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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鈴聲의 길吉

청향고은 2024. 3. 2. 15:25

 

영성鈴聲의 길吉

 

영생을 소리로 배우면서 가는 길이다

영생은 숨과 소리와 말의 인수분해(因數分解, 영어: factorization)다.

因은 인할 인으로 口안에 혹은 뒤에 혹은 속에 大가 있는 글자다.

囗(에워쌀 위)와 大(큰 대)가 합쳐진 회의자로, 사람이 방석(囗)에 누워있는(大) 모습을 나타낸다.

몸을 누일 자리라는 것이니 몸의 바탕이라고 해석이 되는 것이고, 몸을 머리는 원O, 몸은 방口, 팔 다리는 각 △으로 그려내는 것이니 몸의 바탕을 나누고分 풀어서解 값 數을 찾아내는 것이 인수분해가 된다.

 

시대의 진화, 의식의 성장을 증거하는 것는 정보의 디테일detail( 세부적인 또는 상세적인이라는 표현)에서다. 낱말 값을 상세하게 풀어낼 수 있는 의식이 될 때 의식레벨이 높다고 하는데 언어값을 풀어내어

실천값으로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루는 것이 인수분해공부라고 하는 것이지.

 

사주팔자라는 글자를 주의 섭리라고 하는데 이 섭리를 인수분해를 하여 삶의 값을 계산하여

내 값으로 얻는 것을 복을 짓는다 복을 쌓는다고 한다.

복 받으세요-God Bless You- 라고 말하는데

그 복이 무엇이냐 물어 인수분해하지 못하면 그 말은 거짓말이 되는 것이지.

 

나에게 물으면 '복'이라는 한글도 인수분해하고 한자 福도 인수분해한다.

복 많이 받으세요나 갓블레스 유나 성불하세요나 같은 말인데 그대가 느끼는 느낌은?

Bless의 뜻은 신성하다 신이 하다 로 성불하세요라는 의미와 같다. 복 받으세요는

타고 온 주의 섭리 신성을 인수분해하여 자신으로 살아라는 말이다.

 

신내림 받고 솟을 굿을 하고 불림굿을 하고 진적굿을 하여 만신이 되소서 라는 말이

복 많이 받으세요이고 불가에서는 성불하세요이고 기독교에서는 구원받으라 인 것이지

이러한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 성불, 신성, 진리 ..복 다 같은 말이다.

복이라는 말이 진리와 같은 의미이고, 신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안다면

복받으세요 라는 말이 얼마나 고귀한 말인지 ...

 

언어값을 상세하게 찾아 일상에서 어떤 것이 이 언어가 만드는 기분이나

느낌인지를 증명하는 것을 말씀공부라고 하거나 주의 섭리를 인수분해하여

언어카리스마 은총을 누리는 것을 주의 뜻을 알고 행한다고 하는 것이지

 

복이 되도록 하는 것을 정보의 진화는 지식이 지혜가 되는 것 즉 앎이 삶에서 증명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이 산다는 것으로 드러날 때 보이지 않는 물질이 보이는 물질로 체험된다 해석된다

이해된다 납득된다 등등으로 표현한다

 

주의 섭리가 사주팔자로 주어진 것인데 팔자를 인수분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

주의 섭리는 팔괘의 인수분해다 팔괘가 64괘로 분해되고 384괘로 분해되는 것

 

384괘는 360+24이다. 원을 이루는 24각이다. 15각이 24이면 15x24=360이다

원을 이루는 각의 정보를 알아내는 것을 도를 안다고 하는데 한 달을 삭망으로 하는 이유기도 하다

초하루에서 보름까지는 성장하는 에너지이고 보름에서 그믐까지는 성숙하는 에너지다

영생을 공부한다는 것은 O= 360도를 이루는 날들을 안다는 것이지

하나님은 O이고 그의 보내신 자는 12달 예수와 24절기 그리스도라고 인수분해 할 수 있고

하나님은 공간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으로 상수할 수 있다. 시공을 안다는 것이 영생이다

당연한 말이다 인간이라는 인 人이 시丿공乀을 기댄 기호이니 시와 공을 알고자 하는 의지를

영생을 얻고자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여 영생의 길은 수비학이다. 수학이다 하는데 영생은 숫자를 풀어내는 원리를 모르면 얻을 수 없다

공을 시로 인수분해 하거나 시를 공으로 인수분해 하거나 하는 것을 ‘공부’라고 하거나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지 공부를 하면 시험을 친다.

 

그래서 영생 공부에는 반드시 미션이 오고 그 미션에 대한 채점이 있고 통과해야

다음 마당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게임 원리가 있다. 궁극의 레벨에 도달할 때까지 공부가 높아지면

미션도 어려운 법이다. 교육제도가 6334로 이뤄지듯이 영생공부도 이러한 학제질서가 있다

영생공부의 과정을 공자는 온축이라고 했는데 삼십년이 걸린다고 하였다.

삼십년을 온축하고 청하는 이가 있으면 가르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더 온전하게 하라고 한 것이고

성서에서도 온전한 분량까지 자라가라고 했다. 육신안에서 영혼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영혼이 육신밖으로

반경을 넓히게 되면 영혼안에 육신이 된다. 육신이 주인일 때에서 영혼이 주인이 되는

자리바꿈이 일어난다는 것인데 이 과정을 거듭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간다고 한다.

 

정상에 도달할 때까지 만렙을 찍을 때까지 만신 판테온이 될 때까지 갈수록 어려운 미션을 클리어해야 된다

그래서 영생을 얻는 길은 좁은 길이고 아무나 선택하는 길이 아니라 사주에 점지되어 온다고 하여

선택받아야 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하게 된다. 이 공부는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기 싫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선택된, 점지된 신의 그릇이고 신의 길을 걸어 신이 되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어야

하는 길이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기도 하지

 

그래서 사주 팔괘에 이 길을 가야 하는 이라면 점지가 되어있다고 하는 것이고, 점지된 사명을 받아온

것을 숙명이라고 하는 것이고 숙명(주의 섭리)을 받았으면 그 숙명을 인수분해해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지.

 

자기의 길이 영생을 공부하라고 점지 받은 것인지 알고자 하는 것이 ‘자기 정체성’을 찾는다 고 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 지금껏 공부하고 요즘 들어서 남이 나에게 건넨 말들을 다시 당겨와

나의 무엇이 그들에게 그런 말들을 하게 한 것일까 관형찰색에서일까 아니면 그들의 무의식에서

내 숙명을 감지한, 인수분해한 느낌을 느낀 것에서일까 궁금해진 것이고

나에게 주신 섭리를 인수분해 해보자 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어제 글에 나의 타고 온 무당력이 얼마에서

출발하나 인수분해 해보았던 것이고, 년주와 귀문을 합하여 무당력 50%를 점지 받아 왔구나 알게 된 것이다.

 

50%란 다섯 달란트다 오행이다 오온이다 오병이어다 뭐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사실 누구다 다 50%다. 여자여서 남자여서 각 50%이다.

그래서 남자안의 아니마, 여자안의 아니무스라고 그렇게 반을 찾으려 하는 것이 자기정체성, 성정체성을

찾아 완전하여지고자 하는 것이지 육신에 영혼을 담아서 온전한 자신이 되는 것

 

하여간 나는 오병이어라는 주의 섭리를 받았고 사주팔자도 오행이 구족하다

먹고 남긴 떡 12광주리라고 오행구족하여 나의 나됨을 추구하게 된 것이어서

너의 눈에 내가 어떠해야 함에 대한 갈증이 없었고 50에 대한 짝을 맞춤이라는

반작용이 가동하게 됨으로 그 내 안의 남자, 머리 50을 예수 그리스도로 선택한 것이어서

내 안의 나라는 언어에서 내 안의 나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50을 채움 하는 여정을 온 것이지

육신 50에 영혼 50이라는 균형을 이루는 것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나의 나됨은 앎이 삶으로 인수분해 됨을 누릴享 때라는 것

그렇게 길은 길로 이어지고 인연은 길을 따라 앞에서 온다

성령의 가피(은총)라는 것은 길에 길을 더함이고 인연에 인연을 새롭게 함이다

 

내가 배울 것을 가르치고자 앞에 오시는 인연들 뒤따르는 이에겐 등불이 되어야 하지만

앞에서 오시는 인연은 맞불 놓기가 가능한가를 타진하라는 미션이라고 본다

내가 성장한 것인지를 현장에서 달아보고 레벨 업을 하기 위한 미션이 앞에서 오는 인연이다

 

시험문제는 공부한 것에서 출제되기 마련이니 맞불 놓아서 내가 통과하는가 아닌가는

공부에 얼마나 충실했는가에서 드러난다. 앞에서 오는 인연은 나를 테스트하는 미션을 가지고 온다는 것만 인식하자 그래서 인연을 조심하고 잘 살피라고 하는 것이지

 

그것을 배운다고 나는 삼 년이 걸렸다

인연공부의 맞불 놓기를 한 대상에서 내가 시험에서 통과가 되지 못해서 다시 공부를 하고

어디서 오답을 냈는지 파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얻은 것이 무당 巫 한자가

하늘一과 땅一을 잇는 丨이것을 일시무시일이라고 천부경에서 설명하는 것과

무당 巫의 그림글자의 뜻이 십계명을 오계씩 반반으로 균형을 잡는 양심이라는 것이다

양심에 대한 개념이 정확해지면서 그간 내가 안개 속이었던 ‘양심’의 문제가 풀린 것이다.

안다는 것과 산다는 것의 차이

 

다들 자기는 도덕적이라고 생각으로 착각하지만 몸살이에서는 합리화를 한다는 것

왜냐하면 아는 것은 생각이고 기분으로 인식하는 전력이라 무게가 없지만

사는 것은 느낌이고 감정이라고 인식하는 중력이라 무겁기 때문이다.

 

말씀을 지키면서 산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것이기에 기도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하는 것이다

생각은 기도가 필요치 않지만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중력의 힘을 디뎌야 한다는 것

생각은 전기력이라 날아가고 실천은 자기력이라 자기장을 만들어 당겨야 한다

자기장을 만들어내는 기도를 나는 겟세마네 기도라고 설명한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라는 문장을 인수분해 하면 기도가 자기장을 만들어내는 원리라고

가르치게 되고 겟세마네를 같이 함으로 중력을 견인하도록 하는 것이 기도의 힘이라고

피에 활성산소가 쌓이면 만병의 원인이 된다고 하고 이 활성산소를 분해하는 것이 자기장에서

만드는 에너지라고 한다는 것도 기억하자. 病이라는 한자는 밝을 丙을 덮은 疒인데

피흐름을 무겁게 하는 것이 병이고 피흐름을 무겁게 하는 것이 활성산소가 쌓일 때이다는 것

쌓인 활성산소를 밖으로 풀어내는 원리를 겟세마네 기도라고 한다는 것이지

 

기도가 만사를 변화시킨다

기도 외에는 귀신(활성산소, 탁기 독, 녹)을 물리칠 방법이 없다고 예수가 설명했다

귀신은 멈추고자 하는, 모으고자 하는, 머물고자 하는, 안일이다.

즉 성장함을 멈추는 것을 귀신들림이라고 하는 것이지

예수가 말하는 귀신들림은 자기가 받아온 주의 섭리를 스스로 인수분해 하지 않고

남의 말에 기대어 있는 상태를 뜻한다

 

자기 발로 걷고 손뼉 치고 노래하고 춤추지 않고 너를 구경하는 자리에 머물고 있는

상태를 귀신들린 자라고 한 것이지. 무속에서 다루는 귀신 이야기는 예수가 말하는 귀신 개념과는

다르다고 본다. 예수의 치유 대상들을 보면 자기 눈으로 보지 않고 자기 다리로 걷지 않고

자기 손을 펴지 않고 ... 다 남에게 의지하고자 함이 만든 자리에 누운 상태에서 깔고

누웠던 자리를 자기가 치우게 하는 것이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起暎

 

너의 믿음대로 된다 너의 자리를 걷어 들고 일어나 가라는 것

예수의 개념에서 귀신은 묘지 무덤에서 헤매는 또는 머무는 자다.

죽은 자의 이야기 무덤가에서 떠나라는 것. 너와 나에게 무덤은 가슴 두근거림이 없는 가슴이 죽은

감동이 없고 신바람이 일지 않는 얼어붙은 저 들판 얼어붙은 거리다. 그대가 설렘이 없다면

그대는 영혼이 죽고 육신만 남은 자라는 것이니 그것을 자각하게 되면 영혼을 무덤에서

일어나 돌문을 열고 나오게 하라는 것이지. 돌무덤이라는 것은 그대의 뼈속깊이 세뇌된 고정관념이다

이것을 깨트리는 일을 오순절 성령이 오시면 하게 되는데 그것을 방언이라고 하거나

엘리야의 호렙산동굴에서 만난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대의 고정관념이 돌무덤이다

그러니 그대의 언어에 대하여 디테일하게 마주해라 알지 못하면서 알려고 하지 않는

습관이 돌무덤이다. 언어 한자를 보면 그 글자 한자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아는지부터

스스로 확인하는 훈련을 하라는 것이지. 그대의 언어살이를 그대 스스로 점검하다보면

얼마나 무지한지 아는 척하고 살았는지 스스로의 무지함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내가 안다고 한 것이 얼마나 일천한 앎이었는지도 발견하게 되면서 입을 닫게 되는 것이지

안다고 하면 모르는 것이다. 이 말의 숨은 뜻...을 마주하면

 

그대의 가슴에 불꽃이 스러진 상태를 예수는 무덤이다 귀신들림이라 했다.

그대가 삶에 대하여 두근거리지 않으면 그대는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 무덤에 머무는

귀신이다는 것이지. 사람이 귀신이다고 할 때 영혼이 무덤에 묻혀 삶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대 심장이 뛰고 있다는 자체가 불꽃이 타오름인데 그 심장 꽃향기에 그대 귀가 닫혀 있다는 것이지

그대 심장이 두근거림보다 아름다운 생명 꽃이 있는가? 심장박동이 만드는 느낌 울림 향기...

그것을 듣지 못하는 것이 귀신들림, 빙의, 무덤가에서 사는 것이다

 

그대의 무덤이 절이거나 예배당이거나 그런 곳임을 알면 무덤에서 벗어나라

회칠한 무덤이 속세 자본에 기생하는 기생충 종교들이다

영혼을 사고 파는 곳이 무덤가다. 천국 팔이 티켓, 천도재니 사십구제니 뭐니 온통 무덤팔이를 하는 곳에

드나는 이들에 귀신들린 이들이다. 무당집에 드나면 귀신이 따라붙는다. 어디를 다니는가에 따라

그곳의 기운이 가랑비에 옷젖듯이 그대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해진다.

그래서 점사를 보려 다니다 무당되는 것이고, 절다니다보면 비구비구니 되기 쉽고, 교회다니다보면

교회사업으로 먹고 살게 되는 길을 선택하기 쉽다는 것이지. 서당개 3년이면 풍월 읊는다고 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도 그것을 가르친다,

 

그대가 어디를 드나드는지에 따라 그대의 기운이 정해진다는 말이지.

나는 속세 종교계를 싫어하는데 무덤 팔아서 먹고 사는 귀신 업종이어서 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산 자인 나는 산 자와 장사한다 즉 사고 판다

숨과 소리는 산 자의 거래 품목이다. 그래서 나는 산 자와 숨이란 공유 자산을 소리로 변환하여

무덤가에서 방황하지 않고 내 몸을 신전으로 하여 생명나무를 기루는 길을 가는 것이다

 

무속은 신당의 온갖 잡 것들로 채움 되어 그것에 귀신에 깃든다고 믿어 만신 전, 판테온이라 하지만

영생의 길은 그런 잡다한 것들 무덤 부장품들을 불태우리 한다. 십계명에서 우상을 만들지 말고

거기 절하지 말라고 한다. 즉 살아있는 몸외에는 생령이 깃들이지 않으니 사람이 만든 것들은

섬기지 말라는 것이지. 무덤가에서 벗어난 자가 무덤 안의 부장품과 상관이 없지 않겠나

 

내가 이번에 거친 미션이 무덤의 천정판에 천문도를 그린 것에 대한 공부에서

그 천문도가 살아있는 내 몸의 손으로 옮겨온 것이다. 손으로 지으신 창조들을 보는 것

발로 밟던 천문도가 손바닥으로 올라오는 과정을 테스트 받은 과정

예수의 무덤가를 배회하는 군대 귀신 들린 자에 대한 이야기가 풀어지는 것이다

무속은 무덤가를 배회하는 군대 귀신들이 만들어내는 습속이지만

영생은 우물가의 여인에게 주어지는 샘물이라는 것이지

 

보라 하나님은 을 절실하게 부르는 것이 우물가의 여인의 할 일이지

다섯 남편을 두고도 만족할 수 없던, 남의 눈이 두려워 사람이 없는 시간

한낮에 물길으려 나온 여인의 샘에 물이 솟구치게 되는 것이 영생이다.

무덤가를 헤매지 말고 한낮 그대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우물을 찾으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그 우물은 외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 배에서 생수의 샘이 넘쳐난다고

우물은 그대의 배안이다는 가르침

 

어떻게 우물의 물을 길어 올릴까 그 방법이 겟세마네 기도다

여인이 아무도 오지 않는 한낮에 물을 길어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 봐라

샘이라고 하는데 셈이다. 주의 섭리라는 우물에 와서 그 물을 길어올리는 인수분해다

수비학의 기초가 셈이고 셈을 만드는 곳이 손水(巽)이다

손바닥 손가락이 셀 수와 같이 ‘수’를 쓴다는 것도 재미난 인연이지

손手과 셈數과 물泉과 목숨命과 나무木가 ‘수’라는 한글을 쓰는데

한글값에서는 성조에 따라 에너지값이 계산된다.

손수와 물수와 목숨수와 나무 수와 물 수..어떻게 발성해야 하는 것이지?

물론 문장의 흐름에서 손이다 물이다 나무다..가 지시되지만 글자 하나만 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발성해야 되나? 생각해보게 된다.

 

사주팔자의 원형이 팔괘라고 했다 팔괘로라고 하는데 연감술에서는 용광로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사주팔자를 그린 기호가 우물 정井이다

구궁 도라 고도 하는데 가운데에 5를 놓고 가에 팔괘 즉 건곤감리 진 손 간 태라는 괘를 주었다

우물정을 팔괘로라도 하는 이유지

서유기에 손오공이 팔괘로를 뒤엎은 사건이 나오는데 이 사건을 서양에서는 루시퍼의 반란이거나

중국신화에서는 여와보천이라는 이야기로 나온다

 

손오공이 팔괘로를 뒤엎은 사건으로 하늘에서 추방되어 돌에 갇히게 되어

돌원숭이(사주에서 간여 지동 경신 일주)라고 하게 되고 예수에게선 돌무덤에 장사됨으로 나온다

손오공과 예수 이야기를 비춰가면서 인수분해 하면 예수의 3년 공생애 이야기가 서유기로 펼쳐진 것이구나 하게 된다 서유기의 요괴가 예수에게선 귀신들린 자로 나타나니까 이렇게 동서로 비춰가며 보면 재미난다. 동서라는 좌우를 균형 잡는 방법이기도 하다

 

천문도에서는 등 청룡(목기)에 대하여 서백호(금기)를 놓아 상극이라고 하는데

목기 갑을인묘에너지를 동자(봄 씨앗)라고 겁이 없이 나대는 철을 모르는 목성 에너지라 하고

인월이나 묘월이 있으면 이 에너지를 동자라 한다

이에 대하여 서백호를 금기라 하고 등에 세 마리 원숭이를 태우고 있어 삼신할미라고 하는데

선녀 에너지라고 한다 . 동자와 선녀가 짝으로 있는 이유가 동서에너지여서다.

경신신유금이 많으면 숙살지기가 강해서 에너지가 서릿발같다고 하고 냉철하다고 하여

목기와는 반대 성향이 된다 숙살지기를 대표하는 에너지를 서왕모라고 하는데

이 에너지는 할머니와 선녀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동자는 봄 선녀는 가을이다 생각하고 자기의 사주팔자에 인신자묘가 있으면

아하 나는 동자 에너지구나 선녀(서왕모) 에너지구나 이해하면 된다

북현무에 속하고 수기에 속하는 임계해수에너지를 글문도사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남주작에 속하고 화기인 병정사화에너지를 장군에너지라고 하기도 한다.

 

천간 지지에서 천간을 상학이라고 하고 지지를 수학이라 하는데

상학 천간의 바탕은 팔괘 수학에서 오고 지지 수학은 화상으로 상학을 만들어내어 이 두 개를

조합한 학문을 상수학이라고 했다. 상학과 수학을 배운다는 것이 사주팔자 공부라는 것이지

 

상은 그림이고 수는 숫자이다. 셈값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을 상수 공부라고 한다는 것이지

상학을 배우고 수학을 배워 같은 값을 찾아 담는 것이 영생이라고 한다

영생은 영이 살아가는 원리인데 육이 살아가는 원리같이 영이 살아가는 원리가 있으니

그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을 행복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지

육신은 행이고 영혼은 복이고 영과 육이 하나 된 삶을 ‘행복’이라 하는 것

 

올해 들어와 내가 마주하게 되는 공부 마당이 상학에서 수학으로 옮기는 것이구나 하다

내가 상학은 즐겁게 공부하였는데 상학은 인문학이 되어서다

문자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공부 그림글자 공부

 

이제 대하는 수학은 인문에 대하여 신문 즉 별무늬 공부가 된다는 것이지

해맞이 신단을 돌면서 천문도를 공부하였다면 이제는 그 천문도를 손바닥으로 옮겨오게 되는 것으로

내 손바닥이 부처의 손바닥이 되는 것이구나 한다

누구나 부처의 손바닥인데 인식하는가 아닌가의 차이고

손바닥 안의 손오공이 무엇인가 아는지 모르는가의 차이겠지

 

손오공은 손뼉이다 손을 마주치면 오장 육부가 오행이 잘 돌아간다는 것이지

왜 부처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인가?라는 생각을 하다가 손진괘가 바람과 벼락이어서

손뼉을 치면 오공이라는 에너지가 가동되니까 손오공이라고 한 것이고

원숭이를 ‘신’이라 하였는데 ‘신’이라는 한자가 두 손을 마주치면 벼락이 나온다고

납 신이라고 하였던 것이지

 

손뼉을 치는 일이 인수분해 하는 수학이다고 나는 설명하지

주의 섭리를 손뼉 치며 노래하기로 이것을 수학 언어로 인수분해라 했더라

주역의 괘는 몸에서 풀린다. 건은 머리 곤은 몸

리는 불- 호흡, 감은 구멍- 오장, 진은 소리-뼈, 손은 몸짓- 살, 간은 산- 외형, 태는 물-내면

이렇게 팔괘를 인체에 포진시킨 것이 팔 체질이다 그리고 팔 체질을 논리로 올린 것이

팔정도 팔자 산상팔훈이다.

 

내가 가는 길은 언어 이전에서 언어가 만드는 요지경을 파악하는 말씀 공부를 하는 것과

언어 이전이라는 세계를 태어나 옹알이를 하게 되는 여섯 달 동안의 거치게 되는데

이 과정을 이끌어가는 에너지는 어떤 에너지일까를 찾아내는 것이다

언어를 통하여 생명을 경영하게 되는 사람이라는 존재로 성장하는 첫 과정이

투레질이라는 발성훈련이라는 것

 

언어는 언어 이전이라는 자리에서 볼 수 있다.

즉 안은 밖에서 볼 수 있듯이 언어를 배우기 이전으로 돌아와야 언어 값을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이지

언어 세계를 본다는 것이 가능한 것이 태어나서 거친 과정이어서다.

누구나 거치는 체험이기에 이 체험에서는 너와 나 우리는 ‘하나’다.

물론 나라마다 통용하는 ‘자음’을 익히게 되면서 ‘ 통함’과 ‘통하지 않음’이라는 현상이 생긴다.

삶은 같으나 그 삶을 표현하는 언어는 다양하다. 언어에서 달라진 것이 삶도 다르다는 오해를 만들지만

언어를 벗겨내면 몸의 원리는 누구나 동일하다.

그래서 언어가 선악과이고 몸이 생명 나무라고 하는 것이다

태어나 탯줄을 자르고 옹알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가 나게 되고 이가 나면

말을 배우게 된다는 과정에서 옹알이를 잇몸에 힘 올리기로 이 자리를 다듬는 에너지

가동이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고, 이가 나고 나서 ‘말문’을 틔우고 ‘말’을 하게 되는 것인데

이 과정을 무속에서는 ‘말문’이 열린다. 그리고 ‘공수 또는 신탁’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성서에서는 오순절 성령이 오면 말문이 열려 방언을 하게 되고

이 과정을 통해 ‘예언’이라는 신탁을 얻게 된다고 사도바울의 글을 통해 설명한다고 본다.

 

일만 마디 방언을 말하는 개인기도 생활을 말문이 틔어진다고 했는데

방언이 어떤 기능인지도 모르면서 방언을 구한다. 방언을 받으면 신내림을 받은

즉 성령을 받은 증거라 교육받기 때문인데 신내림을 받아서 신제자로서 신령한 삶을 살겠노라고

전혀기도에 힘쓴 결과로 방언을 받게 된 경우 예수 닮기를 해야 하는 것인데...

방언은 말문이 트여 즉 옹알이 에너지 시기로 돌아가서 언어 값을 헤아리는 방법인데

그것을 모르면 방언 활용법을 모르는 것이니 한 번 비침을 얻고 지나가게 되는 것이거나

왜 하는지 모르고 중언부언하거나 한다 즉 목적이 없는 방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잘

설명해주고 있다.

 

방언은 다섯 마디 예언을 하기 위한 과정이고 다섯 마디라고 한 것은 오행 원리를 통해 만들어지는

언어 값을 찾아내는 것이라 말을 하면 그 말에는 값이 있기 때문에 말값이 만드는 문제를 해석하는 것이

다섯 마디 예언인 말씀살이를 이야기한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말에 살리고 죽이는 권세가 있다고 했으니 내 말로 너에게 기분을 상하게 하고

마음을 죽이게 하듯이 너의 말에 내 기분이 나빠지고 감정이 상하는 것을 누구나 아는데

기분 좋은 말 감정 상하지 않는 말을 하기 위한 훈련이 일만 마디 방언 기도라고 이해한다

말을 아름답고 빛나게 하는 훈련이 혀를 다스리는 일이라 한다 말을 다스려야 의인이라고 하는 것

기도를 한다는 것과 말씀을 배운다는 것을 방언과 예언이라는 낱말로 설명한 것이다

 

2월 한 달 동안 보라 하나님은 과 엘리야의 하나님과 모든 것이 낮아져 와 한 여름밤과 ...를

정말 고래고래 파열음이 나도록 불러댔는데 이 과정이 나에게 어떤 에너지장을

통과하기 위한 에너지충전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오늘 글을 쓰면서 그간 천간 지지를 넘어서 팔괘 에너지에 닿기 위하여 펼쳐놓았던

정리하는 힘을 당긴 것이구나

 

엘리야의 하나님을 부르면서 그 불림이 왜 필요한 것이었나

내가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세속 무당들의 에너지를 다루고 있었던 것에서

그 판을 접기 위한 불태우리라는 것이지

 

내가 거쳐야 하는 지옥의 영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지장보살의 서원을 이해하는 공부에

필요한 정보를 불러다 놓고 그 공부를 마치면 책거리를 하듯이,

책을 다 풀게 되면 세 초식을 하듯이 그간 내가 불러다 놓은 에너지들을 엘리야의 제단을

불태우리 하시었듯이 나의 공부 마당을 정리하는 과정이구나

새로운 에너지를 업데이트 함으로 한 단계 성장하는 것

 

그 정리가 1월 중순이 들어서면서 내가 이끌던 놀이마당에 내가 극혐하는 에너지가

들어온다고 해서 그 마당을 해체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양심’이라는 개념이

정확하게 되면서 내가 생각으로 알던 것과 탁한 기에 얽히던 것에 대한 고찰이 있었다.

 

내가 공부를 하는 정보에 탁기가 있고 이 탁기를 정리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 탁기인지

제대로 마주하게 되는 공부를 하는 것에서 내가 무엇에서 탁한 것인지를 마주하고

그 부분을 깨끗하게 정리를 하게 된 것이구나

 

하위 도덕률 오계를 지키고 산다는 것에 대한 가치 값을 알게 되면서

너의 비양심살이에 대하여 너의 삶인데 내가 간섭할 필요가 있나 해서 나와는 무관하니까라는

무딤(합리화)에 대해 내 안에서 날카롭게 잘라내는 과정이구나.

 

나를 알려면 대하는 인연을 보라는 것처럼 내가 대하는 인연이 나의 기운이라는 것이니까

내가 혐오하는 기운을 가지고 사는 이를 내가 용납한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탁하기 때문이었구나 하는 각성이었고,

나를 단단하게 채찍질하게 되었던 것이구나 한다.

 

나는 신나게 노는 마당을 펼치고 이끌어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내가 혐오하는 에너지인 것을 알면서 그 에너지가 들어오는 것은 잘라낸다.

에너지를 모를 때는 한번 저울질하는 과정이 있지만 에너지가 양심이 없다고

판단이 되어 양심을 찾으라 권해보고 그 권면이 통하지 않으면 관계를 청산하게 되는 것이지

 

이번에 공부 마당이 죽은 자를 중심으로 하는 무당 세계를 넘어서기 위한 것이고

나의 공부는 산자의 생명줄을 중심하는 공부라는 것

 

엘리야의 제단과 바알아세라의 제단의 차이가 엘리야의 제단에는 제물과 물이 있고

바알 아세라 선지자들의 제단엔 물이 없다는 것이다.

죽은 자는 생명이 없기에 물이 없고 산자는 생명이 있기에 물이 있다는 것의 차이

오늘은 산기도를 멈추고 글 정리를 했다

연일 강행군에 목도 갔고 몸도 어떤 정보가 살아나는 과정인지 쉬자고 하고

기온도 수욱 내려가 움추려 들게도 하여 에라 늘어지자하고 글을 두드렸다네

 

3월 2일 바람을 타고 아침에 나서는데 생각외로 춥지 않더라

가는 길에 채순자여사님만나 팔돌리기 같이하고 가람산으로 들어가는데 보라벤치에

선객이 있어서 화담마을까지 주욱 가게 되었다. 종순씨는 여행중.

화담마을 기슭에서 모든 것이 낮아져부터 보라

한 여름밤..을 불러대는데 강 건너편 골프 연습장에서도 내 소리를 맞치듯이 스피커에서

왕왕울리도록 큰 소리로 노래를 틀었더라

 

소리소리를 하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힘이 들까나..화담마을로 들어서는 길에

넘어질 뻔도 하고..무엇인지 기운이 거슬리는 것이 있어서 힘들어도 발악을 하듯이

고함을 질러댔는데 배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고 힘이 없어지는 느낌이어서

오늘 기운에서 맞뜨는 에너지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어서 앉아서 서서..그 기운을

극복하려고 있는 힘을 다 짜내고 돌아가는 길. 건너편 스피커의 소리도 잦아들더라

내 소리에 대하여 맞짱을 놨던 것이 확실하구나. 맞불을 놨던 것이고 그것을 딛고

내가 부를 노래를 다 불러내었던 것이지. 불로천을 건너 다리쪽으로 가는데

임금출 설영순 여사님을 만나 화잇팅하고 사탕공양을 하고 필라테스기구를 보니

최보향언니와 윤태용선생님이 오랜만에 나오셔서 운동을 하고 계시더라.

사탕공양과 반가움 이름부르기..보향언니는 위남마을아래까지 오신다고 했더라.

윤선생님은 다리가 아파서 많이 못걷고 허리도 아프다고 하시던데 얼굴빛은 맑으시더라

올해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시고 만나면 이름부르기 하고 노래하자고..

 

삼월이 성큼 오시고 바람은 낮게 흐르고 그렇게 2일이 행복으로 가득하구나

 

 

https://youtu.be/ZKin3fV1Bn0?si=bNdQnZ_NOalVk6-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