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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冒險, ; adventure’

청향고은 2024. 1. 29. 12:07

어제 글 체험 경험 영험의 삼험三驗을 싸고 있는 보자기는 ‘모험冒險, ; adventure’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험adventure’이시다고도 설명한다.a/d/ven/ture. 모험개념을 알려면 한글, 한자 영어라는 삼합을 검토해봐야한다. 한글은 모는 초성 'ㅁ'과 중성'ㅗ'로 구성되고 험은 초성 'ㅎ'과 중성 'ㅓ'와 종성'ㅁ'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글이 길어지니까 넘기고 한자의 무릅쓸 冒에 험할 險으로 함함을 무릅쓴다 즉 리스크를 받아들인다는 것인데 무릅쓸 모 冒는 눈 목 덮인( ) 눈(目)으로 하는 것은? '덮인 눈으로' 즉 '뵈는 게 없는 상태로' 무엇을 하는 것은 '무릅씀'이라고 한다. 즉 눈을 감고 무엇을 하는 것이다 눈에 뵈지 않는 것을 잡으려 하는 행동을 모험이라고 하는 것이지. 영어 어드벤쳐를 보면 a/d/ven/ture 사단구조로 되어있는데 이 영어를 풀어보면 진리 ture가 태어나는 과정 ven(벤-아들, 본-낳다. 벤-姙)을 찾아내는 여정ad는 (Anno Domini) 기원 후를 이라고 본다. ad는 B.C(Before Christ)기원전과 쓰임을 같이하는데 기원전은 그리스도 이전의 이야기들을 나열하는 역사적인 시간이고 기원후는 그리스도 탄생이후에 생성된 이야기들을 기록한 정보라는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 아노 도미니는 좌표라는 것이고 한자로는 桓(푯말 환)이라고 한다. 내가 해석하는 것으로는 그대나 나의 탄생이전을 B.C라고 하고 그대와 내가 탄생한 생일을 A.D로 삼는다는 것이라고 그리고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한다면 B.C는 그대와 내가 태어난 해歲를 기준으로 한다면 A.D는 그대와 내가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그대 또는 내가 중심이 되어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도전하는 것이 '모험adventure’이다 라고 나는 설명을 하는 것이지. 그리고 冒자를 다시 봐라 얼핏보면 가로왈아래 눈목이라 눈으로 본 것을 가라사대라고 하는 글자인가? 착각할 수 있는데 멀 冂(경)이 부수다. 안에 두 二가 들어간 글자로 눈을 물건으로 가림을 뜻하는 글자로 會意字. '덮다, 무릅쓰다, 욕심내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눈을 물건으로 가렸다는 이것을 색안경을 쓰고 본 것을 말한다고 하는 말이 된다. 그리고 남의 들보를 보는 자기눈에 가시가 들었다는 말씀으로 나온다. 남의 들보를 본다는 것은 상대방의 감추고 싶은 약점을 들추어서 떠들어내는 것인데 남의 약점을 찌르는 것이 가시의 역할이라면 남의 들보를 찾아내고자 하는 그 의지는 찾고자 하는 나에게 있는 것이니 찾아내는 들보는 결국 내 자신의 약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너를 들추어서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약점을 찾아내고자하는 것이 자신의 가시를 확인하는 반작용이라는 것이고 이것을 기적수업에서는 '투사 鬪射- 자신의 성격, 감정, 행동 따위를 스스로 납득할 수 없거나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가지고 있을 경우에 그것을 다른 것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자신은 그렇지 아니하다고 생각하는 일. 또는 그런 방어 기제. 자신을 정당화하는 무의식적인 마음의 작용' 이라고 한다. 가장 쉬운 말로 설명하면 너에게서 나를 보게 되면 그것에서 시선을 돌리거나 너를 부정함으로 나를 방어하게 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너를 책망하거나 고치려 들거나 하는 행동으로 반드시 '옳은 소리'라 착각하는 잔소리를 너에게 하게 된다는 것이다. 너에게 잔소리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올라오면 그것이 그대의 가시니까 그 '가시'부터 마주하여 뽑으라고 하는 것이 '빤냐, 정견, 봄 영안'이라는 것이다. 너를 보는 것은 '나'다. 어떻게 보고 평가를 하더라도 그 봄과 평가는 '나'에게서 나오는 것임으로 '너'와는 상관이 없는데 너에게 투사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무의식은 너에 대한 나의 반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지.

가시라는 이 낱말도 假視구나 즉 거짓을 봄이다. 너를 보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투사된 나를 보는 것인데 나는 너를 본다고 착각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내면으로 돌이키라고 하는 것은 하기 쉽지 않은 모험이다. 너를 보고 말하던 그 모든 말들이 내가 나에대하여 색안경을 끼고 본 것이라는 것이니 안경을 벗고 너를 보면 용서라는 언어로 바뀐다는 것이다. 즉 너는 나의 무의식을 투사해주는 역할을 하는 거울일 뿐 너는 나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거울'일 뿐이라는 것이지. 너를 통해 내가 배운다고 하는 말을 하지만 너에게 투사한 나의 무의식을 내가 의식으로 인정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나에게서 나에게로 돌아온다. 그래서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게 되는 것이 너에 대하여 침묵하게 된다는 것이고 내가 나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를 용서한다고 하게 되는 행동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 즉 나에게 잔소리하기 숨을 감사하고 독송 찬성하는 훈련을 하라는 것이 된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기도는 모든 책임을 너에게 투사하던 습관에서 그런 습관을 기룬 나를 용서하는 훈련이다. 너를 탓해서 변화가 생기고 행복하고 성령충만할 수 있다면 너탓을 하라고 하셨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니 내면으로 돌이키라 남에게 투사하는 습관을 마주하여 그것을 용서함, 즉 내 탓으로 품에 안고 나를 행복하고 성령충만하도록 잔소리를 하라는 것이지 나에게 잔소리함이 기도라는 것이고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가 되는 것이지. 어느 날 너를 볼 때 맑고 밝고 아름다와 너에게 투사함이 온전해질 때 그때를 구원이라고 한다는 것이지.

모험이란 내가 해석하는 이야기로는 진리라는 것이 드러난 과정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것이고 예수를 전후로 나누는 좌표로 삼으니 예수 이후의 스토리들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풀어내는 것이지. 내가 태어나기전의 세상은 나와 멀리있는 것이니 그것에 투사를 하지 말고 내가 태어남으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내 이야기이니 나를 용서(용납)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모험이라고 하는 것이구나. 예수라는 전해오는 정보가 있지만 내 눈앞에는 없는 허상인데 허공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짓이기도 하지. 예수의 기록도 문서로 전해오는 것에 근거를 하고 붓다의 이야기도 문서를 딛고 오는 것이니, 카더라 통신이고 내가 투사하는 대상이지 용서의 대상은 아니다. 용서는 내가 나에게 할 수 있는 기적이라고 한다. 내가 나를 인정함, 내가 나를 품음, 내가 나를 어루만짐...내가 나를 사랑함을 한마디로 용서容恕)는 논어에 나오는 얘기다. 용(容, 얼굴 容)자는 여기서는 “담다”라는 뜻으로 쓰인 말로 용서는 서(恕)를 용(容)하는 것으로 영어 forgiveness와 같은 것이겠다. 恕를 용서할 서라고 하는데 용서를 담다는 말꼬리물기가 되는데 용서의 이 서는 女口心으로 이뤄진 한자로 마음과 말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한다. 즉 내 마음은 말로 나타난다는 것이지. 그래서 용서란 '말을 하는 내 얼굴에서 값이 정해진다는 것이지. 그래서 용서는 언어가 순화되고 정결하고 말을 하는 표정이 너그럽고 온유하다가 된다. 나는 내 얼굴표정을 알 수 없지만 너는 본다. 내 말투는 내가 듣는다. 그래서 내 말을 내가 다듬는 훈련이 기도잔소리가 된다는 것이고 내가 나를 용서하는 훈련이 기도라고 하는 것이다. 너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는 말에서 너가 평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을 '구원'이라고 한다는 것이고 '영험'이라고 하는 것이지. 뭐 내가 이렇게 해석하고 기도잔소리 훈련을 하는 것이지. 내가 나를 너에게 투사할 때는 언어가 거칠고 얼굴표정이 굳고 냉정했다는 것을 안다. 요즘은 너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내 어투를 본다. 얼굴표정이야 상대방이 보는 것이니 ..산 길에서 만나는 산객들에게 인사를 건네보면서 내 어투를 관찰한다. 부드러운가 맑고 경쾌한가 내가 들어도 기분이 좋을 리듬인가..

기원전B.C과 후A.D로 나누는 것을 나는 기원전을 구순口脣시대, 말이 정보의 힘이 되는 것이라고 보고 기원후를 수기手記시대라고 보는 것으로 말은 사라지고 말을 담았던 틀만 남은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이지 기원전의 구순이 살아있는 정보라면 기원후의 수기정보는 나는 이와같이 들었다는 것을 문자로 기록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기록된 險한 정보를 허공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일이 모험이라고 하게 되는 것이지.

險이라는 한자를 검색해서 어원을 찾아보는 것은 기초바탕공부다. 阝: 언덕 부 僉: 여러 첨 언덕(阝)이 여럿(僉) 있는 곳은? 언덕이 여럿 있는 곳은 지형이 '험함'이다. 험할 험 험함(함: 땅의 형세가 사납고 가파름

카더라통신을 따라가면 험한 꼴을 보는 것이 모험인데 내가 모험을 한다고 하는 것은 눈을 가린 물건을 벗기는 일을 하는 것이다. 눈가리개를 걷고 앞에 놓인 험한 곳을 간다는 것과 눈을 가리고 험한 길을 간다는 것은 얼마나 다를까 이지. 눈가리개를 하고 가는 험한 길과 눈가리개를 벗고 가는 험한 길의 차이. 인생사 누구에게나 사시사철 열두달이라는 險이 있다. 알고 가는 길은 즐겁고 평강이지만 모르고 가는 길은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다. 그래서 사주를 보고 팔자를 점치고 종교가 생기고 굿을 하고..모르기때문에 모름이 미신이라는 것을 만드는 출발이기때문에 모름을 '앎'으로 바꾸어가는 것을 변화라고 하거나 역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눈을 가렸던 가리개를 벗겨내면 내가 살아가는 곳, 험한 곳을 가면서 사시사철의 변화를 체험하고 경험하고 영험하면서 갈 수 있다는 것이 '모험'이란 글자의 '모冒무릅쓰다'가 가진 것이다. 눈가리개를 벗겨내라..그대의 눈을 가리는 것은 B.C의 정보다. 내가 태어나기전의 카더라를 태어난 내가 뒤집어쓰고 인생을 살아가면 '미신'을 따라가거나 '종교'를 따라가거나..남의 말 통신에 귀를 잡혀 살아간다.

태어난 내가 주인이 되어 ture를 마주하는 것이 모험이고 모험의 실천은 '기도'라고 나는 설명한다. 겟세마네 기도만큼 그대와 나의 허물을 벗기는 강력한 훈련이 없다고..

내가 세미와 만나 동굴기도를 하는 것은 구순정보 기원전이라면 그렇게 하고난 다음의 정보를 배우고 익힌 문자를 딛고 글로 수기하는 이 작업은 기록으로 험險을 체험驗한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글로 두드린 정보는 주파수와 파동이 살아있는 사실이 아니라, 경험담이 되는 것이고 이 글을 대하는 그대가 어떤 현장에서 어떤 일로서든 같은 겟세마네를 체험했다면 이 글에 공명이 생긴다는 것이지. 체험이 먼저이고 그 체험을 기록하여 전달하는 것이 경험담 간증이 되고 이 경험담 간증은 같은 체험에너지를 가진 이에게 공명, 하울링 영감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해하는가? 글은 흔적이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그리고 사실은 기록이나 무엇에 담아 전달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세미와 같이 소리를 할 때도 세미는 세미의 체험으로 나는 나의 체험으로 하는 것이어서 이것도 기록할 언어는 없다.

물론 동영상으로 녹화를 하여 다시보기를 할 수 있지만 다시 본다는 것과 그 현장을 되풀이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듯이..내가 노래를 부르면 그 때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지. 다시 하라고 하면 다시한 것은 이전의 것과는 같을 수가 없는 것이 생소리다. 녹화된 소리는 반복을 해도 변하지 않지만 생소리를 할 때 마다 변한다는 것이지. 모험은 기록을 구술로 바꾸는 작업이라고 나는 해석을 한다네 기원후에서 기원전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라고.. 매일 같은 노래를 부르지만 듣는 사람은 같은 노래네 하겠지만 부르는 나는 부를 때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 '감각感'覺'이라고 한다. 감각에서 육감, 예감 영감...이라는 언어가 파생하고 감의 정도를 각도라고 하여 '도수'라고 한다. 깨달음의 각도가 1도에서 360도까지 있고 이 도수를 사주팔자에서는 다양한 언어로 설명한다.

 

성서는 하나님의 창조놀이를 기록한 흔적이다고 나는 이해한다. 창조라는 모험을 하시고 자기모험의 평가를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한 것이다. 모험은 바쁠 때 하는 것이 아니라 무료하고 심심하고 할 일이 없을 때 시도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이챠크 벤토프라는 분은 우주심의 창조놀이라고 하는데 하나님 홀로 놀자니 심심해서 창조놀이라는 모험을 시작하신 것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가 되었다는 것이고 그 창조놀이의 끝판왕이 아담창조인데 아담이야기를 봐도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 자기사정을 생각해보니 아담의 심심함을 해결할 방법으로 ‘모험’을 소개하신 것이 ‘하와놀이’가 된 것이고 하와의 혼자있음 심심함에 등장하는 것이 선악과놀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대와 나의 하루도 하나님의 창조놀이의 연속선에 있다. 하나님이 그대와 나로 발현되어 끝나지 않은 퍼즐맞추기를 하시고 있다는 것이지. 이런 이야기가 부활 윤회 환생등등의 언어로 나타나는데 그대는 매일 부활하고 매일 환생하고 매일 윤회한다. 과거와 미래라는 언어안에 갇혀있는 것이지 그대와 내 몸은 늘 오늘을 산다.남들의 언어에서 벗어나 내 몸의 하루를 살펴봐라 붓다도 그리스도도 어느 누구라도 몸의 하루에서 벗어나 살았던 적은 없다. 몸을 벗어나 살았다면 기록으로 남긴 카더라 통신일 것이고..그래서 나는 그대도 나도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붓다이자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이어서 오늘도 창조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을 건강한 삶, 행복한 삶, 영생의 삶 청춘의 샘물을 마시고 살아가는 일상이라고 설명하는 것이지. 오늘을 창조하는 즐거움이 영생하는 즐거움이고 건강함이고 강건함이다.

 

하나님은 아담으로, 아담은 하와로, 하와는 선악과로 모험을 시도한 것이고 그 모험은 지금 그대와 나에게도 진행되는 일차원소융합을 26번 Fe로 끝낸 것에서, 26번을 바탕으로 이차융합으로 원소 109번까지 나타나는 마법같은 기적이 미라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지.

화학化學chemistry처럼 신비한 세계가 없다. chemistry의 원래 뜻은 화학이다. 물질의 구조, 성질, 변화, 응용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물질의 성질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relationship)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쓴다. 메리엄 웹스터 사전은 이런 chemistry를 ‘상호 간의 강력한 끌림, 애착, 공감 혹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조화를 이루거나 효과적인 상호작용’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케미스트리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대체로 처음 본 순간 생겨나는 본능적인 감정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케미스트리는 때로는 비슷한 점 때문에 생기기도 하고 서로 간의 차이 때문에 생겨날 수도 있다.

물리는 하늘을 생물은 사람을 설명하는 원리지만 화학은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사람이 되는 과정 즉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한 그 원리를 찾아내려는 시도 임으로 대표적인 ‘하나님의 창조놀이’로 하나님의 놀이터가 화학이 되는 것이다. 화학에는 반드시 수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화학과 수학이 짝이 된다. 내가 손뼉을 칠 때(화학) 하낫 둘 을 세알리라고 (수학)하는 이유다. 수리수리마하수리를 해도 좋고..

 

하늘과 사람(땅)은 객관정보다 내가 사람일 때 너는 땅이고 너가 사람일 때 내가 땅이다. 밟고 다니는 대지를 그대가 땅으로 인식한다면 관점을 바꾸라 밟는 땅이 하늘이다 하늘이 땅이고 땅이 하늘이라고 할 때 하늘은 대지 흙, 메탈, 마리아 마고, 물질의 대표적인 표현이다. 그래서 그대가 디디고 사는 삼라만상이 하늘이라고 인식한다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될 것이다. 내가 그러하였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면 보이는 별빛 그 별빛에 투사한 수 많은 이야기들은 그저 눈과 귀에 들리고 맺히는 것이지 손으로 ‘촉觸’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지 별빛을 만지려면 흙(물질 촉되는 것들)을 만지라. 모든이들이 같은 간증을 하듯이 흙을 만지면 평화롭다 시간을 넘어선다고 하는 천국이지 만져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같은 체온을 어루만짐이라고 하는 것이지. 즉 용서가 일어나는 현장이 내가 나를 어루만짐이라는 것이란다. 용서의 恕를 다시 풀면 如心이다. 같은 마음이다는 것인데 너와 내가 같은 마음을 부부일심동체라고 하는데 나는 생각과 감정이 하나로 서로 어우러지는 느낌이라고 설명한다. 머리와 몸이 하나가 된 체험이라고..그대의 생각을 그대의 마음에서 알아챌 때 그 때를 '용서'라고 하는 것이지. 기적수업의 대표적인 용어인데 '용서라는 용어도 For/giveness 머리생각을 마음감정에서 받아내는 것이라고..나만의 풀이.

 

봄이 오면 나물을 캐려고 다니면서 흙을 만진다. 봄도 아닌 겨울 언땅이 녹는 곳에서ㅗ 어제도 냉이를 캐려고 흙을 파면서 별빛이구나 감사하면서 언땅위로 흙 빛으로 숨은 냉이를 찾아내면서 별을 캐내듯 그리 우주탐사를 했다. 별은 내 가슴에 있다고 하지만 별은 흙이자 심장에서 가동하고 있는 피꽃이다 고 나는 설명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하늘별빛인 ‘땅’의 온유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움이 멀어지고 그렇게 땅빛에 대한 사랑이 멀어짐으로 사람이란 존재는 고립되고 불안 두려움 공포로 자기를 채우게 되어 그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을 너에게 투사하는 것이 습이 되어 사람을 보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공격적이되고...가 되는 이야기들을 보게 되고 듣게 된다는 것이지. 사건사고라는 투사의 원인은 자신이 자기를 용서하지 않기때문에 일어나는 자기혐오 증오 열등..이다. 너를 혐오한다는 것이 '나를 혐오한다는 것의 투사'로 해석될 때 내가 나를 다시봐서 나를 제대로 사랑하는 훈련을 할 수 있다. 너가 소중한 이유가 너는 나의 투사거나 용서를 체크할 수 있는 현자의 돌이기때문이다.

 

하나님은 흙이시다. 나도 흙으로 돌아간다. 하나님과 내가 같은 수준을 만들 때 그때를 평화롭다고 하는 것이지 흙을 사랑함이 나를 사랑함이다. 흙을 만지고 산다는 것이 건강한 행복이라는 것이고, 가난한 이들은 도심속에서 바쁘게 살아가고 부요로운 이들은 흙심속에서 게으른듯 여유롭게 살아간다. 흙은 손발에서 빛나는 빛이고 에너지다 무념무상을 이루려고 산속에 들어갈 필요가 없이 흙과 같이 하면 된다 깨달음은 달리 없다. 뭔가 있는 듯 미혹하는 것이 사깃꾼들의 밥벌이거나 앵벌이지. 외연에서 포장해주는 거룩하고 숭고하고 자랑스러운 이들이라는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다지 모범慕範을 삼고 싶은 이가 있는가 생각해보자. 자기를 사랑함에 아름다운 이는 누군가들에게 찬양과 경배와..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스스로 존재함을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 그것외에는 실천항목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대가 밟을 흙이 있고 나물이라도 캘 흙이 있다면 그것이 천지창조에너지를 만든다. 내가 그리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현실을 산다. 하나님은 심심休暇하셔서 모험을 하시고 지금도 나라는 ‘몸땅’에서 생명을 꽃피우는 창조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지. 그대가 내가 하나님의 모험이 낳은 그래서 나라는 정보는 ‘모험심’이라는 것을 존재가치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심심하다는 경지에서 모험이 시작된다 바쁘면 모험은 사치라고 하게 되는데 여유가 생기면 일상을 객관화해서 다른 각도에서 보면 어떻게 보이나 추구하게 되고 그것을 ‘모험’이라고 하는 것이지. 모험은 여태 관점을 버리고 다른 각도에서 보고자하는 수업이다. 고정된 관점을 버린다는 것이 선행된다는 것이지. 여태 가지고 있던 가치관을 버리고 새로운 각도에서 보는 시도, 이것을 나는 부활이라고 설명한다. 새로운 봄視, 觀, 見이 생기는 것이 부활이라고..이처럼 명확하고 멋진 해석이 있을까..

 

내가 손순희를 만나면서 그간 내가 나를 보던 관점을 업데이트를 하게 되었던 것은 ‘여성성’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이 없구나 하는 인식이다. 물론 그간 내가 공부한 것은 문자언어라는 ‘남성성’에서 발현된 정보였고 ‘여성성’이라는 이미지표현에 대한 지식은 없었던 것이어서 문화충격을 받았다고 내가 표현을 하였는데 나름대로 몸짓을 훈련함으로 여성력을 신장한다고 생각했던 그 생각이 무지한 생각이였구나 하였다는 것이고 내가 이제부터 모험을 할 영역이 ‘여성성- 세상을 아름다움이 구원하리라’를 도전해보자 하는 것이 되었다. 손순희라는 에너지가 나에게 준 신선한 충격은 사랑스러움과 천진난만함이라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하는가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것이겠다. 내가 가장 낮설어하는 여성성..과 친근해지기

남성성은 문자언어를 바탕으러 바벨탑을 건설한다면 여성성은 '피에타'라고 하듯이 죽은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 넓은 치마폭으로 받아내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낸다. 난자가 정자를 받아내는 것의 확장이라는 것이지. 마리아는 땅이고 아들은 하늘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아들을 치마폭에 받아내는 것이 여성성이고 이것을 한국 전통혼례에서는 폐백으로 이미지화했다. 치마를 펼치면 대추와 밤을 던지는 것

 

여자의 난자가 정자를 받는 일. 그것이 남자에게는 죽음이며 여자에게는 생명으로 부활시키는 일이되는 것임

남자로서 여자가 되는 것은 섹스를 통해 정자가 수정란이 되는 것이고 여자로서 남자가 되는 것은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는 과정을 겪음으로서다. 남자의 정자발출과 여자의 태아출산은 같은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남자의 여자의 자궁안에서의 출산이고, 보이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은 여자의 출산이다. 남자는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에서 출산을 하고 여자는 보이는 물질세계에서 출산을 한다 출산에 따른 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겠지. 남자가 출산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여자가 출산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인식을 하지만 여자의 출산은 남자의 출산이 선행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런 관점을 가질 때 그대는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이 그대앞에 그대에게 이러렀음을 알 수 있다.

출산을 놓고 해석을 하는 두 개의 관점이지 붓다는 정자의 출발자리를 묘법연화라 하였고 그리스도는 태아의 출산을 통하여 부활이라는 천국을 설하신 것이지. 미시적인 정보가 거시화된 정보로 나타날 때 그것을 남자의 여성화, 여자의 남성화라고 한 것이지 그외에 어떤 근거로 도마서 114장을 풀 수 있고 융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이해하며 들숨과 날숨의 정보를 체험 경험 영험으로 알 수 있겠는가?

 

들숨은 남성성이고 날숨은 여성성이다. 이것이 바탕이다 이 바탕에서 수많은 비유 은유 직유 들이 만들어져 내려오고 그런 정보에서 그대가 선택하거나 그대가 동의한 것이 그대의 가치관을 이루고 있고 그것을 고집하게 되면 그것을 에고ego라고 하게 된다.ego는 나를 하는 그리스어 (Εγώ)에서 온 말이다. 자아, 자부심, 자존심을 하는 영단어. 영어식 발음은 '이고'이다. 프로이트는 에고(ego)를 말을 타고 있는 사람에 비유했다. 여기서 말은 인간의 무의식적인 충동(이드, id)을 뜻하고 이 충동을 제어하려고 애쓰는 것이 에고라고 설명한다. 즉 에고란 인식과 행위의 주체가 되는 `자기 자신'이며 본능적 충동들을 규제하는 역할을 한 것. 프로이트의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이라는 문장에서 그대가 말을 동물 말로 생각하면 오류된 개념이다. 여기서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언어로 자기를 드러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라 이해를 할 때 무의식적인 충동을 제어하기위하여 말이 생긴 것이라 해석이 되는데 무의식을 발화시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에고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말을 함으로 자기안의 무의식을 억누른다는 것이 되는데 말을 제거함으로, 말위에서 세상을 다스리지 못한다고 말에서 내려서 무의식의 발화인 숨빛을 토하게 될 때 억눌렀기에 생긴 부작용들이 해제되는 용서가 일어난다는 것. 그래서 에고가 강한 사람은 무의식을 죄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지. 이것에서 인식의 오류가 생기는 것이고 무의식을 허물이라 원죄라 죄악이라 하게 되는 사상이 생겼고 성악설이 되는 것이지. 무의식은 선도 악도 아니 생명에너지의 흐름이다. 생명력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선이기도 하고 악이기도 하다고 나는 이해한다. 언어로 누른 무의식을 언어를 걷어내고 즉 말에서 내려 소리로 마주해봐라는 것이 내 권면이다. 그대의 무의식을 소리로 토해내보라...그러면 그대를 누르고 있는 '말'의 본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그래서 실상을 만나면 에고는 버려지게 된다는 것이고 내가 만난 실상은 들숨은 좃물로 남성에너지이고, 날숨은 봇불로 여성에너라는 것이다. 그대는 들숨과 날숨을 통해 세상을 걸어가는 생명하나님이다 이 실상위에 올려진 것은 문자언어로 카더라 통신이고 빛을 가져오는 자 루시퍼의 영역이다. 하나님은 숨빛이라는 하나만 가지시고 루시퍼는 99개의 문자언어 표현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루시퍼는 적대적이 아니라 숨과 빛으로 하나가 되어야 아름다운 관계인데 숨을 인식하지 못하고 빛만 잡으면 그때부터 분리가 시작되고 분리를 두번째마음亞心이라 하여 악惡이라 하였다. 하나를 나누면 둘이 된다. 그래서 악은 분리됨이다. 숨은 하나님이고 언어는 분리된 에너지다. 모음에서 자음이 나온다.

 

숨은 분리되지 않지만 숨을 딛고 만들어지는 것들은 만들어짐 자체로 분리이다. 분리됨을 선악이라 하였다는 것이지. 모험이라는 숨빛 범주안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분석하여 가름하게 되면 나오게 되는 이야기가 체험-육신의 정욕, 경험- 안목의 정욕, 영험- 이생의 자랑 으로 진선미라고도 하고 탐진치라고도 하고 삼시충이라고도 하고 삼위일체라고도 하고 등등으로 문자언어로 각색되어 물을 타고 흘러와 그대와 내 앞에 놓인 성배 컵 책 지식 모험이야기라고 하게 된다. 하나님은 숨빛이시다 그위에서 모음과 자음으로 분리가 되는 것이 선악 또는 음양 또는 생사...이분법이 되는 것이고 여기서 다시 사주로 팔자로 분화되어 나가는 것이지

 

모험이라는 행동이 가져오는 해석이 석삼극 삼험을 삼태극이라고도 하고 플랙탈원리라고도 하고 삼세판이라고도 하고 ...실재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 모험을 하면 그 결과값이 체험 경험 영험으로 정리가 된다는 것

그대의 생명활동은 누구라도 숨빛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같은 결과값이 나온다 그대와 내가 다른 것은 그것을 관조하는 차이다 즉 세밀도에서 다르다는 것이지 세밀도가 다르다고 생명활동이 다른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글을 쓴다고 너와 다른 하루를 살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 먹고 싸고 자고 방귀 뿌르릉 트림 커억 재채기에 기침에 ...그러한 몸의 현상을 한다. 다만 이런 현상을 감사하고 기적이라 인식하는 것이지. 우와 이렇게 신비할 수가..라는 느낌. 무의식인 하나님이 의식에서 알아채는 것. 비물질인 하나님 숨이 물질 몸에서 빛으로 드러남을 알 수 있음이니 내 모든 동작 행동들이 하나님의 누림이고 즐김이고 기쁨이라는 것이지. 몸이 없으면 누리거나 알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은 몸으로 발현하시셔 체험하는 놀이를 하시는 것.

 

생명활동에 대한 관찰도가 세밀하게 되면 될 수록 생명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가치값이 올바르게 정해진다는 것이어서 남의 카더라 통신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강점이 생긴다는 것. 그대가 어떤 모험을 시도하는가에서 가장 먼저 행동인 체험이 나오고 그 행동에 따른 에너지투자가 계산되고(경험) 투자된 에너지에 대한 결과(영험)가 나타난다는 것이 체험 경험 영험으로 언어화된다. 모험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도전이다 즉 의문을 풀어보고자 하는 생각을 ‘모험’이라고 본다 의심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까발려보려는 시도. 책으로든 현장으로든 사람과의 대화로든 사실확인을 하고자 하는 것 이 모험을 도마정신이라고 하는데 예수가 가장 사랑한 정신이 ‘도마정신’이다 고 도마서에선 말한다. 의심나면 그 의심을 밝혀 진위를 가리려는 것

 

내 글이 얼마나 디테일한지 정보를 만나면 시금석인 수정란까지 가슬러가서 비추임을 하고 그것에서 인정을 하게 되면 다시 정자에 속한 정보인가 난자에 속한 정보인가를 모험한다. 순희를 만나 내가 아... 내가 난자가 가진 정보에는 무지하구나 하는 확인이다. 소리세기에서 쇳소리나도록 즉 영령이 울리도록 공부한 것은 남성성 즉 정자에게서 발현하는 에너지라는 사실확인이다. 내게는 순희가 그렇게 사랑스럽고 귀엽고 부드럽고 천진하고 ..로 인지된 것이 내가 나를 순희에게 투사한 것이고 그것이 나에게로 돌아와 용서가 되었기에 생기는 느낌이라는 것이겠지.

 

보라 하나님은 은 ‘정자의 노래’ 다 그래서 그렇게 힘찬 에너지구나 . 그럼 ‘난자의 노래’ 무엇인가? 그이름에 영광을 이라고 나는 이해하는데 나는 아직 이 노래를 능수능란하게 불러내지 못하고 있어서 이 노래를 익히려고 마중물을 만들고 있다. 그 이름에 영광을 은 정자의 노래를 제대로 불러내어야 부를 수 있는 에너지구나 한다. 그런데 오늘 (29일) 봉무동 산길을 따라가는데 안에서 난자의 노래는 너가 이미 받아 부른 노래다라고 모든 것이 낮아져 바다로 모이고..라는 노래라고 하시더라. 이 노래 그날 바로 받아내려 곡과 가사를 붙인 것인데 그 때만큼 불러 내려고 해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다시 연습을 하고 있다. 이미 받아내린 난자의 노래가 있어서 그 노래의 품에 정자의 노래를 받아안은 것이라고...이런 신탁에 세미와 빛결에게 모든 것이 낮아져 바다로 모이고..를 연습해보라 권하고 나도 산길에서 세번을 내 소리를 들어가면서 불러댔다. 오늘도 세번을 불러볼 생각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정보를 대하고 이 정보의 실제값은 어떤 것일까? 일단 보라 하나님은 이라는 정자의 노래를 불러내려면 소릿통을 뚫고 소릿줄을 고주파로 올려 상하좌우에서 쇳소리 영음 방울소리가 나도록 훈련을 하여 소릿줄을 뚫었을 때 이 노래를 훈련하는 것이다

이 노래를 이해하게 되어야 정자만들기가 되고 그것을 익히고 나면 정자를 받아 안아야 하는 난자의 에너지장을 만들어야 하는데 난자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방법으로아리랑을 매겨서 물의 노래를 마당으로 해야 한다 청룡이 놀기위해선 물이 가득해야한다는 것이지 쇠소리가 나도록 주파수를 올리는 것은 용의 승천이고 정자의 창조인데 이 용은 물길을 타고 오르내리는 것이고 난자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이 아리랑이 되는 것이지. 모든 것이 낮아져 바다로 모이고...아리랑의 가스펠버젼이다 고 내가 설명한다

 

너의 카더라라는 이야기의 사실유무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게 될 때 그 궁즘증을 해결하고자 너의 카더라의 현장을 찾아가게 되는 것을 ‘모험심’이라고 하는 것이니까 ‘모험’은 내가 전해들은 정보에 대하여 진위를 가림 즉 심판을 함이라는 것이다.

나의 모험은 ‘성경’이였다. 태어나면서 성경이야기가 가풍이었고, 가문이고, 가훈이던, 환경에서 눈 뜨면 가장 먼저 대하던 것이 예배이고 기도이고 성경 독송이었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착각을 하던 습관이였다가 어느날 무조건 ‘믿음’이라고 하는데 나는 ‘믿음’에 과연 어떤 체험 경험 영험으로 증명되는 것인가? 바라는 것의 실상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란 성경의 믿음정의에서 ‘모험’을 시작한 것이겠다. 영생이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데 영생은 ‘앎’인데 그 앎은 어떤 수단을 통해 가능한가? 수단이 믿음이라는 것인데 믿음은 ?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을 추구하는 나는 종교교리 의식 의전들이 이 답을 해준다해도 내 체험의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정도는 되었기에 ‘살아계신...’에 주목하고 내 자신에게서 답을 찾기 시작하고 믿음이라는 수단을 예수의 모범 겟세마네를 따르기로 하였다는 것.

내 선택 믿음은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수단 겟세마네라는 것을 내가 따르기로 했고 그 선택을 지금도 내 믿음으로 삼고 있다 겟세마네 기도라는 믿음이 믿음을 빛결과 같이하고 이제는 세미와 같이한다. 셋이면 만족하지 않겠는가? 한다. 누군가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에는 ‘모험’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내가 늘 하던 행동을 하는 일도 모험이라고 하지 않는다 한번도 하지 않은 행동을 해보라 권고받으면 ‘해보는 시도’가 모험이니까

 

‘모험’은 ‘모범’이라는 앞선 간증이 있을 때 ‘용기’를 내서 도전을 할 수 있다. 간증이라는 것은 자신의 체험담으로 너에게 용기를 내어 모험을 하도록 보범을 보여주는 것이니까 간증자는 체험한 후기이고 간증을 듣는자에게는 체험할 예언이 되는 셈이다.

 

문갑식주필의 방송을 들으면 뉴스방송을 마치고 자신이 저승길에서 되돌아와 몸을 되살림하게 되는 체험을 놓고 방송을 듣는 이들에게 건강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제공하는데 잠도깨비 잠실맛사지 충민내과 그리고 여러가지 약들을 소개해주시고 소개받은 제품들을 사용한 이들의 사용후기도 소개해주시는데 본인의 체험을 바탕에 두고 소개를 하는 간증을 통해 문주필님과 비슷한 증상에서 고생하시던 분들이 모험(제품을 구입)을 하고 체험(제품을 사용)하여 다시 간증을 보냄으로 제품의 영험을 보증하는 간증을 보냄으로 병증으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의심’을 완화시켜 제품을 구입하거나 치료를 받거나 약을 복용하도록 하여 육체의 치유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지

 

나는 나와같은 모험의지가 있는 이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길을 잃었을 때 겟세마네 기도로 길을 내어 내가 지금을 창조하는 하루를 살 듯이 너도 세상에서 길을 잃어 방황할 때 겟세마네 기도를 소개하고 같이하여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도록 하는 것. 한 사람의 구원이 온 우주의 구원이라고

 

나는 내 길을 그렇게 걸어왔고 걷고 걸어갈 것이다. 세상에는 길이 없었고 내가 가고 걷고 싶은 길은 영생이었으니 영생의 샘에서 물을 길을 수 있게 된 지금 너에게 영생의 샘을 나눠마시자고 하지 않겠는가?

 

어제 열시가 넘어서 봉무동으로 갔다 가는 길에 고니들이 42마리 놀고 있는 풍경

산자락 벤치에서 자작곡 가스펠을 부르고 화담마을을 돌아 오는 길 찬란한 주의 영광이 만드는 물강 길어귀에서 보라 하나님을 을 제멋에 겨워 불러대는데 지나가시던 분이 손뼉을 쳐주시고 말을 건넸는데 내 목소리가 너무나 듣기 좋고 시원하다고 그래서 득음을 하려고 산을 다니면서 기도를 훈련중이라 했다 그리고 선생님도 고함 한 번 질러보세요 했더니 나더러 같이 하자고 해서 같이 지르는데 참 짱짱하시더라. 나의 뻔뻔함은 처음보는 이라도 처음이라는 것도 세월이라는 것도 단번에 날려버리는 능력이다. 소리를 한번 내놓아보시라 그러면 자신있는 이는 고함을 지르고(산에서 만난 김윤현선생님과도 메호와 야호와 이름부르기를 같이하듯이 나이불문하고 나는 소리부터 질러보자..하고 직설적으로 들어간다)

세월을 힘으로 사는 이들은 목소리가 힘있고 세월을 밥으로 사는 이들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거나 남들이 보면 욕한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 결국에는 소리를 내지 못한다. 목소리는 세상의 무엇으로 대신하거나 기룰 수 없는 내면의 힘이다

 

그래서 나는 세월을 잡아 힘으로 삼는 방법으로 고함을 지르라고 하는 것이지

이야기가 오가는데 다른게 있겠는가? 소리 매기고 손뼉치기 너와 나의 세월이 그렇게 힘으로 창조되는 것

내 마중소리에 펄쩍펄쩍 돋움닫기처럼 뛰시는데 신명이 오르셨던가 한다.

 

자기 이야기를 하시는데 나야 별로 관심이 없고 이 분의 성량에 관심이 있어서 혼자 한번 내지르시라 했더니 나더러 혼자 해보라 하시길래 나야 혼자 지르고 다니는 훈련파인데 .. 한 자락 내질었더니 자기는 혼자는 안된다고 그래서 같이 내지르고 속이 다 개운하다 너무나 좋다 감사하다 하시더라. 나야 이렇게 뻔치확장하네 하는 즐거움 그렇게 해맏이에서 풀어낼 신기를 봉무동에서 풀어낸 것이구나

해맏이에서 내가 마중물로 쓸 에너지를 봉무동에서 쓰야 하는 그런 인연 그 분은 고스톱치려 경노당 가신다고 하시더라 나는 냉이 캐야 한다고 헤어지고 한줌 냉이를 캐서 돌아오는 길. 이 길을 다니면 이젠 내 에너지가 가득해서 정겹다 그렇게 미친년처럼 소리를 가르치고 같이하고 한 체험들이 나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이 되게 하는 것

 

훠이 훠이 홀로 다녀 자유롭고 너와 같이 겟세마네로 믿음을 기루어서 감사하고..꿈을 두드린 글에 경자가 견해를 보내왔는데 참고해야 겠구나 한다

 

경자의 선녀같이 우아하고 너그러움이 좋고 나의 천지도 모르고 까불대는 활발함이 좋다. 경자는 음력 4월 26일생, 순희는 4월 27일생, 윤영인 음력 5월 13일생, 강 길의 친구 옥순씨는 음력 5월 21일생, 용자는 음력 5월 20일 생 이렇게 사오방합이어서인지 잘도 논다. 월주가 방합이라는 것은 같은 계절이라는 것이지 빛결도 양력 6월 24일이어서 사오방합이라 서로가 잘통한다 같은 계절 같은 달에 온다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가 한다

 

방합이라는 것을 계절합이라 하는데 여름에 온 이들은 정직해야 한다는 책임에 있다. 여름에너지는 다 열어내는 것이어서 숨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특히 오화는 정직함이 재산이다 그림자 없는 정오자리가 오화임으로 내가 나의 이 천둥벌거숭이같은 이 에너지가 오화월주여서구나 이해하고나서 타고 온 이 에너지 감사하고 더욱 확장하여 신록푸르자 한다. 내가 이러고 다니는 것이 내 일이다고 엇그제 마주친 재희가 말하더라 재희는 음력 6월 8일 생으로 오미방합. 노래교실 다니면서 목청 뚫는다고 이제 내가 소릿통 뚫어야 한다는 말을 체험하는갑더라. 같이 다니면서 소리뚫기를 했는데 가요교실 고고장구를 하면서 목소리에 대하여 철학이 생긴 모냥

 

다음에 만나면 소리한번 하자. 나는 사람에게 어이 소리 한번 해보자 라고 한다 그래서 그러자 하면 겟세마네를 시전하고 그냥 놀자라는 것은 사양한다. 겟세마네를 기루어 하고자 하는 것이 보라 하나님은 을 자유자재로 부를 수 있는 레벨이 되게 하는 것 소리를 뚫어 용천혈을 파서 깊고 깊은 옹달샘, 청춘의 샘이 되도록 샘물파기를 하는 훈련이 소리선인데 내가 마중물을 부으면 그것을 딛고 놀자판으로 가는 것은 내 지향점이 아니다. 너도 샘을 파서 청춘의 샘을 길어내어라고 마중물을 붓는 것이지..그렇게 나는 놀자판의 마중물로도 내 소리력을 활용해봤더라. 그러면서 그 중에서 상근기가 있는가 찾아내려하는 것이고 내가 상근기가 될 재목인가를 찾으려 하는 것은 용천혈을 열어서 길어내는 샘물이 성가聖歌로 나타날 수 있는가를 살핀다는 것이지 속가를 부르는 것에 소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성가를 부르는 것에 소리에너지를 씀으로 영생을 얻어 천국의 삶을 향유하고자 하는 그런 이를 찾으려 다니는 것이지.

빛결과 같이 나선 이 길에서 세미를 찾아내어서 같이 성가를 부르게 되도록 소리샘을 뚫게 된 세월이 있고 보라, 하나님을 부르고 나면 모든 것이 낮아져..를 부르라고 하게 되는 청룡잡기가 되는 시절인연이 오는 것이지. 모든 것은 낮아져 바다로 모이고 거기에 깃드는 하늘...이 문장은 지몽 선생님이 내게 건네신 문장이다. 여기에 내 세월을 올려 밝게 개였던 모든 것 하방낙하하라고 가을바람이 붑니다. 허공으로 울리는 소리 공곡전승허당습청 온땅을 울리는 피의 발화여.

 

가스펠의 본 뜻은 철자하기이다. 즉 하나님의 목에 단 방울소리를 듣고 그 서리울림을 피에 적셔 땅에 떨어지게 하여 경험이 되게 하는 것이지 예수의 체험과 나의 체험이 하나가 되는 방법이라는 것 땅아래서 탑이 올라와 법화경의 영광을 증명해주는 것이 가스펠이라 나는 생각한다. 가스펠을 부르면 생기는 것이 영험 영검 영력 영감 영권 영생...등으로 성서에서는 구성령의 열매라 하였다. 아홉가지 은사를 겟세마네에서 받아 아홉가지 열매를 일상에서 맛보고 누리는 것. 기도를 제대로 하기위해선 겟세마네기도를 배워야 한다 성령은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신다 당연하지 않겠나. 영이신 성령이 숨이 소리가 되는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

https://youtu.be/f1WZntBscz8?si=dEMuWpzyPHmxYKZ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