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빛봄뜨락

긍정적이 되기위해서는 먼저 부정이 뭔지 알아야 한다

청향고은 2021. 6. 10. 14:45

그대가 긍정적인 사고를 하려면 문자에 대한 문해력과 언어에 대한 어휘력을 명확한 개념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아는가? 문자언어에 대한 자기점검없이는 긍정적이니 부정적이니 하는 현상에 대한 개념도 생길 수 없다.  
 
긍정이 뭐냐? Yes다. 부정이 뭐냐No다. 가장 쉽게 설명하게 되는 설명이다. 무엇인가에 대하여 그래 하는 것이 긍정이고 아니야 하는 것이 부정이다.  
 
긍정하기위해서는 부정이 선행되고 부정하기위해서는 긍정이 선행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면 그대는 긍정이나 부정을 말하면서 그대가 하는 말도 모르면서 하고 쓰는 글도 어원을 찾아보지 않고 길들여진대로 두드리는 것일뿐 문해력이 없다는 것이다 
 
어제 천재와 영재의 개념을 다시 정리하게 되었는데 영재英才는 태어나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고 천재天才는 영재가 열매로 드러나게 되었을 때라고 하더라. 태어난 모든 생명체들을 영재들이지만 꽃부리英을 쓰듯이 꽃을 피워서  씨알이 영근 열매로 추수할 수 있을지 아닐지는 자기의 생을 통하여 성취하게 될 때를 자아실현이라고 하거나 타인들의 공명을 받는 정보를 제공하게 되었을 때 천재로 가치평가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천재는 자기만의 유니크한 문해력이거나 독해력이거나 어휘력을 주장하였을 때 타인에게 공감공명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대가 생각하는 긍정은 어떤 것인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나는 떠오르는 둥근해를 긍정의 원형(O型)이라고 생각한다. 해의 주파수와 심장의 주파수가 같은 것을 인식하는 것이 긍정적이다. 단어에 的이 붙을 때, 긍정이라고 할 때는 객관정보를, 긍정적이라고 할 때는 주관정보가 되었을 때라고 설명하였다. 과녁 的을 쓰는 것은  활쏘기에서 과녁중심을 맞추었다는 것으로 내 몸의 활은 췌장의 이름이기도 하다. 즉 췌장에서 쏘아낸 화살이 과녁을 맞추었을 때를 긍정적이라고 ,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인식하거나 인지하게 된 정보다는 뜻이다. 외연에서 긍정의 힘이라고 설명하여 긍정적인 삶을 살라고 권면하는데 긍정에 적的하기위하여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긍정에 대한 개념이 없는데 긍정적이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니 외부에서 아무리 긍정적으로 살라고 해도 긍정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설명하지 않고서는 그 말은 거짓증언일 뿐이고 사깃꾼의 가스라이팅이다.  
 
긍정을 긍정'적'으로 하기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정직한 정보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대의 심장이 해와 주파수가 같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그것을 긍정적이라고 하게 되고 긍정의 힘이라고 하게 된다. 해오름을 보면 그대의 가슴이 심장이 웅비해지고 웅장해진다면 그것이 긍정적이 되는 것이고 긍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다른 긍정은 해가 비춰주는 삼라만상을 향유하는 것이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대의 눈이 보는 것들은 모두 긍정의 힘이 된다.  
 
해아래 드러나는 정보체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 아래 드러나있는데도 그대가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의 얼굴과 뒷모습이다  흙아래의 세계라고 하는 것 얼굴과 뒷모습 거울이 없으면 볼 수 없는 세계, 그래서 이 세계를 부정이라고 하고 달의 삭망이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 보름은 얼굴을 그믐은 뒷모습을 설명하는 기호라고 생각하면 그대의 얼굴과 뒷모습이 객관을 어떤 방법을 통하든지 마주하게 되는 것을 부정적이라고 하게 된다 거울이 필요한 것은 얼굴과 뒷모습을 보기위해서다   
 
부정은 무엇인가? 달의 삭망이다. 보름이 되었다가 그믐이 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부정의 원형이고 인체에서는 하부구조 생식기와 주파수가 같다고 본다. 남자의 좃세계도 일고 지고 여자의 봇세계도 물이차고 비워진다. 부정이라고 하는 세계는 인체의 하부 흙아래, 어둠속에서, 비밀로 일어나는 생의 의지 현상이기때문에 부정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肯은 止月로 구성되어 해가 뜨면 달의 삭망을 멈춤, 즉 해가 오름하면 달빛으로 부분적으로 드러나던 것이 환히 드러남이라는 것이고 不는 흙아래의 뿌리세계를 지시하는 것으로 해가 오름하더라도 흙아래의 세계는 드러나지 않음이다. 즉 해가 오름하여도 드러내지 못하는 세계는 흙아래의 세계라는 것이고 해아래의 세계를 긍정이라 하고 흙아래의 세계를 부정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개념 이게 나의 천재성이다. 
 
아침에 일어나 5시에 강 길을 나섰다. 오늘은 관음사쪽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강 가에서 만나는 여사님들과 반복되는 설명을 내 것으로 추려내는 과정도 필요하기때문이라고 나서는 길, 강 둑의 풀을 트림하였는지 풀내음이 스쳐지나가는데 풀내음새 야릇하기도 하고 싱그럽기도 하고 바로 베어낸 풀내음과 시간을 쌓은 풀내음의 차이. 관음사쪽으로 올라가면서 해돋이를 보고 사진을 찍어서 금숙씨와 복남씨에게 하루 긍정에너지로 보내고, 해오름사진을 보고 금숙씨가 너무나 아름다운 해오름 사진이라고 칭찬을 해주어서 카톡의 배경사진으로 바꾸고  가면서 살구나무가 보여서 다섯개를 따서 먹어면서 에구나 새그러워 하면서 내일도 이 길로 와서 살구 따먹어야지 오디나무까지는 가지 못하고 측백수림앞에서 유턴하여 봉무동으로 돌아오면서 한, 심여사님과 다른 한분도 만났는데 팔 돌리고 하고 스쳐지나게 되었다. 
 
강 길에서 만나는 인연에게 순설 설명하고 손뼉같이 치고 하는 일이 사실은 엄청나게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어서 내가 즐겁기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가끔은 에너지낭비를 줄이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걷는 시간이 늘어나더라도 혼자 걸을 수 있는 시간을 조절을 하는 것이겠구나 순설후를 가르쳐 주고 손뼉치기를 같이하고 소리지르기를 같이하면서 내 내공기루기라고 생각하고 나를 길들이는 것이지 너의 집중도를 내가 강제할 수 없으니까 내가 나를 길들이는 것이 가능하지 타인을 길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겠다.  
 
부정이라는 것, 내가 너를 뒤엎어서 흙속에 있는 뿌리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내 스스로가 물구나무 서듯이 너도 스스로 물구나무서려는 의지를 발동하도록 옆에서 부추키기, 부채질하기는 할 수 있지만 물구나무선다는 것, 부정을 부정적으로 마주한다는 것이다. 부정적이 되어야 긍정을 긍정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빛은 빛을 알 수 없다, 어둠은 어둠을 알 수 없다. 어둠속에 있는 뿌리를 엎어서 해아래 드러내어야 부정이 무엇이며 긍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현장이 생긴다.  그러니 그대여, 나여 두루뭉수리 추상적으로 얼렁뚱땅 현장도 없고 인체를 놓고 설명도 못하면서 문장으로 꾸며대면서 그것으로 자신을 속이지 말라. 남은 그대 글이 내 글이 살아있는 현장이 있고 체험된 땀과 눈물이 있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아챈다. 내가 모르고 너가 모르지만 타인의 무의식은 나의 무의식은 너의 말과 글과 몸짓의 정보를 알아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속이는 것은 자신일 뿐이지 남은 속이지 못한다. 남은 속은 척을 해줄 뿐이다. 내가 그러하듯이 상대방의 글이나 말에서 거짓을 밝히려면 귀찮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해서 얻을 것이 없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지. 그래서 제 꾀에 제가 속는 것이지. 그래서 내가 나를 속이는지 속고 있는지를 매일 털어振버림棄하는 것 
 
타인이 속는 척하는 것은 그것이 편하기때문이다. 그래서 충언을 하는 이가 곁에 있다면 그대의 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편한 진실을 말해주는 이가 있다는 것, 그런 인연은 드물디 드물다.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불편해서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지 그렇지만 그 불편함을 마주하는 것을 자기와의 만남이라고 하는 것이고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불편해하는 정보를 마주하는 것 
 
집으로 돌아오는 길. 황정자 여사님이 저만치서 인사를 했는데 나는 몇 걸음을 더 가차이해서 알아보았다. 이 분의 눈매가 얼마나 정다운 눈빛인지 그것을 말씀드렸다. 여사님의 눈빛이 얼마나 정다운지 여사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해진다고오늘도 금계국처럼 환하고 행복한 하루 경영하시라고 이 분을 만나면 나의 눈빛은 정다울까 아니면 어떻까 생각하게 되더라. 눈빛이 온유하다는 것 이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    

 

불편한 진실 
 
빛결과 요즘 같이 보는 것이 일당백이라는 코너인데 네 명의 진행자가 이끌어가는 코너로 일생동안 반드시 읽어야하는 백권의 책에 대한 것으로 너무나 재밌고 내가 읽고 이해하던 책들을 정박님과 정프로님 정미녀님 그리고 편집자님의 오가는 이야기들을 통하여 지적인 쾌락을 한껏누리고 있다. 정박님의 해박한 풀이에 정프로님의 현실적인 응용에 정미녀님의 솔찍한 의문과 관점, 그리고 가돈(?)님의 곁들임을 들으면서 내가 멈추고 있던 자리에서 워프, 즉 지적쾌락의 성감대가 급속도로 확장되는 느낌이 들어 행복하고 즐거움.  지적쾌락을 만드는 뇌의 성감대가 뉴런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키나비노이드, 마약효과지 않을까나 생각하게 된다  
 
섹스의 오르가슴을 만드는 인체의 효율성이나 지적 오르가슴이 만드는 정신의 자율성이 이중나선의 유전자코드를 풀어가는 원리가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되더라 뉴런의 내인성수용감각카나비노이드 마약효과가 섹스의 오르가슴이 만드는 느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 둘이 평행선처럼 나눠져있다면 이 두 선을 꼬아 유전자코드로 만들어내는 것을 나는 소리선이라고 설명하는 것이고, 지적쾌락과 육적쾌락을 꿰는 것을 가스펠,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라고..그대가 지적쾌락에 치우치든지 육적쾌락에 치우지면 결핍을 느끼게 된다. 이 둘을 서로 꿰어주는 힘을 찾아낼 때 그 힘을 통하여 지와 육을 서로 오가게 할 때 충만함과 행복함을 느끼게 되고 살아감의 의미를 알게 된다. 
 
이전에 내 글을 살펴주시던 분이 내 글이 약하다고 하시던데 그 뜻이 무엇인지 이제 알게 된다. 지적쾌락과 육적쾌락을 설명하는 문자언어가 소통되도록 해야하는데 나의 강박증이라는 것이 지의 언어와 육의 언어로 경계를 두어서 서로 오가도록 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고 말씀하신 것이구나 하는 것, 내가 육적쾌락에 대하여 종교적인 가스라이팅을 당해 결백증을 가지게 되어서 지적언어로 가져와 쓸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것이겠다. 머리의 언어와 생식기의 언어가 같은 것인데 하부언어를 상부언어로 쓰는 것에 대하여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종교가스라이팅의 습속이였구나 문자와 언어의 쓰임을 생각하면서 문자는 정직함이라면 언어는 뒷담화용이라고 하는 것, 문자는 식물성이라면 언어는 동물성이라는 것이고 동물성언어가 만들어내는 것이 느낌이라는 것, 삶이라는 것은 언어가 만들고 앎이라는 것은 문자가 만든다는 것이구나 
 
주변인들이 앎은 이제 그만하고 삶을 주목하라고 하는데 앎이라는 것이 문자를 딛고 만드는 창의적인 이야기인데 내가 추구하는 앎은 대부분이 관심이 없으니 너의 관심과 연결을 하려면 삶을 만드는 언어살이에서 앎의 언어를 삶의 언어로 변환을 해서 앎의 문자를 삶의 언어로 바꿔서 쓸 수 있는 그런 유연함을 길러야 겠구나 그런 면에서 정미녀님의 관점과 자세가 너무나 부럽더라는 것이지. 솔찍함, 여성성이라는 것이 하부구조를 언어화하는 능력이고 남성성이라는 것이 상부구조를 문자화하는 구조. 이 구조가 팽팽하게 평행성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꼬임이 될 때, 정박님, 정프로님 정미녀님의 鼎구조에서 생성되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재미나고 유익한지 나는 저렇게 자유로운 발상과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나 하게 되더라.  
 
그래서 요즘 정미녀님닮기라고 정박님과 정프로님의 세계는 내가 잘 아는 정보니까 신선하지 않다면 정미녀님의 정보를 대처하고 의문하고 자기의 견해를 내놓는 것에서는 정말 신선하구나 귀엽구나 사랑스럽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생기더라. 내가 결핍하고 있는 것이 여성성, 즉 하부구조에서 만드는 동물성언어 내가 과잉하고 있는 것이 상부구조에서 만드는 식물성언어 남자의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만드는 것이 식물성문자계라면 여자의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만드는 것이 동물성언어계라는 것이구나 내가 갈고 딱아야 하는 새로운 세계가 언어계라는 것이다. 여태 내가 풀어헤치고 온 것이 문자계였던 것이고 그래서 오늘 관음사쪽으로 올라가면서 여자끼리 나누는 언어와 여자와 남자가 나누는 언어가 어떻게 수위조절이 되어야 서로 불편함이 없이 소통이 될 것인가 정자와 난자라는 언어를 선택함으로 남자와 여자라는 계를 넘어서서 감정을 배제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언어를 어떻게 다듬어서 쓸 것인가를 생각한다는 것      
 
일당백에서는 작품을 쓴 저자의 스토리도 이름부터 좌악 풀어주시는데 정프로님이나 정박님의 관점이 언어에 주목을 하시고 이름의 원뜻을 풀어주시면서 저자의 일생을 엮어 내시는 것을 보면서 나에게 베풀어주는 만찬처럼 지적쾌락을 음미하는 오르가슴에 충일하다. 예전에 지몽선생님이랑 대화를 할 때 나와의 대화에서 오르가슴을 말씀하시던데 지적쾌락을 설명하신 것이였을 것이고, 성적인 언어를 지적인 언어로 씀하는 자유로움을 당시 이해를 못하던 나도 이제 이제 알아채게 되는 것이고 일당백을 들으면서 지적과 성적인 정보가 거리낌없이 오가는 것에서 유쾌 통쾌 상쾌 명쾌..함을 누리게 되고 같이 웃게 되고..내 글을 보시고 글이 약하다..고 하시던 무달선생님도 내 글에서 느껴지는 어떤 강박관념을 느끼셨던 것이겠구나 싶어서 바로 톡을 보냈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확인하려고..가슴에 품은 단풍한잎 치열한 공방전을 하면서도 사이 사이 나에게 띄운 아름다운 시들, 감정이 상하면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내 성정에 당시 성질나서 다 삭제해버렸지만 이 시인의 언어와 마음이 얼마나 따듯하고 다정하며 아름다왔는지 이제 알게 되는데 늘 그러하듯이 그렇게 아름다운 언어들을 나는 버리고 나서 아...하구나 강팍한 내 언어들에서 물기가 없다는 것, 화기가 너무나 강하여 스스로를 재로 하얗게 태워버리는 내 성질을 염려해주던..그래서 그런지 세월이 지나도 어제처럼 내가 궁금하면 툭 하고 소식을 보내면 제삿날 제사 돌아오듯이 소식을 띄운다고 하면서도 정다운 답을 보내준다는 것이 나에게 감사하지. 글벗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하고..鼎(솥 정)을 카톡프로필로 쓰는 이유도 이제 알 듯하다. 솥이 적다고 소쩍새라고 한다는데 내 솥이 적어서 좀 헤퍼지라고 권하였을 때 헤퍼지라는 것이 그릇을 품새를 넓히라는 뜻이였구나..글꾼과 글쟁이가 만나 펜을 무기로 삼아 서로 치열하게 찔러대던 과정을 통하여 나도 많이 성장한 것이고 이제는 경계심없이 온유한 눈으로 마주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일당백의 스토리를 들어보면 작가들의 신상을 먼저 털어내는데  털어보면 대부분 3번 정도의 결혼과 이혼은 기본스킬이고 어린시절부터 불우한 환경에서 열악한 감정공간을 체험하면서 자기의 얼굴과 뒷모습을 마주하려고 한 의지가 글쓰기에 투사되어 후대의 지적재산이 되고 집단지성을 이루게 되는 정보가 된 것이라고 한다 . 인류공동의 자산이 되도록 시대를 살아가면서 앎과 삶을 치열하게 마주하려고 했던 이들은 하나같이 불우하고 어려운 고통스러운 세월을 통하여 작품을 출산한 것이겠다 
 
천재들이란 집단지성을 이루게 되는 정보를 남겨서 후대로 내림하는 이들이다는 것이지. 그것을 카발랴세피로드라고 하는데 집단지성의 정보를 개인이 하나씩 음미하는 것이 지적쾌락이 된다는 것이고 그 마당을 펼쳐주는 것이 일당백같은 코너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빛결과 대화를 하다가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와서 아버지가 문학적인 역량이 있었다면 아버지의 삶의 궤적을 딛고 집단지성을 이루는 정보를 덧셈할 수 있었을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학적인 역량이 있지만 삶의 체험현장이 너무나 단순하여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맥락이 없다는 것이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겠다. 어린 시절의 꿈이 노밸문학상을 받는 소설가가 되자..였다. 그런데 어느날 소설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되면서 나같이 게으럼쟁이가 소설을 쓴다는 것은 재능밖이다..생각했고 소설을 만들지 못하지만 문학적인 재능은 있으니 추구한 것이 문자에 담긴 뜻을 풀어헤쳐 내는 글을 쓰게 된 것이겠다. 무달선생님도 시나 글을 쓰려면 이성에 대한 몰입이 만드는 마약이 생성되어야 작품이 나온다고 하시더만..나도 이제 뉴런이 만들어내는 카나비노이드가 나와야 문학작품을 하나 만들 수 있으려나 꿈을 꾸어 볼까나 문자를 벗어나 언어에 입문하는 것, 상부뉴런과 하부뉴욕을 소통시키는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