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봄뜨락

여자의 남성성, 남자의 여성성

청향고은 2021. 6. 18. 12:44

남자는 답이 없다. 즉 노답이다. 답이 있을 수가 없는 존재가 남자다
반복하지만 남자는 전기력, 즉 빛을 정체성으로 하기때문에 답이라는 것을 산출하는 즉시 죽음이다. 빛이 빛이기를 포기하는 것이 답(틀, 형식)을 찾는 것이니까...답은 여자가 찾고 만드는 것이다.  
 
답은 자기력에서 생기는 것이다. 빛은 팽창하고 색은 수축한다. 수축하는 힘은 Fe, 즉 소금에서 생긴다. 물을 피로 만들어내는 것은 소금이다. 
 
빛은 원소기호 1번  H로 희다고 하고 색은 원소기호 26번  Fe로 피다고 한다.
너무나 단순하고 확실한 정리지 않은가? 남자가 남자를 모르는 것은 남자이기때문이고 여자가 여자를 모르는 것은 여자이기때문이다. 즉 자기를 객관화를 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다시 말하면 남자로서 여자가 되고 여자로서 남자가 되지 않으면 자기정체성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남자로서 여자가 되는 것은 남자의 정체성을 알기 위한 것이고 여자로서 남자가 되는 것은 여자의 정체성을 알기 위한 것이지 내가 나를 객관화 즉 빛, 전기력을 생성하는 것은 내가 색이기때문에 색을 알 수 없어서 알고싶어서다. 남자를 이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여자인 나의 실상을 이해하고 싶어서다    
 
남자는 여자가, 여자는 남자가 되어야 남자 수소의 정보를 알 수 있고 여자 철의 정보를 알 수 있다. 안에서 안을 알 수 없고 밖에서 밖을 알 수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 남자로서 여자가 되어야, 여자로서 남자가 되어야 양성동체, 하나님이 된다는 설명이 예수가 도마어록에서 한 것이다 
 
남자는 노빠꾸이고 그래서 좃도 且이고 여자는 돌아 돌아가는 구비구비길이고 그래서 봇은 谷이라고 한 것이지. 남자는 답을 추구하지 않고 여자는 답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 서로 소통되지 않는 이유. 남자는 우주로 나아가고 여자는 몸으로 귀속한다 남자는 몸에서 정자를 낳아서 빛으로 흩어지기에 빛의 속도로 우주로 팽창하고 여자는 몸에서 몸을 낳았으니까 피의 무게를 중력으로 대지로 귀환하는 것이라고   
 
그대가 여자인가? 남자인가? 남자는 9규이고 여자는 10규이다. 여자가 1규가 많은 것은 9를 포함하기위한 마당이어서이다. 그래서 자궁에서 아홉달을 자라서 태어난다. 여자의 수가 12규즘 되었다면 11달을 태안에 있을 수 있었을 것이고 13규가 되었으면 12달을 태안에 있을 수 있었을 것이지만 남자가 9규이고 여자는 10규여서 아홉달만에 태어나서 자궁안에서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부분을 사족류 동물들이 태어나면 바로 서고 뛰는 상황을 인간아기는 3년을 양육받아야 가능한 존재라는 것이지.

9달+36개월=45개월이다. 그래서 인간아기는 45개월을 자라야 타 동물과 같은 위치에서 성장을 시작하게 된다. 하도낙서의 45수가 나오는 이유다 인간아기는 45개월을 자라야 겨우 사족류의 출발점과 같아지고 그곳에서 생존전략을 구사하게 된다는 것이지. 내가 깨달아 가는 정보니까 내 창의적인 발상이니까 그대가 동의하거나 아니하거나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노답인 존재가 남자이고, 답을 추구하지 않는것은 의문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지  예스답인 존재가 여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의문이 있어서라는 것이지 원인에는 결과가 생기는 것이고 여자는 원인 섹스를 통해 결과 출산이 체험되는 존재임으로..남자는 정자를 발출하는 것이 결과인데 그 결과의 원인을 스스로 추구하여 알아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마도 생명의 근원에 대한 의문이 여자처럼 치열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 섹스의 결과가 남자에게는 발출하는 즐거움으로 인식되는 것이고 여자에게 섹스의 결과는 해산하는 고통으로 인식되기때문이다. 남자에게 섹스는 희극이고 여자에게 섹스는 비극이라는 것이지. 같은 섹스를 놓고 여자에게는 출산의 고통, 죽음을 체험하는 과정을 겪게 되기에 남자보다 여자의 의문이 팔만 4천배만큼 더 치열하고 지극하다는 것이지 
 
생명원리를 추구하는 그 의지는 남자보다 여자가 팔만4천배가 강하다는 것이다. 남자는 정자를 출산한다 정자는 빛으로 이뤄진 것이어서 팽창하는 것이다. 여자의 남자는 정자를 선택한 결과로 피흘림,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여자는 출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여자는 출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여자로서 남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원리를 남자들은 알지 못하기때문에 남자에게 구원을 기대하는 여자는 어리석다는 것이지 그러니 그대가 여자이고 아이를 낳았으면 이미 구원받은 것이니 다른 구원에 현혹되지 말라, 다른 구원은 없다.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 즉 출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예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 적그리스도다. 여자는 출산함으로 이미 부활을 했고 영생의 원리를 몸으로 깨달은 존재다. 그래서 나는 여자가 아기도 낳아보지 못한 남자들이 떠들어대는 거짓증거들에 귀를 잡히고 있는 것을 보면 심히 딱하고 안타깝다. 남자로서 여자가 되는 법을 찾아내지 못한 남자의 말은 다 거짓말이다. 자기가 체험하지 못한 것을 떠드는 것, 정자발출을 루시퍼의 타락이라고 하는 것을 아시는지..루시퍼 빛을 가져오는 자..빛으로 만들어진 정자..정자를 발출하는 행위라 루시퍼의 타락이라는 것이지..방향성없는 정자방출..그게 루시퍼의 반역이고 타락이다. 그대의 섹스에 대한 마주함이 없는 섹스살이가 타락살이라는 것이지. 남자여..그대의 정자의 비밀을 마주해보았는가? 정자를 마주해보지 않고 생명을 떠드는가? 
 
 오늘 손선생님과 대화를 하면서 남자에게 내가 의문하는 것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는 짓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 짓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논리적으로 이미 알고 있었고 나름대로 현장을 통해서 확인하면서 남자는 노답이라는 것을 개념으로 성립시키기위하여 현장검증을 했고 오늘 역시 반복되는 말..답은 없다는 것이고 그 말을 하리라는 것은 내가 충분히 예측을 했기때문에 내 정보를 남자에게 소통시키어보려한 의도를 이제 포기하였다. 손선생님과의 한달과정, 5월 18일에 시작하여 오늘 6월 18일 몇번의 대화였는지를 헤아려봐야겠지만 무엇인가 공감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대화를 이어갔는데 이 분의 정보를 주욱 검토해보니 답은 없으니 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는 것의 반복이다.  
 
결과가 있는 것은 원인이 있어서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과정이 있어서다. 몸이 답인데 그 몸이 형성되는 과정을 묻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경운가.. 나라는 몸이 존재하는데 그 몸의 형성과정을 의문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직무유기지 않을까나...그런데 내 관점이고 그게 궁금하지 않은 사람에게 궁금해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현장검증하기위하여 깃대들고 나섰다가 철수를 하기로 한 것이지 
 
해맞이 신단에서 금숙씨랑 같이하면서 내가 소통시켜보려한 정보가 여자의 머리는 외연의 남자가 아니라 스스로 머리를 창조하는 공부에 있다는 것이였는데 그것이 소통되지 않아서 에이고 공부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지 강조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구나..확인한 것이지만 봉무동 오가는 길에서 남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헤아려 볼려고 했는데 자신의 몸이 몸 되도록 한 과정, 즉 자궁의 세월은 마주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의 확인이다. 여자의 하부로 자기가 태어났다는 것을 마주하기 싫은 무의식이,  여자의 똥오줌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함이라고 하는데 남자든 여자든 생명을 똥오줌사이에서 생하고 소멸되는 것이지 않겠는가. 똥오줌사이에서 생하고 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을 키치현상이라고 하는데 인간사에서 똥오줌이야기만큼 섹스이야기를 금기시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는 것이지 들어간 구멍으로 태어나는 몸. 빛으로 들어갔다가 색으로 드러나는 몸. 이것을 변신이라고 하는 것인데 빛이 색이되었다가 색이 빛이 되었다가..빛이 색이 되는 죽음이라 하고 색이 빛이 되면 그것을 생명이라하고..반대로 설명하기도 하고.. 
 
나의 무모한 도전이지만 그래도 내가 도전하고 주장하고 내 논리를 펴보고 어디서 막히는지 확인하고 그리고 내 길을 다시 정하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나의 하루의 변화이고 새로움이고 아이같음이고 그런 것이겠지.
  
여자는 谷이다 구비구비 아흔 아홉고개를 돌아돌아 가는 이야기길이다 

다음

1 / 4

 

 

 

 

'금빛봄뜨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측백수림으로 다니다  (0) 2021.06.24
강 길에서 만나는 인연  (0) 2021.06.20
제 6의 계시 시대  (0) 2021.06.17
자기 십자가, 십자인대  (0) 2021.06.16
강 길에서  (0) 2021.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