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서

지나가는 하늘, 영원한 땅 도마서 11~13장.

청향고은 2019. 2. 8. 17:05

지나가는 하늘, 영원한 땅 


도마서 11장.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이 하늘은 지나갈 것이요 거기에 속한 것도 지나갈 것이다. 죽은 자는 되살아나지 않을 것이요. 산 자는 죽지 않으리라. 너희들이 죽은 것을 먹던 날 죽은 것이 살아났었다. 너희들이 한 번 빛 가운데 거하였다면 너희들이 무엇을 해야만 할까? 너희들이 하나였던 날 너희들은 둘이 되었다. 그렇게 이미 둘이 되었다면 너희들이 무엇을 하여야 할까? 
Jesus said." This heaven will pass away. and the one above it will pass away. The dead are not alive. and the living will not die. During the days when you ate what is dead. you made it come alive.
When you are in the light, what will you do? on the day when you were one. you be xome two. But when you become two, what will you do? "

지나가는 하늘이라 함은 한 세대를 가르치지 않을까 생각한다. 111편에 "너희 눈 앞에서 하늘과 땅이 두루마리같이 말아 올리어질 것이나 살아계신 자에게서 비롯된 산 자는 죽음도 두려움도 겪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씀하시기를 " 자기 스스로 우뚝 서서 견디는 자에게는 세상은 더 이상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않느니라." 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11장 로기온과 같은 맥락을 설명하는 것이다. 사상을 지배하는 언어의 영향력을 30년으로 본 것이다. 사상을 온축하는데 30년, 공자가 이립나이를 30, 예수의 공생애 나이가 30즈음. 한세대를 30년으로 본다. 언어의 힘이 30년을 간다는 것.   

 

동양은 4대 120년이 되면 혼백이 흩어진다고 한다. 혼백을 나는 고유한 성문 언어진동수라고 이해하고 있다. 30년에 담기는 뜻은 많다. 이런 정보는 스스로 찾아 채움하는 즐거움을 누리기를....예수는 구약에 능하였고, 구약은 상징과 신화들로 구성된 것이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으며 구약의 핵심은 "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 로 요약되는 " 恕 " 다 는 것을 6장에서 " 제자들이 질문하며 예수께 묻기를 "당신은 우리들이 금식하기를 원하나이까? 그리고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나이까? 이웃에게 보시하여야 하나이까? 또한 음식은 반드시 가려 먹어야 하나이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거짓을 말하지 말고 너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행치 않도록 하라 왜냐하면, 하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나고 그 어느 것 하나도 숨겨지는 것이 없느니라 드러나지 않는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느니라" 고 하신다.

 

주기도문에도 나온다. 예수는 구약을 완성하려 왔다고 하였고. 구약은 상징으로 가득찬 수수께끼 모음집, 신화이고  도마서 역시 상징을 모르면 풀어낼 수 없는 '수수께끼謎 모음집이다'고 나는 생각한다.

 

" 恕" 를 알고 나와 너에게 쓰는 것을 용서用恕라고 한다. 恕라는 개념을 나타내는 한자. 恕 이렇게 그려놓고 용서할 서라고 한다. 용서하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용서容恕라고 하는데 容(얼굴 용)을 용서한다니...그래서 나는 용서할 서에서 용은 아마도 用일 것이다 추론하였다. 얼굴은 얼을 드러내는 거울임으로 말을 하는 내 얼굴을 봐서 표정이 자연스럽지 않고, 아름답지 못한 말을 하게 될 때의 표정과 진심에서 하는 말을 할 때의 표정이 달라짐으로 내가 말을 할 때에 내가 보지 못하지만 내 얼굴을 보는 너에게는 드러나니까 거울을 보아 내 말에 따른 얼굴표정을 먼저 살피는 것을 용서라고 하는 것이구나 하신 것이다.

 

내가 말을 할 때 내 얼굴표정은 너가 본다.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 내 얼굴표정이 미워지거나 찌그러지는 말을 하지 말라..거울을 들고 말하는 나의 얼굴을 먼저 관찰하라는 것이겠다. 그게 용서라고..나는 내가 말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지만 내 말을 듣는 너의 반응을 보면 내 표정이 어떠하구나..알 수 있다. 내 표정이 밝으면 너도 밝게 반응한다. 내 표정이 어두우면 너도 어둡게 반응한다. 내 앞에 있는 너가 바로 내 표정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이런 뜻이구나...용서할 서의 용을 그렇게 풀었는데 이제 恕가 무엇이길래 어떻게 쓰야 하는 것인가.. 한자는 개념어, 즉 표의어다. 개념을 사용하는 자는 누구나 그 개념의 토대가 되는 경험의 실체와 관계를 맺고 있는데 개념과 경험이 괴리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즉 문자를 아는 것과 그 문자가 담아있는 뜻과 내가 경험한 것과 일치되지 않는 것이 흔하다는 것이다.

 

 恕는 女口心으로 짜임되어 있다. 女는 껍질(皮)이다. 口는 길이다. 心은 아다시피 마음이고 마음은 안 裏이다. 女에 表, 心에 裏를 대입해도 같은 뜻이다. 상표와 하리를 잇는 길이 恕라는 글자의 개념이다. 나만의 해석이고 풀이다. 괴리된 겉과 속을 길로 잇는 일을 용서라고, 말에 따른 표정. 말의 진위는 얼굴표정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표정을 속이려고 화장이라는 문화가 생겼다. 냄새를 속이려고 향수문화가 생겼듯이..


女는 생물학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에 爻(점괘 효)를 던져 흩어진 것을 그린 기호라고 하였다. 아이가 책상에 爻를 던지는 것을 學이라 한다. 운명을 점치기위해서 산가치를 던지는 일이 학이고 산가치를 던지려고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모습을 그린 것이 女다는 것이다. 윷놀이에서 윷을 던지려고 하는 모습. 恕가 구약이나 논어에서 중심 개념기호가 되는 이유다. 개념과 경험이 괴리乖離된 것을 잇는 일이 없으면 하나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은 지나갈 것이요 거기에 속한 것도 지나갈 것이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나 땅은 영원하다고 전도서에서 말한다. 한 세대를 풍미하던 사상과 경험이야기들은 지나가는데 세대가 오가는 마당, 땅, 개념의 토대인 한자는 영원하다. 영원한 땅에서 피워내는 개념의 토대와 지나가는 한세대가 경험하는 실체가 분리되어 있으면 한 세대의 경험이 개념과 하나되지 못한다. 이것을 죽은 자라고 하였고, 죽은 것을 먹은 날 죽은 것이 살아 났었다고 하는 것, 습관에 따라 말살이를 반복하는 것이다. 내 말에 대한 너의 표정을 살피지 않고 하는 말은 죽은 것이고 , 개념의 토대와 경험의 실체를 얼굴을 봐서 표정을 봐서 진위를 가려가면서 말살이를 잇는 것을 산 자라 하였다.

 

온유하고 화평한 "마음"이라는 것을 어디서 어떻게 증명하는 것인가. 얼굴표정이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니까 표정이 마음이다. 하여 78장에서 예수는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희가 어찌하여 들판으로 나갔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기 위함이냐? 또 부드러운 옷입은 자들을 보기 위함이냐? <보라, 너희의> 왕과 권세자들은 부드러운 옷을 입고 있으나 진리를 알지는 못한다." 을 보면 된다. 진리, 즉 말에 따른 자신의 얼굴표정을 자신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얼굴표정을 보면 본마음이 드러난다. 얼굴이라는 것의 용도다. 마음을 드러내는 거울. 얼굴은 일만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한다. 마음이 일만가지라고 말할 수 있는데 과연 나는 얼굴 표정을 몇개나 알아 볼 수 있을까?  

 

말에 따른 얼굴을 살피지 못하면서 하는 말살이를  '너희들이 죽은 것을 먹던 날 죽은 것이 살아났었다' 라고 하며 얼굴을 봐서 내 마음을 부드럽게 고쳐나가는 것을  '너희들이 하나였던 날 너희들은 둘이 되었다' 고 하는 것이다. 개념과 경험을 하나로 통합하려면 어떤 것이 하나된 상황이며 어느 것이 분리된 상태 인지를 알아야 한다. 언어는 드러난 마음이고 몸(얼굴)은 드러난 마음을 경험하는 바당이다. 내가 모르는 말에는 무표정하게 된다. 아는 말에는 표정이 생기게 된다. 얼굴이 표정이 가득하게되고 생기로 넘치게 되는 경우는 자신이 아는 말을 들을 때와 체험한 것을 말할 때다. 내가 아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공명이 생기고 내가 체험한 것을 말하는 사람에게 감동한다. 웃거나 운다는 것으로 드러난다. 언어와 몸의 괴리를 찾아내고 간극을 기워가는 것 그 기움이 천의무봉처럼 바늘자국하나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이미 둘이 되었던, 괴리를 깨달은 내가 할 일이라는 것이겠다. 죽음이라는 것은 개념의 토대와 경험의 실체가 연결되지 않은 것이다. 생명이란 개념과 경험의 일치된 흐름이다.  

 
죽은 자는 되살아나지 않을 것이요. 산 자는 죽지 않으리라 는 당연한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말에 따르는 표정을 알지 못하면서 알려고 하지 않는 한  알 길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을 알고 괴리를 기우려고 방법을 찾는 자는 길을 찾아내게 되어 있고 그것을 진리를 추구한다 도를 찾는다..고 한다. 2장, 찾는 자는 발견하기까지 찾기를 멈추지 말라. 만일 발견하게 되면 , 그는 크게 떨며 예언을 할 것이며, 떨며 예언을 하게 될 때, 그는 이적을 행할 것이며 그리고 온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 자기자신을 아는 것이다. 94장 로기온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신다. " 찾는 자는 발견할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 문은 열릴 것이다." 자기자신은 말에 따라 나오는 얼굴표정이다.  
 
드라마의 연기를 보는 것은 내가 어떤 말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 내 표정을 봐서 인식하지 못하기때문에 너의 얼굴 표정을 봄으로 공감각을 형성하려는 것이다. 표정의 변화를 관찰하는데 가장 풍성한 용서가 이뤄지는 얼굴이 아기다. 아기는 보이는 얼굴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그대로 드러낸다. 아기에게 내가 어떻게 인식되는가를 알기위해서 아기를 보는 것이다. 어른은 얼른 표정을 감추고 가면을 쓰지만 아기는 내 표정을 민낮으로 그대로 보여준다. 아기가 명징한 거울이다. 화장한 어른들, 가면을 쓰는데 익숙한 오래된 늙은이들은 더럽혀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하여 예수는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간다..했다. 내 말을 비춰 줄 거울이 맑은 거울이지 않으면 천국 못간다. 표정을 아기처럼 맑게 만들려면 아기처럼 살아야 한다. 4장 로기온에서 " 그의 산 날이 오래 된 늙은이들은 태어난지 이레밖에 되지 아니 된 아기에게 생명의 처소에 관해 질문하기를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그리함으로 그는 살아 날 것은 많은 앞선 자들이 뒤쳐질 것이기 때문인데 그리고 그들은 오로지 하나의 상태가 될 것이다."그리고 이어서 너의 면전에 있는 것을 알라. 그러면 너에게 감추인 것이 너에게 드러나리라. 그 어느 것도 숨기어져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고 하신다. 너의 면전에 있는 것은 내 말에서 생기는 얼굴표정이다. 용서..는 얼굴표정을 살피어서 굳고 어둡고 그늘진 것에서 밝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표정으로 바꿔가는 것이다. 마음은 얼굴표정으로 나타나고 마음공부의 진위도 표정에서 증거한다. 도마서 10독을 하고 나서 찾은 것이 마음은 얼굴표정이다는 깨달음이다. 세상에...내 얼굴표정이 본마음, 본심본태양의 실제라니.. 마음을 다스리라는 것은 얼굴표정을 살피라는 말이고..해서 나는 민낮을 좋아하는 것이구나..내가 민낮으로 살아가는 것은 마음에 티를 싫어하기에..이름도 마음에 칼을 두고 살아라..고 하니...        
자기자신이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인지...궁금해 해보지 않았다면 죽은 자이다. 내가 아무리 이렇게 설명을 해도 알고자 함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게 되살아나지 않는 것이다. 자기는 말이다. 자신은 얼굴 표정이다. 말을 하면서 나는 어떤 표정을 짓는가... " 너희들이 하나였던 날 너희들은 둘이 되었다. 그렇게 이미 둘이 되었다면 너희들이 무엇을 하여야 할까? " 다.  표정은 말에서 생기는데 일만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고 일만가지 표정을 만드는 것은 일만 말에 있다. 훈민정음으로 만들어내는 말이 일만이천자 정도인데 일만 표정과 일만 말이 한국어다. 객관적인 말, 주관적인 표정을 일치시킬 수있는 언어가 한국어다. 표정을 고칠 수있는, 마음을 알고 다스릴 수 있는 객관적인 학교다. 
 
뇌 안에서 뇌 밖으로 나온 마음이 얼굴표정이라니..이렇게 ..사실적인 것이라니..옥구슬 구르듯이..도마서를 독송하고 얻어 온 것이 마음이 얼굴표정이니라...다. 얼굴표정에 종교나 철학이나 지식이나..이런 상대적인 잣대가 필요치 않다 스스로의 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절대적인 잣대가 자기 얼굴 표정이다. 자기 얼굴에 책임지라는 말이 이른 것이구나. 말살이가 온유하면 표정이 따라서 온화하게 된다. 글자는 밖에 있는 마음이다. 말은 안에 있는 마음이다. 이 두마음을 하나로 하는 것이 얼굴표정이다. 얼굴표정에서 참과 거짓이 나타난다. 절대적인 진리. 속일 수 없는 진실. 용서의 현장이 내 얼굴표정이라니...입꼬리 올리기 연습은 표정을 온화하게 하는 외적 수행이고 고운소리 맑은 소리 영창은 말을 온화하게 하는 내적 수행이다. 주여...다시 시작입니다. 처음에서 이제 죽은 문자거울을 버리고 살아 있는 얼굴표정이란 거울을 들었습니다.     

  

밖으로 나간  마음그림자가 글이요
안으로 숨어든 마음그림자가 말이요
글과 말의 본마음이 얼굴표정이라네요
말따라 일만 마음꽃이 글에서 피고
말에서 피고 졌거늘..
이제야 거울을 들고 본심 얼굴표정을 봅니다.
손꽃지문을 피움에도 손금이 마음이었구나.
천의무봉을 입어야하는 곳. 얼굴표정.


판소리와 복음 

 
아래 강상원박사님의 판소리에 대한 강의를 먼저 들으면 소리가 "씨부리다"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씨부린다 즉 種音을 낸다는 말인다. 종음을 자음이라 하는데 자음은 모음에다 뿌려진다. 모음 아...의 리듬에 담기는 뜻이 어떤 것인지...조상은덕 배달나라..가 복음을 만들어내는 단전 자리(丹所)다. 알이 펼쳐진 말이 "아리"인데 두마디가 가장 아름다운 찬트이다. 아리가 반복되면 결이 만들어져 아리랑이 된다. 내가 가장 잘 부르는 노래가 "아 가 무한반복으로 돌아가는 리"두마디 챤트다. 字音은 떨구고 母音만으로 가는 것이 복음인데 내가 판소리라고 하는 것은 파다 즉 뚫다고 하는 개념이다. 소리를 뚫는다? 소리를 파낸다고 판소리다.  
 
사람 99%정도는 기본 도음에서 아래위 한 옥타브정도에서 진동수를 만들어 대화를 하면서 살다가 숨이 멎는다. 가운 도를 중심으로 위아래  6마디씩 12도 합이 13이다. 하여 13마디 진동수는 인류의 99%의 진동수가 모여있다. 바깥에서 99%는 개돼지라고 말해서 감히 개 돼지에게 인간을 비교하다니 하며 분노한다는데 개,돼지가 노여워할 일이지 사람은 감사해야 할 일이다. 개, 돼지의 진동수가 사람보다 높기 때문에 사람이 개 돼지만큼만 되어도 이런 세상을 만들지 않는다. 
 
개와 돼지의 진동수는 개는 사람보다 옥타브가 높고 돼지는 사람보다 낮다. 높다 낮다고 말하는 근거는 사람의 체온에 비교하여 개는 높고 돼지는 낮다. 뭍동물들은 사람보다 대부분 체온이 높고 바다 생물들은 대부분 낮다. 진동수가 높기때문이다. 사람으로 동물들의 진동수를 만들어내면 그 동물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동물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식물의 온도만큼 진동수를 낮추면 식물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요즘 고양이 진동수에 맞추어서 고양이와 대화를 해보려고 가늘고 높은 소리를 훈련하는데...방 창문 아래서 밤마다 세레나데를 불러준다, 듣고 있노라면 이 아이들은 어떻게 이렇게 고운 高韻 소리를 낼 수 있을까..뽀야나 쿠쿠가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배가 출렁거린다. 배의 에너지를 끌어내어서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화를 할 때 가운도를 중심으로 좌우 6마디, 갈비뼈 6대까지에서 나오는 소리를 한다. 반마음이라 한다. 영혼이 없는 대화라고 한다. 배에서 나오는 소리로 대화할 때 온마음, 전심으로, 영혼이 있는 대화다 하는데 가운도를 중심으로 상하 2옥타브 즉 24마디, 열두갈비뼈의 진동수를 담은 말을 할 때 영혼이 담긴다..고 말한다. 소리훈련을 진동수를 파들어가는 것이 판소리다. 진동수가 높을 수록 파들어가기가 힘들다. 높은 진동수를 만들어내는 것만큼 낮은 진동수를 만들어내는 것이 힘들다.

낮아진 만큼 반작용으로 높아질 수 있기 때문에 높은 진동수를 만들기위해서는 반드시 낮은 진동수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높은 진동수만 가지고 있으면 디딜 바당이 없기때문에 풍전등화라고 하듯 불안하고, 낮은 진동수만 가지고 있으면 늘 밟히기 때문에 허무함이 생긴다. 허무의 바다라고 하듯이... 낮은 진동수는 바다에너지와 연동되기에 물결같은 바이브레이션이 있게 되고 높은 진동수는 새가 깃을 치며 날개를 펴고 올라가는 것처럼 올곧은  음이 된다. 
소리를 판다..자신의 기본진동수를 깨트림으로 새로운 진동수를 내것으로 만드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올려 둔 동영상 소리는 판소리라는 글제를 다루는 것에서 판소리의 현장을 첨부하려고 소리를 하다가 부분을 『 땀 』하였다. 센 소리 높은 소리를 가는소리로, 굽히는 소리로, 섬세한 음을 뽑아내는 훈련 과정음이다. 진동수가 어마무시하게 높기때문에  상천, 북극성의 정보를 당겨들인다.




어디로 갈까?


12장. 제자들이 예수께 말했다. "당신이 우리들 곁을 떠나실  것을 압니다 우리가운데 누가 가장 큰 자가 되오리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어디에 가든지간에 의인 야곱에게로 갈찌어다. 하늘과 땅이 그로 인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The disciples said to jesus, " We know that you are going to leave us. Who will be our leader? " Jesus said to them. " No matter where you are you are to go to James the Just, for whose sake heavrn and earth came into being."


11장 하늘이 지나간다 去天 거기에 속하는 것도 지나간다 去物장 끝에 이미 둘이 되었다면 너희들이 무엇을 하여야할까? 즉 개념의 토대 土垈와 경험의 실체가 둘로 나뉘진 제자들에게 무엇을 해야할까 라고 물음에 대한 반응이다.

개념의 토대인 예수빛 안에 있음인데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둘이 됨인데 둘로 분리되었을 때 무엇을 하여야 하느나...당연히 하나가 되도록 「恕」 해야 하지 않겠는가...를 말씀하신 것이 11장의 말씀이다.


12장 로기온을 보면 제자가 묻는 것과 예수가 답하는 것이 다르다. 제자는 우리가운데 큰 자를 묻는데 예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말한다. 제자들은 자리에 머물고 그 자리에서 도토리 키재기에 키재기역할을 예수에게 부탁하는 것이고 예수는 도토리들이 아무리 커봐야 거기서 거기니 씨에 머물지 말고 발아하여 자라 나무가 되는 옮김을 말한다 .큰자가 되려면 우리 가운데 있어서 머물지 말라 라는 것이다. 의인 야곱처럼, 구약의 야곱처럼  도적에서 이기는 자가 된 야곱처럼 되라는 뜻이다. .


예수와 같이 있으면서도 예수를 경험의 실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당시 제자의 도토리 키재기이이고, 지금 나의 문제인 것이니 이 죄(씨에 머물고있음)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恕』 가 필요하다. 무지를 안다는 것은 개념의 토대를 마주하면서도 그 뜻을 모른다는 것이고 무지에서 앎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경험의 실체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먼저 개념의 토대를 알고 자신의 경험실체를 알아서 연결시키는 일이 恕 이기때문에 이 작업은 지극히 어렵다. 개념의 토대를 인식하는 것은 땅은 변하지 않으며라는 원리 常女, 경험의 실체를 아는 것은 하심 河心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흐르는 느낌. 불변과 가변지나가는 하늘과 영원한 땅을 무엇으로 연결할 수 있는 것인가..예수가 제시한 문제이며 당시 제자들이 풀어야하는 문제이며 오늘 내가 풀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우리들 곁을 떠나실 것을 안다. 즉 상녀하심이 분리되어 있다. 당신이 있는 자리를 무엇이 대신하느냐..를 묻는다. 예수가 말한다. 야곱원리를 생각하라고. 구약의 야곱은 죄인이었다가 얍복나루의 씨름을 통하여 의인이 된 이다.

쌍둥이로 태어나 분리된 길을 택했다가 마주오는 형과 화해하기위하여 얍복나루의 씨름, 즉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 화평을 이룬,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뀐 일이 하늘과 땅이 새로이 창조되는 일이다. 즉 자기변화, 개념의 토대와 경험의 실체를 연결하는 일이 새하늘과 새땅의 창조다. 예수가 제시한 것은 개념의 토대와 경험의 실체를 잇는 길이 몸에 있고 그 길의 출발은 입이다는 것. 길은 진리와 생명을 하나로 하는 恕다.


그대는 그대가 쓰는 말의 토대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대가 경험하는 실체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얍복나루를 거치는 과정이 전제된다. 아내 자녀 재산 종을 얻기위한 20년의 경험의 실체가 도망쳐나온 환경을 마주해야 함의 두려움을 대신할 수 없는 「쓸모없음」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마지막으로 도전해 보는 것이 지푸라기를 잡는 것. 천사와의 씨름, 예수의 겟세마네의 기도...자기 몸에 깃들여있는 두려움을 인정하고 마주보는 서 恕가 일어난다. 순간 순간을 속임으로 얻은 유익인 듯 보이지만, 생명의 처소가 위협을 받는 상황을 만났을 때는 자기합리화하면서 얻은 모든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죄책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모습을 드러낸다.

 

생명의 처소가 무엇으로 채움되어 있었는가? 아내로, 자녀로, 재산으로 종으로 ...채움하려 한 속임을 마주했을 때 무엇이 있을 것인가. 면전의 일을 알라고 하는 예수의 가르침이다. 내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는가..나는 30프로의 재물이 주는 경험의 실체와 70%를 차지하는 개념의 토대를 알아가는 즐거움으로 살아간다.


그대는 무엇을 기대고 살아가는가...예수는 개념의 토대다. 개념은 표의어다. 지구의 표의어는 한자이다. 시공이 없는 한자와 시공에 있는 나를 잇는 것이 표의음어인 한글이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한자의 형성원리를 안다는 것과 같다. 입에서 출발하여 기저를 찍고 두정 숨골을 열고 우주 파동함수와 이어지는 주파수를 타고 다니면서 500만년의 유전자 정보, 선각들의 육성을 찾아 들어가며 도마서를 풀어내고 있기에... 나처럼 도마서를 풀어내는 이는 전무후무할 것이며 현유일하다. 자랑이 아니라 사실이다.




13장.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 비교하여 내게 말하라. 내가 누구와 유사한가?"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기를 " 당신은 의의 천사와 같나이다." 마태가 그에게 답하기를, " 당신은 지혜의 철인과 같나이다. " 또한 도마가 그에게 답하기를 " 선생이여, 당신이 누구와 흡사한지를 말하기에는 나의 입술이 전혀 합당치 않을 뿐 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 나는 더 이상 너의 선생이 아니다. 왜냐하면, 너는 내가 만든 샘의 거품이 이는 샘물을 마셨고 , 또 취했기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도마를 따로 곁으로 불러내시어 그에게 세 마디 말씀을 주셨다.
도마가 동료들에게 되돌아오자 그들은 도마에게 말하기를, " 예수께서 네게 무엇을 말하였는가?"
도마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가 내게 한 말씀의 한 가지라도 너희에게 말한다면, 너희는 돌을 들어 내게로 던질 것이요. 그러면, 돌에서 불이 나와 나와 너희를 태울 것이다."


Jesus said to his disviples, " Compare me to something and tell me what I am like." Simon peter said to him. " You are like a just messenger." Matthew said to him, "You are like a wise philosopher." Thomas said to him, " Teacher, my mouth is utterly unable to say what you are like." Jesus said, " I am not your teacher. Because you have drunk, you have become intoxicated from the bubbling spring that I have tended."
And he took him. and withdrew, and spoke three saying to him. When Thomas came back to his friends they asked him. "What did Jesus say to you?"

Thomas said to them, " If I tell you one of the sayings he spoke to me, you will pick up rocks and stone me. and fire will come from the rocks and devour you."

12장에서 개념의 토대인 예수와 경험의 실체인 제자사이에 오간 대화다. 베드로는 개념의 토대를 자신이 예수와 만나기 전에 학습한 잣대인 거룩한 천사, 즉 자신이 꿈꾸는 이상향을 성취시켜 줄 메시아로 경험하고 있으며, 마태 역시 자신이 습한 지식을 바탕으로 고차원의 사유지식을 가르쳐 주는 선각자로 경험하고 있다. 예수를 만나기 전의 마태나 베드로의 의식차원을 살펴볼 수 있는 로기온이다. 이 로기온의 방점은 그대는 무엇에 주목하는가는 확인이다. 나는 "비교하여 보아 Compare..." 에 방점 傍點 (곁 傍, 점찍을 點)을 둔다. 방점이라는 낱말에 얽힌 이야기..후궁의 방에 드시겠다 표현을방점이라 한다. 해서 傍은 人立方으로 되어 있다. 재밌지 않은가? 이 문장이 후궁의 처소같아서 어디에 점을 찍는가에 따라 다른 얼굴이 나온다. 비교하여 보아 Compare... 이 방은 정말로 중요한 방이다. 그대는 어디에 비교하여 예수를 알아가고 있는가? 이 질문이다. 나는 도마서를 놓고 예수를 알아가고 있다. 방점을 도마서에 찍었다는 것이다. 마가나 누가나 마태나..등등의 방이 있지만 도마방이 우우뇌형이면서 고양이과에 속하는 나에게 가장 강한 끌어당김이 생기기에..   


도마는 개념의 토대(로기온Logion)와 경험의 실체(feeling)가 어떻게 일치될 수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임을 알아채었기에 자신이 비교하여 보아 Compare...가, 즉 예수를 만나기 이전에 습득한 의식으로서는 예수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도마가 인식하는 예수는 도마의 예수이기에 자신의 의식에 예수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바울의 예수, 마태의 예수, 베드로의 예수, 요한의 예수..들이 성서로 엮였지만 도마의 예수는 없다. 예수의 로기온만을 기록한도마서는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어떠한 희망도 제시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경에서 제외되었다. 예수는 도마가 여태 배워 온 지식과는 다른 살아있는 존재임으로 어떤 의식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뭐라할 말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선생님에 대하여  스스로를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도마의 말이다. 너에 대한 내 인식은 너에 대한 것이지 너 자체가 아니다.이것을 아는 도마이고 다른 이는 내가 아는 예수가 예수자체인 줄 착각한다는 말이다..


세마디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예수의 본질을 도마에게 보여주신 것일 터. 세 마디를 나는 恕, 女口心라고 인식한다. 예수의 세마디는 나는 모르겠으나 내가 도마서에 당김을 얻은 것은  소리법이 녀구심 恕을 통해서니 내 세마디도 예수와 같은 것이지 않겠나 한다. 로기온을 필링하는 방법임으로 내가 전하는 복음은 도마서의 114편 로기온을 경험으로 일체시키는 것과 상관이 있다. 해서 그 외의 것에 사용하려고 하면 예수의 恕法, 복음은 작동하지 않는다. 다른 책들은 예수의 복음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지만 도마서만은 예수의 恕法을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경험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함으로 개념의 토대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구약이나 예수는 자유를 말한다. 너와 나의 평등을 말하고 너와 나의 하나를 말한다.. 예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수평관계, 자유가 이뤄지는 것이고 수직관계는 허물어진다. 너를 보아 나를 안다 너를 내가 어떻게 인식하는가...그것이 내가 도마의 길인가 베드로나 마태의 길인가를 나눈다. 도마의 길은 면전에 있는 대상은 선생님이다. 도마서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너를 가르쳐야 하는 이로 생각했었다가 이제는 선생님으로 인식하게 된다. 예수의 서법복음은 나를 개념의 토대와 경험의 실체를 잇도록 하여 새로운 나를 창조한다. 나를 서 恕하는 것..용서가 이뤄졌을 때 너를 선생님으로 볼 수 있다는 것. 내가 전한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恕할 수 있는 길이다. 다른 것은 나는 모르겠다. 


도마가 동료들에게 되돌아오자 그들은 도마에게 말하기를, " 예수께서 네게 무엇을 말하였는가?" 도마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가 내게 한 말씀의 한 가지라도 너희에게 말한다면, 너희는 돌을 들어 내게로 던질 것이요. 그러면, 돌에서 불이 나와 나와 너희를 태울 것이다."

 When Thomas came back to his friends they asked him. "What did Jesus say to you?" Thomas said to them, " If I tell you one of the sayings he spoke to me, you will pick up rocks and stone me. and fire will come from the rocks and devour you."


예수의 세마디를 통해서 미지의 경험(언어로 말할 수 없음)을 개념의 토대와 일치시킨 도마가 예수와는 분리된 자기인식에 머물고 있는 제자들에게 왔을 때 경험의 실체를 개념의 토대와 연결시키는 방법을 도마는 예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자신이 찾고 발견하여 샘물을 마시고 샘물을 취取 자이기에 예수와 확인과정을 거친 것일 뿐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놓인 상황, 거룩한 천사나 지혜로운 현인...이라는 돌(툴)을 가진 제자들에게 도무지 설명할 수 있지를 못한 것이다. 즉 예수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는 예수가 아니라 너의 의식자리를 나타내는 것이다..는 것. 예수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그것은 예수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를 인식하는 너의 문제다는 것.,개념의 토대가 잘못설정되어 있다면 아무리 경험의 실체가 강하고 뚜렷해도 하나되지 못한다는 것.


예수가 나눈 세마디가 무엇이였을까? 한가지라도 말한다면 제자들이 돌을 들어 도마에게 던진다고 한다. 전승되어 습학된 율과 법을 토라(툴, 틀 機)라고 했다. 제자들의 인식(지식)에서는 도무지 용납되지 않는 것이고 돌에서 불이 나와 도마와 제제들을 태운다는 것은 습학된 인식을 버리지 않고 그 것을 기준으로 듣게 되면 전하는 이나 듣는 이에게 서로 입씨름만 될 뿐이라는 뜻이다.


즉 언어개념의 토대가 일치되지 않는 경우 경험의 실체를 이야기한다 해도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가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된다는 것. 이것을 집단적 독백이라고 한다. 경험적 실체가 같은 장에 있을 경우 그것이 어떤 개념의 토대와 이어지는 지를 설명하는 것은 가능한다. 몸에서 언어가 나왔기 때문이다. 경험의 실체를 같이함으로 공감각을 만들고 그공감각이 만들어내는 음성과 몸짓이 어떤 주파수와 파동함수에 속하며 어떤 글기호와 이어지는지 토대찾기가 가능해진다는 것이 내가 발견한 것이다.

 

전달하는 이와 전달받을 이가 같은 의식장에 있을 때 주파수가 같다고 하고 같은 파동함수를 생성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되는 공감각을 일으키는 것이다.복음은 너와 나의 주파수를 일치시키고 파동함수를 같이하여 경험의 실체를 하나로 하는 방법이다.


경험의 실체를 개념의 토대와 잇느냐 아니냐는 선택이다. 복음이 개념의 토대인 한자와 이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됨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내가 그렇게 공부하고 있기에...한자라는 토대에 개념을 세우지 못한다면 모래 위에 세운 성 같다. 한 세대는 지나가고 그 세대에 속한 것들도 지나가지만 영원히 있는 땅글자인 한자가 생명의 처소에서 열린 열매요 씨앗이다. 한자를 풀어야 비로소 개념이 땅에 뿌리를 내린 것인지 허공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있고 지나가는 하늘에 발을 두면공포恐怖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두려울 공 恐 두려워 할 포 怖.

恐은 안에 있는 두려움이고 怖는 바깥에 있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工凡心. . 心布다. 하늘과 땅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명의 맥동이다..가 한자가 정의하는 뜻이다. 工(장인)과 凡(무릇) 心(마음)을 경험하지 못함에서 오는 무지가 두려울 공이고, 바깥의 두려움은 베 布(천)에 씌여저 전해오는 글을 알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 무지의 다른 말이 두려움이다. 두려움이 있다면 무지속에 있다는 뜻이다. 무지를 밝혀 빛으로 채움하게되면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은 무지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네비게이션 같은 역할을 한다 모르기에 빛을 구하고 앎을 찾고 진리를 두드리지 않는가...복음은 한자와 연결해서 작동시켜야 도마서 114로기온이 보너스로 풀린다. 복음을 한자와 기초적으로 연동시켜라. 언어 토대를 얻어야 내가 가저온 생이지지...유전자에 새김하여 온 생의 씨를 뿌릴 수 있다 자기만의 전공 工은 하나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성서 66권에서도 자기만의 끌림이 있는 것이 있고..나로서는 구약에서는 시편이었고 도마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2016년. 나에게는 대변환의 해이다. 차원상승이 눈에 보이도록 일어난 해. 일어날 해. 예수의 재림이 나에게서 일어난 , 미륵이 나에게서 일어난 전해지는 모든 정보들은 개인에게 일어나는 경험의실체이어야지 집단으로 일어날 것이라는 허상은 버리라 나를 구원하는 자는 나다. 그 외에는 허상이다. 이것만을 기억하라. 내가 나를 구원하고자 할 때 지나가는 하늘에 살았던 이들의 파동함수가 돕는다는 것을...(2016년 7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