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임인, 신계頣縘

생각이 멈추면 시작되는 세계, 자기객관화

청향고은 2022. 2. 18. 20:35
 
道는 문자언어로 이뤄지는 생각이 멈춘 자리에서 위버멘쉬를 하기위하여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누군가가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내가 그 길을 가져와 쓸 수도 없다.
날숨으로 만들어낸 문자언어, 즉 자음의 세계를 가테가테하면 들숨이 만들어내는 소리세계가 나타나는데
소리세계를 어떻게 마주하여 소리를 알아가는가? 의 방법을 도道를 찾는다, 닦는다, 안다..등으로 말하는데
탯줄, 젖줄, 밥줄이라고 하듯이 생각이 멈춘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이 소릿줄, 성장聲蔣(소리 성, 줄 장)이라고
나는 설명한다. 그대와 나의 성문은 다르지만 그 성문을 가동시키는 헬륨은 공유되는 원소다.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지만 누구라도 활성화할 수 있는 원소, 헬륨.
 
소리공부에는 헬륨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지고 길어지는 원리도 알게된다.
여태 나는 생각이 멈춘자리에서 시작하는 소리길을 문자언어와 병행하는 공부를 했다.
문자원리도 알아야 하고 언어발생에너지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기댈 수 있는 방법이 소리다.
지금와서 돌아보면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공부를 주욱 이어오면서 성장하게 된 이면에 작용한 힘이 소리를 통하여
업데이트되는 우주령들의 상조하응 도기단원인 것이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라는 의문이 오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전심전력으로 고함하기였다.
우주공간에 파동으로 있는 정보에 내 눈물과 땀이라는 그물망을 던져 공명한 결(力)을 당겨와서
문자를 풀고 언어를 계산하고 그것을 일상에서 확인하는 과정을 내 공부라고 했다.  
 
남들이 묻지 않는다고 나도 묻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의지를 내가 포기하는 것이니까 남이 묻지 않는 것을
나는 묻고 남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나는 말하고 남들이 하지 않는 도전을 내가 하는 것.
그게 나의 나다움이라는 것에 닿기까지 주변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남의 정보에서 벗어나고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옥죄는 의전에서 벗어나는 즉 해탈하는 과정이 얼마나 치열한 전쟁인지는
겪어보아야 아는 것이다. 
 
주어진 모든 격식을 일단 다 벗어나야 한다
너에게서 나에게로 와서 나를 가둔 무엇들의 진위를 가리기위해서는 일단 모두 벗겨내보는 것
그것을 해탈이라고 하는 것인데 안의 것을 다 밖으로 드러내놓고 가라지와 알곡을 가려서 있어야 할 자리에
채워가는 과정, 짝을 맞춤하는 과정은 그 다음에 일어나는 것, 그물을 던져 고기를 길어내어 나누는 작업이라는 것이고 지금 내가 독맥을 뚫고 이제 임맥을 공부하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짝을 찾아 채움하는 과정을 주장하는 것이 임맥이고 들소리를 통하는 것이라는 것 
 
날소리는 토하는 것이고 들소리를 거두어 들이는 것이다. 
나처럼 이렇세 설명하는 정보원은 나외에는 없을 것이다. 그간 온축된 정보들을 바닥부터 뒤집어서 탈탈 털어서
다시 제자리를 찾아서 채움하는 공부의 길, 길을 찾다가 헤매다가 다시 문자언어로 돌아가버리는 그런 순환에서 생각이 멈춘 곳에서 시작되는 공부가 도 공부이고 도는 소리를 통하여 독맥을 뚫어 길을 만들어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내가 먼저 시도해보았기때문에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 
 
그대가 문자언어로 그대의 무엇을 설명한다면 아직도 생각세계에서 살아간다. 생각을 욕계라고 하더라.
소리를 색계라고 하고 소리계를 넘어가면 무색계라고 한단다. 욕계는 음양의 꼴림으로 이뤄지는 것이고
꼴림을 벗어나야 색계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고 색계라고 하는 이 세계는 일상언어로 하면 문화예술을
이루는 정보라고 설명하게 된다. 문자독해력과 언어이해력이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지.
색계를 철학(빤냐)이라고 설명하기도 하더라. 색계를 건너면 무색계가 되는데 무색계는
언어도 소리도 없는 세계라니 무엇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생각과 소리도 멈춘 숨만 있는 세계라고 하는 것이리라 
 
들숨공부를 하게 되면서 날숨으로 뚫어낸 33마디의 뼈마디길의 과정이 나의 무엇을 변화시키고
자라게 하였는가를 돌아보면 길들여진 잣대가 만든 고정관념을 버리게 되고 그리고 상처받은 무엇이
만든 방어기제를 풀게 되고 먹물이 만들어내는 오만이나 편견이나 그런 것들을 인정하게 되면서
내가 어떤 존재이며 상태이며 위치에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안다고 생각했던 그 생각을 버리고 나니 이 세상은 온통 정말 모두들 내가 열심을 내어 살아가는 것만큼
열심히 살아오고 있구나 하는 존경심과 감탄과 고마움이다. 나만 열심히 사는 것은 아니다.
너도 삶의 무게를 지고 최선을 다하여 산다. 서서 기다리는 자도 주의 일을 한다고 한 밀턴의 말이 이해가 되더라.
무엇을 하는 것만이 열심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열심이라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갇혀있다가 비로소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모든 것을 하고 있음과 같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 백점맞기나 0점맞기가 같은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

빛결이나 나나 지금 상태를 점검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존재감을 확인하지
못하는 것같은 완벽주의라는 어떤 틀(지옥)에 갇혀있던 것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할 수 있다는 것에서
나를 본다는 것  
 
감정이입에도 100프로 몰두해봐야 감정의 실체를 알게 된다.
문자언어에 중독이 되어 끝을 파야 문자언어의 실체를 알게 된다. 바닥에 닿아야 뒤집어지게 된다.
그게 지금 나와 빛결이 같이 겪는 과정이라고 본다. 내가 나를 본다는 것, 객관화가 시작된다는 것은
임맥이 가동될 때이다는 것, 독맥을 뚫을 때는 내가 보이지 않는다. 주관이기때문이다.
내가 밖으로 다 토해지고나면 그제서야 객관화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는 것이지
 
나는 감정이입을 어떻게 해봤을까? 돌아보면 감정을 대상에게 투사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투사하는 방법으로 소리(기도)를 하고 무조건 걷기를 했다.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이 걷기와 기도였다.
발바닥이 성할 날이 없었고 무작정 걷고 걷고, 고함지르고 지르고 지르고 울고 울고 울고
그렇게 감정을 토하면서 욕계의 꼴림이 만드는 감정은 벗어나게 되었다
성에 대하여 거침이 없어져야 색계에 들어서게 된다고 하는데 꼴림에 대한 욕망이 사라진 것이 완경을 하면서다.
꼴림이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열렸는데 걷고 소리를 한다는 방법은 변함이 없는데
그것이 만드는 관점이 다양하게 열리고 이해력이 생기면서 야..이러한 세계가 있구나 하는 놀람을 딛고
구령삼정주를 만나게 되면서 일여소원사사명시라는 소망이 생기더라.  
 
즉 빤냐, 정견에 대한 갈망이 생겼다는 것이지. 내가 아는 것이 제대로 아는 것일까..
빤냐를 소망하게 되었고 그렇게 철학을 공부하게 되더라는 것이지. 빤냐와 필로소피아와
색계가 에너지로 철학을 이끌어가는 에너지가 소리선을 통하여 업데이트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제는 철학을 이끌어내는 소리의 신비를 마주하려고 소리를 하게 된다는 것이지.
날숨은 철학을 이끌어내는 힘이 되었다면 들숨은 소리를 마주하게 하는
아름다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

'나'라는 일시무시일은 글(그림, 색)는 외부정보와 말(소리 , 공)이라는 내부정보를
음양으로 하여 본심본태양이라고 하는 중심에서 들이거나 내보내면서 파동(무늬, 紋)를 만들고
주파수(셈, 數)을 만드는 것이 사고 판다고 하는 헬륨가스가 고유성문을 바꿔주듯이 소리세계에 들어가면
헬륨가스는 무엇이 만드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데 아래로 똥방귀가 나가는데
반작용으로 나가는 위의 현상은? 숨골이 열리어서 전신무장한 아테나가 태어나듯이 태어나
숨골로 드나들던 신이 다시 드나드는'깨달음'이라고 하는 정보가 생기는 것이겠다 한다.
두정을 열어라..고 하는 것은 숨골에서 현응혈로 다시 가슴으로 내려왔던 신의 자리를
숨골로 다시 올려라고 하는 것이겠다. 가슴에서 두정 숨골을 열어내는 것을 승천이라고 하는 것이고
두정을 열게 되면 만나는 세계의 정보를 아인계정보라고 하게 되고 구령삼정주로 전해지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구나 한다

가슴으로 내려왔던 신의 자리에서 수정란을 거치고 다시 정자와 난자로,
소천문과 대천문으로 설명되는 숨골로 올라가는 것을 무색계 4천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본다.
4천은 줄기에서 가지로 나가는 것에서 수축하여 가지에서 줄기로 연합되는 자리라고 보는 것.
그대를 구원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다.

생각이 멈추다는 것은 주관을 버린다는 것이다. 예수가 간음한 여인에게 한 말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예수에게 간음중에 잡혀 온 여인은 어느 정보가 객관화되어 드러난 이야기일까? 예수의 욕계, 꼴림에 대한 설명이지 않을까 한다. 육체를 입고 있는 예수가 욕계의 에너지인 꼴림이 없었다면, 예수의 이야기는 힘을 잃는다. 육체로 오신 예수를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했다. 그대와 내가 예수라고 주장하는 내 논리는 육체로 오신 예수에서 시작한다. 예수의 육체와 그대와 나의 육체의 매커니즘이 같지 않다면 예수는 그대와 나의 구원자가 되지 못한다. 육체를 입고 있다는 것이 만들어내는 것이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천사나 사탄은 피가 없다고 했다. 즉 생명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체가 아닌 정보들이 생명체에 스며들어 생명체를 휘두르게 되는 것을 생각에 잡힌다고 하게 되거나 자기관점이 생긴다 고정관념이 생긴다..먹물이 든다..등등으로 설명한다. 생명은 피에 있고 정보는 물에 있다. 정보체라고 할 때는 피와 물이 하나가 되었을 때이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엇다는 것이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은 물을 뜨다가 가져다 주었을 때 그 물을 받아 마신자의 입안에서다. 
 
여섯동이에 채운 물은 여전히 물이고 물을 뜨다가 잔에 담아 가져다 줄때도 물이고 그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은 물을 마신이의 입안에서의 변화라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동양의 황정경에서 혀아래 현응사혈이 있어서 감로수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현응혈수련을 중요하게 권했던 것이 물이 포도주가 되도록 하는 자리가 현응혈이어서다. 몸에서 물을 관장하는 곳에 신장 콩팥이고 신장의 물을 현응혈에서 포도주로 바꾸는 과정을 이행한다고 하는 것으로 그래서 나는 순설후를 훈련하여라 그것이 방언이다고 설명한다. 순설후를 훈련하게 되면 하부의 신장기능이 활발발해진다는 것이고 아치를 훈련하게 되면 심장기능이 활발발해지고 부신의 기능이 건강해진다고 설명한다. 아설순치후를 오온이라고 하고 그것을 개공하게 되는 훈련을 하는 것, 현응혈을 열어서 가동해보라는 권면이다.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하는 방법이 방언이라는 것이지. 방언, 글로스날리아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면서 너에게 전달하는 방법도 단순하게 되더라. 이전에는 방언과 정언을 비교하면서 설명하는 지식에 중점을 두었다면 지금은 어린시절 누구나 거친 체험을 놓고 그것을 되살려내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니 지식은 필요치 않게 되고 되살림하고자 하는 의지를 부추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더라는 것이지. 지식은 같은 지식을 가진 이에게 쓸모가 있는 것인데 같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설명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태어나 체험한 정보부터 기록되기 시작하는 것이 몸이라는 서판인데 가장 깊은 낮은 곳에 저장되어있는 정보를 수면위로 부상시켜서 되살려내는 것을 부활이다 거듭남이다고 한다고 나는 설명한다. 아기시절에 하던 체험을 성인이 되어서 다시 하게 되는 것..그것의 낮섬 어색함 불편함..등등은 아설순치후를 권할 때마다 돌아오는 생경함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의 효율성에 대하여 전방위적인 지식을 동원하여 설명하고 내 설명에 설득이 되면 순설후를 같이하게 되면서 같은 즐거움, 신남을 공유하곤 하였다. 그래서 이길 저길에서 나와 만났던 이들은 다음에 마주치면 순설후음으로 인사를 건네오게 되기도 하고 지금도 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할 기회가 되어 상대방의 기운을 읽게 되면 가르쳐 주는 것이 순설후음, 방언하기다. 선뜻 순설후를 시도하는 이는 잘 없지만 내가 시전을 하면 같이하게 되기도 한다. 봉무동에서 내가 여사님들에게 순설후를 가르치고 아치음을 설명하고 같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여사님들을 통하여 내가 어린시절, 낮은 곳에 새김되어있던 정보를 되살려내기위하여 필요한 에너지현장을 하늘이 허락한 것이였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효목동으로 다니기때문에 봉무동에너지를 멈추고 있지만 돌아보면 어떻게 그렇게 매일 열정적으로 아설순치후를 설명했던 것일까나...신기하지.   
 
방언은 순설후로 말(자음)되지 않는 소리파동, 즉 모음계에 속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문장이 되지 않는 언어라고 설명을 했는데 이제는 순설후라는 통로를 통하여 나오게 되는 소리떨림이거나 울림이라고 하게 되는 것. 순설후를 하면 해보면 알지만 재밌고 즐거운 파동이 만들어진다. 익숙해지게 되면 순설후라는 이 훈련이 물길을 점검하는 청소, 치수라는 것도 알게 된다. 소리통을 늘 청소하는 것. 치수를 하다보면 하도낙서라고 황하에서 거북이가 비석을 지고 올라온다고 순설후를 하다보면 아치력이 생기고 자음이 생성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이지. 순설후방언에서 자음이 태어나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그것을 하도낙서라는 이야기로 전달하고 있다고 본다.
용마가 지고 나오는 정보, 거북이가 지고나오는 정보..그 이야기의 실체를 찾아내면 아설순치후를 하던 시절의 정보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아이가 되지 아니하면..이라는 것, 위버멘쉬는 생각을 만들어내는 문자언어를 넘어섬이다. 문자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가 나기이전에 가동하던 순설후..의 정보이고 이가나면서 가동하는 아치의 정보라고 ...그렇게 너에게 설명하면서 그것이 나에게로 돌아오는 힘이 된다고 생각하기때문에 너가 시도를 하던 하지 않던 그설명을 하면서 내가 순설후를 하기때문에 나의 성장력이 된다고 ...그래서 내가 더 열심히 순설후를 하는 것이고 한만큼 결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과果로 나타나는 것이 언어순발력이거나 이해력이거나 언어를 깨트리거나 넘어서는 힘이 된다는 것이지. 무엇인든 쇳소리가 나도록 하라고 권한다. 손뼉을 쳐도 쇳소리가 나도록...쇳소리가 난다는 것은 금생려수 옥출곤강이라고 설명을 하는데 쇳소리가 핏소리가 된다는 것 피에 있는 철이 공명하게 되면 나오는 소리가 쇳소리이고 목소리에 쇳소리가 난다는 것은 피토할만큼의 간절한 소리라는 것이다. 겟세마네기도가 쇳소리가 나도록 고함을 질러낸 부르짖음이였다고 나는 해석을 하고 나도 그래서 부르짖음을 시전하고 소리에서 쇳소리가 나도록 훈련을 하는 것이고 이제는 소리에서 금빛같은 소리를 한다. 내가 토할 수 있는 소리에서 가장 높은 주파수를 발성할 때 그 소리를 황금종소리..금빛소리라고 하는 것이라고..그리고 그 소리를 발하면서 들어보면 내 스스로도 참 아름답고 좋구나 자화자찬하게 된다. 이렇게 소리를 갈고 딱아서 금빛으로 찬란한 소리를 매길 수 있도록 나를 기루었다는 것에서 내가 나를 존경하게 된다는 것이고.. 
 
생각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객관화를 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주관으로 시작된다. 길들여지는 것도 스스로 반복하는 것도 내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모든 것이 주관에 의하여 결정이 되고 실천이 되는 것이기에 책임은 나의 몫이고 내가 나의 주인이다고 한다. 주관이 있다는 것은 맞은 편에 객관이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주관에서 객관으로 위치를 옮기는 것을 생각을 멈춘다고 하는 것이다. 생각을 멈추면 어떤 상태가 생길까? 문자언어가 사라지면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상상해보라. 외청내정이라고 구령주에서는 설명한다.
 
주관과 객관, 음양..너와 나, 문자와 언어, 말과 글, 소리와 숨..이런 원리에 대입하면 말을 할 때는 주관이 작동하지만 손을 쓸 때 즉 글을 두드리거나 빛결의 경우 재봉질을 할 때는 객관이 된다. 말은 주관이다. 글은 객관이다. 주관을 객관화시키는 작업이 글작업이거나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기객관화라고 하는 작업은 손을 통해서 한다. 자기주관은 입을 통해서 한다. 그것만 기억하면 주관과 객관을 분별하기 쉽다. 입을 닫으면 그림자가 되고 입을 열면 빛이 된다.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자산인지는 말공부를 해봐야 알게 된다. 말공부를 하지 않고 하는 말이 만들어내는 것이 죄라고 하고 허물이라고 하고 카르마라고 하거나 업식이라고 한다. 말은 하기는 쉽지만 다시 담기는 정말 힘들다고 가르쳐 온 이유다. 쏱은 물을 다시 담지 못하듯이 내밭은 말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천수경에는 십악참회가 있는데 4개가 구업과 상관된다. 말에 허물이 없어야 의인이라고 했는데 말의 허물이라는 것은 말뜻도 모르고 하는 말이다.(2/18)

 

그래서 나는 항상 내가 하는 말의 뜻을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가?를 스스로 에게 묻는다. 안다고 착각을 하다가 어느날 그 착각을 알게 될 때..스피릿이라는 어원이 알코올 농도20인 증류주를 뜻한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처럼 ...세상에 내가 이렇게 어원도 모르고 스피릿을 쓰고 있었구나 하는 참회.   
 
착상란이라는 자리田에서 심장박동란으로 나가는 과정이 있고 수정란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지. 수정란으로 들어가는 길을 만들어 내는 소리가 들소리이고 심장박동란으로 길을 만들어가는 소리가 날소리라고 나는 설명을 하는 것이지. 그간 날소리를 통하여 들소리를 할 수 있는 힘을 기루었고 그 힘을 딛고 들소리를 훈련하게 되면서 마주하게 되는 정보들 
 
천문점성학이 천체물리학으로 진화되어서 별별이야기의 실체를 밝혀주고 있고 연금술이 화학으로 진화하여 무(원소)에서 유(현상)가 되는 원리들을 밝혀주고 있으며 국가탄생신화들이 생물학으로 진화하여 인체핵심발생학으로 이해를 돕고있다. 인류의 집단지성이 이끌어내고 있는 정보의 진화는 미신에서 확신으로의 여정이라고 본다. 
천체물리학이거나 화학이거나 생물학으로 천지인의 과학화가 이루어졌다. 물론 신화적인 스토리에 의지하여 자기만의 즐거움을 맛보는 종교언어가 있고 현장증거를 딛고 객관적인 증명을 하는 즐거움을 맛보는 과학언어가 있다. 어떤 스토리를 선택하는가는 선택하는 이의 몫이지만 신화와 과학이 음과 양으로 서로 비추임하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을 중용이라고 하고, 중맥을 만들어간다, 중도다, 중심이다 하나님의 뜻이다 고 , 자기확신이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라 본다. 무와 유라는 개념도 다시 들여다 본다. 무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가능성이다. 유는 해석되어 명맥한 증거가 제시된 그래서 다른 해석이 필요하지 않는 확정성이다. 영이란 가능성이고 육이란 명료성이다. 가능성을 사실성으로 만들어가는 것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나만의 해석을 한다. 너의 정보는 너가 가능성을 자기만의 사실성으로 만들어낸 것이듯이 나도 나의 가능성을 나의 사실성으로 확인검증하는 것을 '삶'이라고 하는 것이라고..삶은 굴러간다고 하는데 굴러간다의 한자표현이 윤회이고 공전이다. 인류의 정보도 신화에서 역사로, 역사에서 개인사로 뭉쳐치고 미신에서 과학으로 과학에서 개인의 체험, 관자재보살로 구르기를 한다는 것이다. 8자라는 것은 음과 양의 변화이자 신화와 개인사이자 미신과 확신이라는 대비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자언어라는 표현도구가 개인에게서는 음표가 되기도 하고 숫자가 되기도 하고..저마다의 표현도구로 바뀌기도 하는 것처럼 같은 알파벳을 놓고 단어를 놓고도 그 언어에 부여하는 뜻은 다양하게 쓰임이 되듯이 그래서 사전에서 한 단어를 놓고 다양한 쓰임을 제시하여주듯이..그렇게 쓰임이 다양해지는 낱말을 한낱말에 한뜻으로 고정관념하게 되면 다양한 현장에서 그 현장에 맞는 정보로 쓰임이 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삶의 현장에서 쓰임되는 언어는 같은 말이지만 쓰임이 달라지게 되면 같은 말을 쓰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된다. 언어학자가 다루는 언어와 의학도가 다루는 언어가 같은 알파벳으로 만들어진 낱말이지만 서로가 다른 해석을 하듯이 한자공부를 하다보면 '이름'인 독은 하나인데, 뜻을 전달하는 훈과 그림은 다름을 본다. 영이라는 글을 두드리고 한자변환을 해봐라. 영이라는 독음은 같은데 뉘앙스에 따르거나 문맥을 따라 어떤 뜻인가..는 가르쳐 주는 정보값은 다 다르고 뜻을 담아놓은 한자그림도 조금씩 다름을 알 수 있다. 문 이라는 한자를 공부할 때 일상적으로 쓰임되는 한자가 12자인데 문자를 한자변환해보면 73글자가 나온다. 그렇게 다양한 그림으로 그려져 쓰임되던 것이 한국에서는 일상에서 사용빈도가 잦은 12자를 앞에 놓고 빈도수가 낮은 순서로 이어지게  된다. 한자공부를 하다보면 야...이런 글자도 있었구나..하는 감탄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人과 시읏 ㅅ 과 그리고 쌍시읏이 丛(모두 총)으로 있고 ㅅ 은 亼(집)으로 있다는 것이다. 한글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표현하는 매개체이지만 한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그려놓은 것이구나 하게 된다는 것이지. 26자로 세상의 모든 정보를 전달하는 영어도 있고 24자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 헬라어도 있고 22자로 정보를 담아내는 히브리어도 있고 46자로 자기문화를 설명하는 일본어도 있고..그렇게 다양한 문자언어체계를 통하여 저마다 정보를 실어내는 메르카바를 삼는다는 것도 재밌는 현상이다. 외국어를 안다는 것은 새로운 탈 것으로 오래된 삶의 궤적을 본다는 것이다.  
 
문자언어의 쓰임은 '삶'을 담아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그것을 전달하여'앎'이 되게 하는 것이다. 문자언어가' 몸'의 외연화라고 이해한다면 문자언어를 벗어나라..고 하는 가르침을 실천하기위해서는 문자언어를 벗어나 대신할 수 있는 도구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지. 벗어났음을 확인하기위해서는 벗어난 자리를 증명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문자언어를 벗어난 자리 생각이 멈춘자리에서 소리와 움직임이라는 도구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한자는 훈과 독으로 이뤄져있다. 표의 문자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표음문자는 알파벳을 한 음으로 발성하고 그 음을 연결하여 낱말을 만들고 그 낱말의 뜻을 고정시킨다. 표의문자와 표음문자의 구조가 반대로 되어있다는 것이고 음양을 이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재밌다. 표음문자는 발성하는 뉘앙스가 중요하여 귀와 움직임을 보는 눈이 협업을 하는 것이지만 표의 문자는 그림이기때문에 안목이 중요하다. 관자재보살하는 대상은 그림, 색, 객관이 된다는 것이다. 조견오온개공도일체고액이라는 것은 표의문자인 한자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본다. 눈을 감으시오..라고 하는 가르침이 있는데 객관을 닫고 주관, 즉 숨과 움직임을 느끼라는 것이다. 색에 눈을 닫고 공에 귀와 손발을 열어라. 그것에서 생이 시작된다는 것인데 문자언어에서 벗어나 귀와 손발의 안테나를 열어서 소리를 듣고 지나가는 바람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보라는 것이된다. 지식에서 벗어나 자연의 풍광을 보고 들으라는 것,
 
표의문자를 대하면 자연에서 그 출발을 찾으라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자연을 사랑하라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공간이어서이기도 하지만 글자를 내어준 어머니의 품이어서이기도 하다. 글공부는 자연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소리공부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나는 설명을 하게 된다. 소리가 나는 것은 서로 닿기때문이니까 소리 音이라는 한자를 보면 曰立, 가라사대왈과 설립이다. 너와 나는 서로 소리를 오가게 함으로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듯, 자연에도 해가 오름하면 생기로움으로 활발발해진다는 것이다. 인류의 진화에서 이룩한 문명문화예술기술세계는 찬란하고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자연의 변화가 만드는 아름다움과 빛남이 대대하여 있기에 그러하다. 자연은 자본(인간)이 있어서 빛나고, 자본은 자연이 있어서 아름답다. 자연과 자본, 자연과 사람..의 관계는 서로 음양으로 있다는 것이다. 
 
내 앞에 와있는 정보는 문자그림으로, 즉 그림자, 影이고 내 눈과 귀에 닿거나 보이는 것은 너의 움직임과 말소리라는 실實이라고 나는 설명한다. 實은 집 宀과 毋(말 무)貝로 구성되고 뜻은 열매이고 이 한자의 이름은 '실'이다. 실을 펴면 시리Siri가 되는데 신묘장구에 보면 싸라싸라는 읊조림이 나오는데 지금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해석하려고 시도를 하는데 일상에서 숨처럼 밥처럼 피처럼 사용하는 언어로 풀어야만 일상이 진리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에서 나는 주문을 해석하고 있는데 원어발성은 싸라싸라SaraSara로 사라로 발성하든지 싸라로 발성하든지..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같은 에너지값이고 아브라함을 나는 브라만, 즉 불어내는 숨이라고 이해하고 있으니 사라사라 싸라싸라는 불어내는 숨에 안에있는 무엇인가를 실어서 내놓아라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똥오줌을 싸듯이 안에있는 것을 밖으로 내놓아라 吐하고 吐하라. 속의 것을 다 비워라는 것으로 空하라는 것 내 이야기로 33마디 뼈길을 뚫어서 공하게 하라 즉 바람이 통하게 하라는 것이라고..내가 예수라는 정보를 만나서 그간 해온 작업이 33마디통로뚫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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