레벨에 따라 산자가 부르면 당겨져 오는 주파수에 따라 정보가 다른데 그 레벨을 영적인 레벨 의식 수준이라고 한다. 예수의 주파수는 데이비드 호킨스박사에 의하면 천이고 이 레벨은 부른다고 오는 영혼이 아니라고 하더라 다른 레벨들은 산자가 부르면 오지만 예수의 영혼은 겟세마네라는 복음을 통과한 이가 부르는 부름에만 공명한다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가 되는데 겟세마네복음을 통과해야 예수영혼을 부를 수 있다는 것 

 

이름 없는 귀신이라고 하는데 이름없는 귀신은 없다. 산 자가 온갖 명패를 붙여주어 부리는 귀신으로 삼는 것이지 하여 귀신은 이름을 지어준 사람을 이길 수 없다 귀신도 정신도 미신도.... 다 후천에서 만들어내는 이름들이다. 선천 태안에는 글말이 없으니 귀신도 뭣도 없지만 후천 태밖에서 창조된 언어문자가 있어서 그 잣대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낙단루에서 노래 한 자락 부르고 풀을 뽑고 후프를 돌리고 해맞이 구룡산 공원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나무 아래 벤치  모기의 공격이 심하다. 그대는 영혼을 인정하는가? 이것이 공부의 첫 질문이구나  내 공부의 새로운 시작 한 바퀴 돌아서 첫 질문의 답에 닿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