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향선菊香腺

달구벌, 푸른 언덕 신들의 놀이터

청향고은 2021. 4. 14. 05:53

탯줄은 외부로부터 잘림이지만
그래서 외부에서 연결하여야한다
외부주입이다 
 
신줄은 태어나기위하여
스스로 접는 선택을 한 것이기에
접음을 폄하는 것도 스스로 선택이다 
 
내면이라고 하는 실체가 자발적으로 접은 신줄
외연이라고 하는 실체가 타발적으로 잘린 탯줄 
 
채희석님의 천문 일식과 개기일식을 놓고
풀어가는 역사이야기가 너무나 재밌다 
 
내가 배웠던 역사지식들이 다 비움이 되는
그래서 새롭게 역사를 파보자는 의지
부도지를 다시 든다

 

아기Baby의 고어가 나기Birth라고 한다
새내기라는 말이 신생아의 우리말
나기는 생아로 낳기다 
 
생일을 버스데이 Birthday라고 하는데
우리말이다. 태를 벗었데이, 해탈 解脫이다
그대와 나는 이미 해탈했다
구원도 완료했다
태에서 벗어났고
태라는 곳에서 태밖으로 구원되었다
해탈 성불 구원 완전하심..을 다 이루었는데
왜 그 언어들을 부리고 있는가?
즉 완료된 과정을 알지 못하고 이룸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부활이고 사구게를 전하는 것이고
전도이고 선교이고..이런 언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대를 증명할 객관적인 인증서를 갖추고자 함의 의지다  
 
오래된 미래가 신화로 앞에 있다
감추어진 세계인 申을 보이는 세계示의 이야기로 꾸며
전해주는 것이 신화다.
申의 갑골문은 여자의 생식기臼에 남자의 성기 丨을 더한
기호라고 한다. 은밀하게 행하는 야다를 통해
눈 앞에 드러나는 것이 나기(아기)다 즉 神은 아기낳기다 
 
신화에서 자웅동체라고 하는데 자雌인 난자와  웅雄인 정자가
동체가 되는 경우는 수정란일 때이다.
그대나 나는 자웅동체라는 날(日, 알)을 통하여
몸이라는 달(月,살)을 창조하여 해달明(배달)로 태어난다
몸이 明이고 해달, 배달이라는 이름을 가진다
머리는 日, 몸은 月. 그래서 일월 해달 햇님달님 
 
일상이 역사가 되고 역사가 신화가 된다
일상은 너무나 밀접해 보이지 않고
역사는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하여 왜곡되지만
신화는 생명의 흐름이기때문에 오래된 미래로
그대와 내 앞에서 마주오고 있다 
 
바람의 제우스
구름의 하데스
비의 포세이돈
자연의 의인화가 신화이고
자연을 대대하여 관계를 맺어가는 이야기가 동화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신화다 
  
 
떠나가는 배

박 용 철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최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쫒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간다
 
 
 
 
고향                                                      
 
 
고향은 찾어 무얼 하리
일가 흩어지고 집 흐너진 데
저녁 까마귀 가을 풀에 울고
마을 앞 시내로 옛 자리 바뀌었을라. 
 
어린 때 꿈을 엄마 무덤 위에
남겨두고 떠도는 구름 따라
멈추는 듯 불려온 지 여남은 해
고향은 이제 찾어 무얼 하리. 
 
하늘가에 새 기쁨을 그리어보랴
남겨둔 무엇일래 못 잊히우랴
모진 바람아 마음껏 불어쳐라
흩어진 꽃잎 쉬임 어디 찾는다냐. 
 
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생 각
-아득한 꿈엔 달려가는 길이언만-
서로의 굳은 뜻을 남께 앗긴
옛 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여라.
 

 

詩的 變容에 대하여 
 
                                              박 용 철朴 龍 喆(1904~1938) 
 
                                                                              시인. 아호 龍兒                                                                                                          전남 光山 출생 
 
                           일본 東京 外國語學校 독문과를 거쳐 연희전문에서 修學(1923) 
 
 
 
핏속에서 자라난 파란꽃, 흰꽃, 혹시는 험하게 생긴 독이毒栮. 이것들은 저희가 자라난 흙과 하늘과 기후를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어디 그럴 필요가 있으랴. 그러나 이 貞淑한 따님들을 그저 벙어리로 알아서는 안 된다. 사랑에 취해 홀려 듣는 사람의 귀에 저희는 저의 온갖 비밀을 쏟기도 한다. 저희는 다만 지껄이지 않고 까불대지 않을 뿐, 피보다 더욱 붉게 눈보다 더욱 희게 피어나는 한 송이 꽃. 
 
 
우리의 모든 체험은 피 가운데로 溶解한다. 피 가운데로 피 가운데로. 한 낱 감각과 한 가지 구경과, 구름같이 피어올랐던 생각과, 한 근육의 움직임과, 읽은 시 한 줄, 지나간 激情이 피 가운데 알아보기 어려운 용해된 기록을 남긴다. 지극히 예민한 感性이 있다면 옛날의 전설같이 우리의 맥을 짚어봄으로 우리의 呼吸을 들을 뿐으로 얼마나 길고 가는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랴. 
 
 
흙 속에서 어찌 풀이 나고, 꽃이 자라며, 버섯이 생기고, 무슨 솜씨가 핏속에서 시를 시의 꽃을 피어나게 하느뇨? 變種을 만들어 내는 園藝家, 하느님의 다음 가는 創造者. 그는 실로 교묘하게 배합하느니라. 그러나 몇 곱절이나 더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것이랴! 
 
巧妙한 配合, 考案, 技術. 그러나 그 위에 다시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되는 變種 발생의 찬스. 
 
문학에 뜻 두는 사람에게 “너는 먼저 쓴다는 것이 네 心靈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는 일인가를 살펴보라. 그리고 밤과 밤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네 스스로 물어보라. 그 글을 쓰지 않으면 너는 죽을 수밖에 없는가.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죽어도 못 배길 그런 內心의 요구가 있다면 그때 너는 네 생애를 이 必然性에 의해서 건설하라.”고 이런 무시무시한 권고를 한 독일의 詩人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브릭게의 手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全生涯를 두고 될 수 있으면 긴 생애를 두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意味와 甘味를 모으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러면 아마 최후에 겨우 열 줄의 좋은 시를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詩는 보통 생각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애정이 아닌 것이다. 시는 체험인 것이다. 한 가지 시를 쓰는 데도 사람은 여러 都市와 사람들과 물건들을 봐야 하고, 짐승들과 새의 날아감과 아침을 향해 피어날 때의 작은 꽃의 몸가짐을 알아야 한다. 모르는 지방의 길, 뜻하지 않았던 만남, 오래 전부터 생각던 이별, 이러한 것들과 지금도 분명치 않은 어린 시절로 마음 가운데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않다. 여러 밤의 사람의 기억(하나가 하나와 서로 다른), 陣痛하는 여자의 부르짖음과 아이를 낳고 해쓱하게 잠든 여자의 기억을 가져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의 곁에도 있어 봐야 하고, 때때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방에서 창을 열어 놓고 죽은 시체를 지켜도 봐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을 가짐으로 넉넉지 않다. 기억이 이미 많아진 때 기억을 잊어버릴 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말할 수 없는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記憶만으로는 시가 아닌 것이다. 다만 그것들이 우리 속에 피가 되고 눈짓과 몸가짐이 되고 우리 자신과 구별할 수없는 이름 없는 것이 된 다음이라야, 그때에라야 우연히 가장 귀한 시간에 시의 첫 말이 그 한가운데서 생겨나고 그로부터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열 줄의 좋은 시를 다만 기다리고 일생을 보낸다면 한 줄의 좋은 시도 쓰지 못하리라. 다만 하나의 큰 꽃만을 바라고 일생을 바치면 아무런 꽃도 못 가지리라. 최후의 한 송이 극히 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하여는 그보다 작을지라도 덜 고울지라도 數多히 꽃을 피우며 一生을 지내야 한다. 마치 그것이 최후의, 최대의 것인 것 같이 최대의 情熱을 다하여. 주먹을 펴면 꽃이 한 송이 나오고, 한참 心血을 모아 가지고 있다가 또한번 펴면 또 한 송이 꽃이 나오고 하는 이러한 奇術師와 같이. 
 
나는 書道를 까맣게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 서도를 예로 들어 이야기할 욕망을 느낀다. 서도의 대예술가가 그 일생의 절정에 섰을 때에 한번 붓을 들어서 한 글자를 이루었다고 하자. 怪石같이 뭉치고 범같이 쭈그린 이 한 자. 최고의 知性과 雄志를 품었던 한 생애의 전 체험이, 한 人格이 온통 거기에 不滅化하였다. 이것이 주는 눈짓과 부르는 손짓과 소곤거리는 말을 나는 모른다. 나는 그것이 그러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유추할 뿐이다. 이 무슨 불행일 것이냐. 
 
어떻게 하면 한 생애가 한 정신이 붓대를 타고 가는 털을 타고 먹으로서 종이 위에 나타나 웃고 손짓하고 소곤거릴 수 있느냐. 어쩌면 한참 만에 손을 펼 때마다 한 송이 꽃이 나오는 奇術에 다다를 수 있느냐? 
 
우리가 처음에는 先人들의 그 부러운 奇術을 보고 서투른 자기 暗示를 하고 念願을 외우고 땀을 흘리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이다. 그저 빈주먹을. 그러는 중에 어쩌다가 자기암시가 성공이 되는 때가 있다. 비로소 주먹 속에 드는 조그만 꽃 하나. 염화시중의 미소요, 以心傳心의 秘法이다. 
 
이래서 손을 펼 때마다 꽃이 나오는 확실한 경지에 다다르려면 무한한 고난과 수련의 길을 밟아야 한다. 그러나 그가 한번 밤에 흙을 씻고 꾸며 놓은 무대 위에 흥행하는 奇術師로 올라설 때에 그의 손에서는 다만 假花 조각이 펄펄 날릴 뿐이다. 그가 뿌리를 땅에 박고 曠野에 서서 大氣를 호흡하는 나무로 서 있을 때만 그의 가지에서는 生命의 꽃이 핀다. 
 
詩人은 진실로 우리 가운데서 자라난 한 포기 나무다. 청명한 하늘과 적당한 온도 아래서 무성한 나무로 자라나고 長霖과 曇天 아래서는 험상궂은 버섯으로 자라날 수 있는 기이한 식물이다. 그는 지질학자도 아니요, 기상대원일 수도 없으나 그는 가장 강렬한 생명에의 의지를 가지고 빨아올리고 받아 들이고 한다. 기쁜 태양을 향해 손을 뻗치고 험한 바람에 몸을 움츠린다. 그는 다만 기록하는 이상으로 그 기후를 생활한다. 꽃과 같이 자연스러운 詩, 꾀꼬리같이 흘러나오는 노래, 이것은 도달할 길 없는 彼岸을 理想化한 말일 뿐이다. 비상한 苦心과 노력이 아니고는 그 생활의 精을 모아 표현의 꽃을 피게 하지 못하는 비극을 가진 식물이다. 
 
  (後略) 
 
            1938년「三千里文學」에 수록 
 
절망                                                    

나는 이제 절망의 흙속에
파묻혀 엎드린 한 개의 씨
아! 한없는 어둠……
과 고요…… 
 
그러나 그러나
천 천 이 천 천 이
나는 고개를 든다. 
 
천천이 천천이
그러나 힘있게 우으로
나는 머리를 밀어 올린다……
나는 숨을 쉬었다. 지구를 나는 뚫었다-
나는 팔을 뻗힌다-
나는 다리를 뻗힌다- 
 
아! 나는 아침해 비친 언덕 우에
두팔 쳐들어 왼몸 훨씬 펴고 서 있는
오! 서 있는 사람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