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서

여인의 몸을 통하지 않은 자, 도마서 14~18장

청향고은 2019. 2. 8. 17:12


14장.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너희가 만일 금식한다면 너희는 자기자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되고 기도를 함으로 심판을 초래하게 되며 또한 남을 구제함으로 자기 영혼을 속이게 된다. 너희가 장차 어느 나라 어느 마을에든 들어가 사람들이 너희를 대접할 때 너희 앞에 놓인 것을 먹고 그들 가운데 있는 병자를 돌 보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희를 더럽히지는 않는다. 다만 입에서 나오는 그것 너희를 더럽게 하느니라."

Jesus said to them , " If you fast , you will bring sin upon yourselves. and if you pray , you will be condemned. and if you give to charity. you will harm your spirits.
When you go into any region and walk about in the countryside, when people take you in. eat what they serve you and heal the sick among them.
After all, what goes into you mouth will not defile you; rather, it's what comes out of your mouth that will defile you."


종교살이를 하면서 버릇처럼 하던 금식에서 열흘금식을 끝으로 종교에서 나오고 그 이후 나는 금식은 하지 않는다. 무지함이 만든 자기의를 너에게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방법이 그런 고행(?)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무지함으로 금식하던 세월에 몸이 겪었을 응력(스트레스,)과 화해하는데 많은 세월이 걸렸다. 하루 굶음이 당겨들인 스트레스지수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라 하신 분이 금식을 원하셨을 리가 없는데도 종교 안에 있을 때에는 애고별리 愛別離苦를 죽인답시고...몸을 죽이는 일을 했다. 애별리고의 준말이 애고Ego


Ego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도 개념도 토대도 모르면서 굶으면 기력이 약해지는 경험을 하는 것을 Ego가 죽는 것이라 ...봤던지..밥을 먹으면 다시 회복되는 것처럼 Ego도 살아났으리니..기도, 구제 또한 종교안에서는 너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 결론이고 보면 금식이나 같은 응력을 당겨들였을 것이다. 너의 금식, 구제, 기도가 알려지는 것은 자기가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타인이 알게 되겠는가..자기영혼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너에게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였을 것이고..하여 예수는 그런 의지가 담긴 그러한 행위는 자신에게 허물을 만드는 일이라 하시는 것이다. 


종교안에서 에고를 죽이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겪는 요요현상이고 죽을 때까지 반복하는 현상이리라. 자기 구원의 확신을 하지 못하는 두려움속에서 숨이 멎는 것.  죄라고는 짓고 싶으나 몸으로서는 죄만큼은 지을 수 없는 구도인데 책임지기 불가능한 몸에게 죄를 물었다는 말이니...몸을 지배하고 행동하게 명령하는 것은 생각과 말이다. 죄를 물으려면 생각이나 말에 물었어야지...몸이 짓는 유일한 죄는 내가 보기에는 변비다.

 

몸은 입에서 아랫구멍까지 자연적으로 길을 열어가면서 비우고 채우는 참과 빔을 반복하는 시스템인데  막힘이 생긴 것이니..이것도 몸이 짓는 죄가 아니라 생각과 말이 만든 스트레스(凝力엉길 凝)가 변비로 나타기에 변비를 뚫으려면...출산의 고통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듯 변비를 보면서 생각이나 말이 제대로 흐르지 않구나 인식하여 말과 생각변비 그것을 뚫어 내어야한다. 변비의 원인은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는 말과 생각에서 생긴다. 말과 생각에서 생기는 막힘을 뚫어내는 것이 복음이고 진리다.  


밥을 굶으면 식탐이라는 반작용이 생기고 기도를 하면 기도 하지 않는 너보다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자기의가 그림자처럼 생기고 구제를 하면 너의 인격까지도 구제한 듯한 착각을 하게되는 생각과 말에  변비 현상이 생긴다. 답답함이 생기고 뭔가 짜증이 생기고..하는 증상이 나타나면 반드시 돌아봐야 하는 것이 기도함이 너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지나 않았나 구제함을 인정받으려 하는 의지가 있지 않았나...분석해 봐야 한다. 내가 한 것을 너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것이 두려움이고 불안이고 불평과 불만이 된다. 예수는 금식 기도 구제가 남과 나를 비교하여 나를 낫게 여기려는 잣대가 된다면 하지 말아서 스스로 죄를 짓지 말라고 기도는 골방, 구제는 왼손이 모르도록 이라는 변비가 걸리지 않는 처방을 하신 것일 터
은밀한 비밀을 찾아 풀기위해서 역시 은밀한 방법으로 접근하라는 것이다.


무언가 하였는데 그 함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 살아있는 자의 인식이고 차원상승을 하는 자의 길이다. 내가 한 것...에 머문다면 그 함에 대한 보답을 요구하게 된다. 늘 깨어서 성찰해야하는 부분이다.  도마서는 내가 만난 예수를 내가 기록하는 나의 것이다. 너가 도마서를 만나면 너의 예수가 나올 곳이고 나와 같은 예수일수도 다른 예수일수도 있다. 저마다 처한 환경과 문화가 다르기에..그러나 한가지 공통되는 것은 너의 틀에서 벗어나 자기의 세계를 일궈가는 자유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도마서를 마주하고 자유을 누리지 못한다면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고...

 15장.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너희는 여인의 몸을 통해 나지 않은 자를 보거든 엎드려 그를 경배하고 찬양하라 그는 너희의 아버지니라."
Jesus said, " When you see one who was not born of woman. prostrate yourselves on your faces and worship him. He is your father.

열정 熱情에 빠지는 것이 우상숭배라고 한다. 무엇엔가 몰입하는 것을 열정passion이라 한다. 무엇엔가 몰입하게 되는가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을 compassion이라고 한다고 내가 이해하는데 여인의 몸을 통해 나는 자는 열정passion이고 여인을 통해 나지 않은 자는 compassion이다. 여인을 통해 나는 자는 몸(Body)이고 여인을 통해 나지 않는 자는 문자(Logion, 명구 금언 그리스도의 어록)다. 예수는 여인의 몸을 통하여 난 자이지만 그의 로기온은 소피아, 즉 지혜에서 태어난 것이다.    

감정이라는 개념은 열정이라는 체험으로 나타나고 이성이라는 개념은 자비라는 체험으로 나타난다. 열정은 땀과 눈물이라는 몸씀으로 경험되고 자비는 로기온 말글씀으로 경험된다. 열정은 누구나 선택하지 않아도 열려진 삶의 길이다. 이성은 선택하는 자에게만 열리는 앎의 길이다. 열정은 30%, 그 30%를 건넌 자에게 70% 이성의 길이 이어진다. 거개가 30%안에서 맴돌지만 30%의 한계에 부딪힌 경우 그 한계를 넘으려 하게 된다.

 

열정으로서는 자비를 품을 수 없다. 여인의 몸은 열정을 상징하고 너희 아버지는 자비를 뜻한다. 자비는 냉철한 이성에서 나오는 앎이다. 열정에서 이성이 나오는 법은 없지만 자비를 알기위해서는 열정을 알아야 한다. 열정이라는 마당을 지나지 않는 자...이성의 문을 두드릴 수 없다. 지식을 터로 하지 않으면서 지혜를 잡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도마서를 다루면서 감정영역으로 나타난 글 줄이 있으면 다시 다듬는 방법으로 글을 퇴고한다. 감정이 들어있는 글은 재밌고 공명하기 쉽지만 재밌는 만큼 로기온이 전달하려는 날선 새로움이 없고 공명하는 만큼 만족함에 머물기때문에 성장하지 못한다. 글이 재밌다거나 공명이 된다는 것은 이미 그 글을 쓴 이의 이성레벨을 같이하거나 넘어서 있기때문이다. 어려운 글을 잡고 그것을 소화함으로 내 이성이 성장한다는 것.


어려운 글을 만나면 그 어려움에 도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긴다. 의 意는 열정영역을 도전하는 힘이지만 志는 이성영역을 파들어가는 힘이다. 立日心은 모든 이가 가진 평등함이다. 해 아래 모두 평동한 미음. 士心은 선비 士 마음 心로 선비는 彦(언)거나 儒(유)로 보충개념으로 설명한다. 彦(언)은 六과 바위 엄 그리고 빗살무늬로 이뤄진 기호다. 바위에 새김된 무엇을 정복하려는 자, 儒(유)는 人雨而로 기우제를 지내는 제관을 의미한다. 彦은 열정, 儒는 이성을 대입해보면 이해가 쉽겠다.

 

죄 罪는 열정에 과부하가 걸려 넘치거나 모지라 결핍된 상태다. 30%의 영역인 애오욕에서 넘치면 무거움 답답함 두려움이, 결핍이면 불안과 불만과 불평이 생긴다. 평정심이란 저울에 기울기가 생기면 몸이 보내는 신호다.


마음이 무겁다는 느낌은 물욕의 무게에서, 답답함은 성애의 불균형이, 두려움은 앎의 무지함 誤이 만드는 것이다. 열정의 결핍을 열등감이라고 이 느낌들을 죄책감. 죄의식이라 는 개념으로 묶는데 어느 부분에서 어떤 느낌이 일어나는지 마주할 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너를 보면 무엇에서 답답함을 , 두려움을, 무거움을 느끼는가...불만을 불안을 불평이 생기는가...이것이 면전에 있는 일이다. 다름을 같게 하려하는 것이 무거움이나 답답함을 낳지만 다름을 다름 그대로  감사할 때 가볍고 시원한 느낌이 생긴다. 아주 소소한 것에서 불기가 화악. 붙을 때 그 때 바로 진압하는 게 냉철내공을 쌓은 크기다.


여인의 몸을 통해 나지 않은 자는 냉철. 이성이다. 열정에 빠지지마라(머물지마라) 그것이 우상숭배니라..이것을 이해한 하루. 음악을 틀어놓고 같이 불러가면서 생기는 파동함수... 가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비가 오신다. 6월 아지사이가 풍성하게 피라고..


16장.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 사람들은 아마도 내가 세상에 평화를 전파하러 왔다고만 생각하고 내가 분열과 불과 칼과 전쟁을 던지려 왔다는 것을 모른다. 한 집안에 다섯이 있다면, 둘이 셋을 대적하고 셋이 둘을 대적할 것이며, 아비가 아들을 그리고 아들이 아비를 대적함으로 각기 단독자로 서리라."
Jesus said, "Perhaps people think that I have come to casy peace upon the world. They do net know that I have come cast conflicts upon the earth: fire, sword,war.
For there will be five in a house : there'll be three against two and two against three, father against son and son against father,  and they will stand alone.

旅行 lǚxíng과 觀光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旅는 1. 나그네
2. 군대(軍隊)
3. 군대(軍隊) 편제(編制) 단위(單位)
4. 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군중(群衆)
5. 자제(子弟)
6. 척추(脊椎), 등뼈
7. 길, 도로(道路)
8. 괘(卦)의 이름
9. 땅의 이름
10. 제사(祭祀) 이름
11. 함께, 다같이
12. 객지살이하다(客地----)
13. 여행하다
14. (산신에게)제사(祭祀) 지내다
15. 자생하다
16. 벌여놓다, 진열하다(陳列--)

旅(려)의 고자(古字)인 (㫃 + 从)에서 군기(㫃)를 앞세운 병사들(从)의 집단(集團)을 나타내어 군대(軍隊)는 이동(移動)하기 때문에'여행'을 뜻함이라는 설명이 나오는데 从이 氏로 변형된 것이리라 본다. 일본어 에서는 人이 히라가나로는 い,가타카나로는 イ로 표기된다. 旅의 지금 개념은 자신이 소속한 군기 즉 성씨를 뜻한다. 성씨가 대물림되는 것이 여행이다. 여행은 경험의 실체지만 관광은 다른 지방(地方)이나 나라의 명승(名勝)ㆍ고적(古蹟)과 풍속(風俗) 등(等)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것

관 觀.1. 보다 2. 보이게 하다 3. 보게 하다 4. 나타내다 5. 점치다(占--) 6. 모양 7. 용모(容貌) 8. 생각 9. 누각(樓閣: 문과 벽이 없이 다락처럼 높이 지은 집) 10. 황새 11. 괘(卦)의 이름

광光 1. 빛, 어둠을 물리치는 빛 2. 세월(歲月) 3. 기세(氣勢), 세력(勢力), 기운(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오관(五官)으로 느껴지는 현상) 4. 경치(景致), 풍경(風景) 5. 명예(名譽), 영예(榮譽) 6. 문화(文化),..
여행자와 관광객은 차원이 다르다. 여행자는 자신의 뿌리를 찾는 길을 가지만 관광객은 남들이 만든 문명과 문화의 열매들을 즐기려는 길을 간다. 예수의 16장 말씀을 두고 앞에 여행과 관광을 서술한 것은 예수에 대하여 대부분 관광길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여행길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 셋이 둘과, 둘이 셋과 싸움하는 것. 意는 立日心 셋이고, 志는 士心 둘이다. 15장에서 설명한 열정과 냉정은 불과 물의 극과 극의 상황이다는 뜻이다. 불의 극에 물이 생기고 물의 극에 불이 나온다. 예수는 수화상극과 생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어에서 生도 行도 い다. 사는 것과 행하는 것이 같다는 뜻. 몸은 動詞로 이뤄지지 명사는 허구다. 동사는 살아있음이요 명사는 살다가 사라진 것의 흔적이다. 흔적을 딛고 동사를 복원하는 것이 이성이다. 죽은 것을 살려내는 부활의 현장은 명사를 동사화시키는 경험외에는 없다. 가믈가믈하다는 뜻을 그린 기호가 玄, 즉 흔적을 말한다. 살아움직이던 것이 남겨 둔 흔적...그것을 관찰하여 보고 그려낸 것이 한자다. 한자는 사냥꾼의 의하여 만들어졌으리라....는 추론을 하는데 그래서 문자를 그려내기 시작한 이의 이름을 蒼頡 , changjie이라 하는 지도 모르겠다.
 
전설에 따르면, 한자는 창힐이라는 신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천계에서 지상으로 내려와서 새와 동물들이 남긴 발자국에 착안해 문자를 고안해냈다는 것이다. 창힐은 일반적으로 네 개의 눈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는 아주 예리한 눈빛으로 사물을 관찰해서 순식간에 그 특징을 파악, 도형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용안(龍顔)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창힐은 황제(黃帝)의 가신(家臣)이었다고 한다. 그가 문자를 완성하자 하늘에서는 오곡(五穀)이 떨어졌지만, 귀신은 울부짖고 용은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었다고 한다. 즉, 천계에서는 그의 업적을 칭송하고, 귀신과 용은 두려움에 떨며 탄식했다는 것이다. 이는 문자의 발명이 무지의 고통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인이 문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소개해보도록 하자.


8세기 무렵의 이야기다. 하풍(何諷)이라는 이름의 선비가 공부를 하기 위해 종이가 누렇게 바랜 고서를 산 일이 있었다. 집에 돌아와 책을 펼치니, 그 속에서 머리카락을 둥글게 만 것 같은 작은 통이 하나 나왔다. 안에 뭐가 들었을까 궁금하게 생각한 하풍이 통을 살짝 잡아당겼더니 입구가 벌어지면서 약간의 물이 흘러나왔다.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든 하풍이 도사를 찾아가 물었다. 그러자 도사는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거참, 애석하구먼. 그것을 만났으면서도 승천을 하지 못하다니 자네도 어지간히 운이 없는 사람일세. 『선경(仙經)』에 이르기를, 지어(紙魚 : 종이를 갉아먹는 곤충)가 '神仙(신선)'이라는 문자를 세 번 갉아먹으면, 자네가 보았던 그 머리카락 같은 모양으로 변한다고 했네. 그걸 '망맥(望脈)'이라고 하지. 밤중에 그 통으로 하늘을 들여다보면 천계의 사자(使者)가 나타나서 선약(仙藥)을 내려준다는데, 자네는 그만 그 통을 열고 말았지 않은가. 그러니 유감이랄 수밖에."


하풍이 집으로 돌아와 고서를 자세히 살펴보니 여러 군데 벌레를 먹은 곳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의 문장을 이리저리 살펴보니 확실히 '神仙'이라는 문자였다. 이 이야기는 황보씨(皇甫氏)가 지은 당대(唐代)의 소설 『원화기(原化記)』에 나오는 것이다. 종이 위에 씌어진 문자가 신비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중국인들의 '문자관(文字觀)'을 엿볼 수 있는 한 가지 예라 하겠다. 그리고 냉철함은 문자가 가진 생명(망맥)을 섭취함에서 생긴다는 것은 내 생각이다. 해서 책을 많이 본다. 소화하는 법은 독송이나 만트라로..


새로움을 열어주시리


도마서 17장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너희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도 없으며, 손으로 만져 본 적도 없고, 마음에 일어난 적 없는 그러한 것들을 내가 이제 너희에게 주리라."
Jesus said, " I shall give you what no eye has seen and what no ear has heard and what no hand has touched and what has never occurred to the human mind."

16장에 사람들은 예수가 분열(둘), 불, 칼 刃, 전쟁을 던지려 왔음을 모른다고 하셨다. 하나됨. 물, 꽃菊花, 화평이라는 개념이 생성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생각지 않는다는 뜻이다. 개념의 토대를 모르면서 저마다의 학습된 지식만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세상은 불합리로 가득할 수 밖에 없다.불합리 부조리한 이 세상을 합리, 조리한 세상으로 바꿔가는 방법은 내가 불합리와 부조리의 근원이라는 것을 인정함에 서다.


부조리와 불합리는 좋은 것이다. 조리와 합리를 생산하는 근원이기에
너를 구원하려 하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의 물음과 해결없이 너를 견짐할 수 없지 않겠는가...궁금한 낱말이 있어서 사전을 찾아보면 개념의 토대도 경험의 실체도 ...명료화되지 않은 문장나열.
 
참을 인 忍(㣼)이라 하는데 참는다는 것은 개념의 토대이고 견딘다가 경험실체가 되는데 견딘다가 뭐냐 사전을 의지하지 않기로 하고 내가 풀어본다. 견짐이다. 肩朕(어깨 견, 나짐)이 견딤으로 간 말이다. 자기십자가를 지고..라고 하는 견짐이다. 즉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감각으로 내탓십자가가 있고, 남탓십자가가 있는데 남탓하는 선택조차도 자기선택이다. 내탓십자가는 1인분이지만 남탓십자가는 2인분이다. 해서 남탓하는 선택은 내탓하는 선택보다 두배로 힘든 삶을 경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겠지.


몸에서 어깨는 날개의 폭이 시작되는 곳으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가 광폭 廣幅이고 열두대의 흉추가 장폭이다. 날개를 자유의 표현으로 하는 줄 알았는데 가슴에서 생성되는 느낌을 감당한다는 견짐을 뜻하구나 오늘 비로소 안다

예수가 "너희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도 없으며, 손으로 만져 본 적도 없고, 마음에 일어난 적 없는 그러한 것들"이라고 하는 것이 문자로 제시 된 개념의 토대인 로기온을 경험의 실체로서 알 수 있게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체험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마음을 열라고 하는데 마음을 여는 도구가 개념의 토대인 말씀의 칼이라고 하는 도마서이다. 내가 그리본다 내 이름에 忍이 있으니 견강부회든 억지춘향이라하든지 다 나에게 당겨들여 나와 맞춘다. 나와 맞추어 하나가 되게 하지 못한다면 둘로 나뉘진 상태로 있는 것이니 내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忍이라는 기호가 마음을 여는 칼이라는 뜻이구나...다시 이해된다. 마음의 칼이니 칼의 마음이니..등등의 문장으로 풀었지만 마음을 여는 칼이구나...도마서가 나에게는 개념의 토대인 마음이고, 소리가 체험의 실체인 칼이구나.

해서 칼과 국화를 나라의 상징으로 하는 일본의 속살을 파들어가려고 하는 것이기도 하고...일본어 い 가 イ(이)의 펼침이고 イ는 人이다. ノ, の(노) 가 乃(내) 에 근거를 둔다고 한다. 50자 일본어 알파벳을 찾아내면 일본의 뼈를 추리게 되는 셈이다. 개념의 토대를 찾아낸다는 것은 각나라어들의 알파벳의 형성과정을 찾아 출발점을 확인하는 것이다. 언어개념의 토대를 찾아 몸에서 일치시키는 것이 영혼창조다. 예수는 영혼을 창조하는 방법, 여인의 몸을 통해서 나지 않은 자...영혼의 길을 제시하시는데 그게 예수의 복음이다. 그대 그대의 몸과 같은 크기의 영혼이 있는가?

의식이 차원상승하게 되면 낮은 의식계에 대한 정보르 다 알게된다. 나더러 어떻게 아느냐 하는데 차원이 높아지다보면 낮은 차원의 것은 그냥 보여지니까 아는 것이다. 해서 굳이 아는 것을 말하기보다 알 수있는 방법, 의식차원을 상승시키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나로서 편히기때문에 아는 것을 말하기보다 같이 알 수 있는 법을 가르치려 하는 것이다. 새로움을 열어 준디. 그런데 옛것을 고집한다. 그럼 방법을 가르쳐 줄 필요가 없지 않겠나. 옛것을 더 욱 고집하기 위하여 방법을 작동시킨다면 부대가 터지든지 ..하게 된다. 부작용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예수의 복음은 새 술이니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 낡은 천에 새천을 같이 깁지마라. 복음이란 새술은 도마서란 새부대에 넣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는 처음은 상당히 잘 가는 듯 보일 것이나 결국은 술이 새든지, 부대가 터지든지...그렇게 끝난다. 도마서와 복음이 셋트다. 바울과 교회가 셋트이듯이...바울의 교회를 따르는 길은 불가로 말하면 대승보살의 길이다. 도마서와 복음의 셋트 길은 소승독각의 길이다. 내가 그리 보고 있다.


시작이 끝이다, 시작이 반이다.


18장.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 우리들의 끝이 어떠할지 말씀해주소서."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시작에 관해 알았기에 이제 너희가 끝에 관해서도 묻노니, 이는 시작이 있는 그곳에 끝도 있기 때문이라. 시작 위에 굳게 서있는 자 복 있나니 끝을 알 것이요 또한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The follows said tto Jesus,  "Yell us how our end will be ." Jesus said, " Have you discovered. then, the beginning, that you look for the end? For where the beginning is. there will the end be. Blessed is he who will take his place in the beginning: he will know the end and will not experience death."


beginning, 시초 최초 시작 , 발단, 기원, 첫머리, 미완성인 것, 초기의 ,초보의..라고 설명한다. 비기닝이라고 하는데 우리말에 비긴다 즉 같다는 말이다. 영어랑 한국어가 같은 뜻이다. 너와 내가 힘의 균형이 일치되면 비긴다고 한다. 처음이 끝이다고 하는데  시작이 반이다고 한다. 시작과 끝이 같다는 비기닝과 시작이 반이라는 사상은 무엇이 다른가. 동양의 시작이 반이다는 수직으로 출발함을 말하고 시작이 끝이다고 하는 것은 수평의 출발점을 말한다. Hidden에서 흙속에서의 반과 흙위의 반을 말하기때문에 동양은 시작이 반이다고 하는 것이다. 땅위로 싻이 올라오면 이미 반이 흙아래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동양의 이 사상 멋나지 않나...원은 처음에서 출발하여 처음으로 돌아온다. 원을 반으로 당기면 양쪽이 비긴다. 예수의 너에게 나눔하시는 사상은 원사상이다. 처음과 끝이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아는 것은 처음과 끝을 당겨서 수직에서 관할 때에서다 예수의 수평사상은 동양의 시작이 반이다의 수직에서 반을 완성함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수평을 진리라고 환치하면 수직을 권위라고 할 수 있다. 진리를 모든 이에게 평등한 것이지만 그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채움한 이에게만 권위가 있다. 


眞理는 하녀의 속성이있다. 권위權威에 의존해야 빛을 발한다. 권위가 약한 진리는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둔갑한다. 대다수가 진리를 숭상하는 것 같아도 실상은 권위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고 한다. 해서 자신의 삶이 권위가 되지 못하면 종교라는 교리에 부여된 권위에 귀속함으로 진리가 아니라 권위의 노예가 된다. 오늘날 외연에서 보여지는 형태들은 진리가 삶으로 이어지지 않은 이들은 어떤 양상을 보이는가를 드러내는 현장이다. 그대가 교회라는 형식을 빈 단체에 머문다면 진리가 아니라 교리라는 권위에 코가 꿴 하녀일 따름이다.


眞理 Truth가 무엇이냐...빌라도 가 예수에게 물었을 때 예수는 답하지 않은 것은 예수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도마가 입술로 말할 수 었는 언어가 없다고 하였던 것과 같다. 빌라도는 진리를 자기의 것으로 채움하지 못하였고 예수는  진리를 자기것으로 안다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진리를 참된이치 라고 퉁쳐서 말하는데 「참 」, 「된 」, 「이 」, 「치 」라는 낱말은 어떤 토대로 생성된 것인지부터 찾아야 제대로 통합 된 개념이지 않겠는가. 참은 Full, 漫, 된은 成 , Be, 이는 make, produce, manufacture, invent, create, build, construct, prepare, cook, fix..作, 치는 rule, 法. 으로 한자로 옮기면 만성작법 漫成作法이다. 법이 만들어진 원리를 삶으로 완성하여 넘치게 한다.

 
만성작법을 하지 못하면 삶의 행동체인 몸은 남의 언어를 따라 너의 언어에 지배되어 헛된 진리를 숭배하는 노예살이를 한다. 내 삶에서 구현되지 않으면 진리라 말하는 것이 모두 헛되다. 만성작법이라는 권위에 의존해야 하는데 진정한 권위는 나는 내 몸에서 생성되는 소리가 만들어내는 주파수와 파동함수라고 생각한다. 해서 나는 남이 부여하는 초라한 권위보다는 내 스스로가 만성작법하여 내는 권위를 존중하고 사랑한다. 해서 남의 잣대에 구애받지 않는다.


예수에게 " 우리들의 끝" 을 물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선 자리에 대하여 묻지 않고 미래를 궁금해한다. 자기가 선 자리를 아는 사람은 끝을 묻지 않고 선 자리, 토대를 궁금해한다. 예수는 끝이 시작이라고 했다. 미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하는 것이다는 것. 나는 무엇을 토대로 서 있는 존재인가? 보이는 땅인가? 보이는 가족인가? 보이는 지인들인가? 보이는 직업인가? 내게 힘이 되는, 기대는 언덕이 무엇이 무엇인가..알아내는 것이 내가 선자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숨쉼이라는 처음에 답을 부여하지 못한다면 선 자리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모두 허상이다.


만성작법, 참된 이치는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주목하지 못한다면 아직도 남이 만든 권위의 허상에 발을 딛고 헤메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숨쉬는 동안 내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는 것..이게 참된이치 진리다. 공부하다가 깨닫게 된 것이 한 마디 올라서서 이제는 다 왔겠지..하면 도달한 곳이 다시 출발지라는 일깨움을 주시더라. 지금 도마서가 내 로기온이라 선언하지만 동안의 경험의 실체를 두고보면 114장을 클리어하면 클리어한 자리가 출발자리가 될 터.


360도 한비퀴 돌아서 처음자리에 도달했을 때 그때서야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동그라미가 되겠다. 29살에 시작한 공부 29해를 다물하여 다물끝 58에 도달하게 되면 내 동그라미가 이가 빠지지 않고. 찌그러지지 않고 완벽한가를 살피게 될 것이다. 끝이 시작임을 알게되면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 이 풀이는 내 공부에 빗댄 설명이지만 시작이 오늘 지금 여기이기에 끝 역시 오늘 지금 여기라는 것. 사실을 살라는 것이다. 생각이나 마음이 만드는 내일 그곳 무엇은 비실제임으로 추상적인 무엇에 의존하려하지 말고 펼쳐진 삼라만상 생명있는 것들의 호흡을 같이하라는 것이다. 자연생명에는 언어나 문자가 없으나 주파수와 파동함수로 가득하다.
아침바람이 선물하는 생기로움. 말없는 말로 충일하다. 그 바람을 호흡하면서 내게 베풀어 두신 하늘을 땅을 그리고 그 가운데 풍성한 모든 것들을 누린다


시작위에 굳게 서 있는 자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다. 숨이 멈추는 일은 없다. 바람이 숨이기에...영생이 무엇이냐 물으면 숨쉬는 일이라고 대답하거라 거기, 숨쉼에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나니..해서 생명공부가 숨쉬기에서 시작하고 숨쉬기로 마무리된다. 소리도 숨쉬기로 시작하여 숨고르기를 하고 나옴으로 완성한다. 숨고르기로 마무리하지 못하면 안한 것과 같다. 복음이라는 마중물을 통해서 소리를 이끌어내고 소리를 가지고 우주와 공명한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메뉴얼을 거친다는 뜻이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만성작법을 하는 과정을 배우는 것도 힘들지만 가르치는 것도 힘들다. 동안 세월을 거쳐서 추리고 추려서 빛결과만 만성작법을 한다. 도마서 114장을 클리어하려면 만성작법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기에...도마서처럼 쌍둥이로 작업을 하는 것이다. 재밌는 경험의 실체 아닌가..


도마서를 풀어가면서 두문불출. 도마서 114장을 다 클리어하게 되면 이 글을 기초로 하여 퇴고를 해서 문서사역의 토대로 해야겠다 생각. 본디 내 탈란트가 문서쪽이었으니..예수복음을 찾아 내었으니 그 로기온을 중심으로 새하늘과 새땅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이에게 이어 줄 수 있겠다. 힘내자..청향풍류!! 참하다..소리빛결!! (2016년 7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