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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수업을 읽고 후기

청향고은 2024. 1. 25. 10:51

기적수업을 읽고 후기

 2024년 1월 10일 오후 5시이후에 배송된 책을 잡고 교과서 705페이지는 독송을 하고

그 이후의 텍스트들은 간서를 해서 일독을 끝낸 것이 1월 24일 오후 7시 20분이다

일단 읽었고 보았으니 후기를 남기는 것이 또하나의 배움이리라 생각하는 것이지

독후감을 씀으로 책의 정보를 자신의 것으로 추려보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정보를 간추리는 능력을 기루게 되는 것이지. 글을 쓴다는 것은 그렇게 훈련되는 능력이다. 글도 반복을 통하여 창조가 일어나는 것이니까 처음엔 남의 글을 사경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고 점차 일기를 쓰고 독후감을 쓰고 그리고 자기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글쓰기의 진화다. 글의 열매는 자기이야기다. 작가들의 꿈은 자기를 기술하는 것이고 어떤 자기를 기술해야하는지를 연마하는 것이 소설이든지 수필이든지...등등의 글로 나타나지만 결국 자기안의 자기소리를 토해내고자하는 과정이 된다는 것이지. 자기이야기는 글로 나타나지 못한다. 내 안의 이야기가 글로 두드려진다면 그것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그림자잡기놀이기 때문이다. 자기안의 소리를 꺼내는 방법은 글이 아니라 노래고 소리이다. 그리하여 글의 열매는 소리에서 맺히고 향기를 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고 불경에서는 법화경으로 게송으로 읊었다고 나온다. 게송이라는 것은 소리, 노래로 읊조렸다는 것이다. 사경보다 독경을 하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성서공부보다 찬송을 부르라고 하는 이유다. 찬송가사가 성서의 압축이기때문이다 라고 나는 설명한다. 찬송讚誦(頌)은 자기에게 잔소리를 하는 훈련을 하다가 소리를 기루어 가장 힘센소리 된소리를 하는 방법이다. 내가 다른 노래들을 부르지만 찬송을 부르게 되는 때는 전신의 힘을 당겨서 극진하게 불러야 한다는 새김을 훈련했기에 찬송만큼은 애국가처럼 전심전력으로 부른다. 그래서 찬송은 힘이 있고 아름답고 울림이 강하며 하울링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지. 주파수와 파동의 힘을 가장 높고 깊고 넓고 길게 활용하는 훈련이 찬송하기다.

 

이사야 12장 2절의 문장으로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인데 나는 이 가사도 내게 맞춰서 개사를 해서 부른다. 구약 이사야의 언어인 여호와를 나는 성령님은 으로 바꾼다는 것이지. 신약의 언어로 바꿔서 부르는 것이 진화이든지 확장이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지. 나는 노래를 부를 때 부정적인 에너지가사가 있으면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꿔서 부른다. 가사는 내가 붙이는 창조놀이와 리듬을 변곡하는 발상놀이를 하는 것이지. 주어진 곡 가사에 묶이지 않고 개사를 하거나 변곡을 하는 것이지...그게 나의 자유스러움이고 창조발상이고 나만의 노래이고 아름다움이라고 역설하는 것이고

 

아래 영상은 내가 부르는 노래 ..https://youtu.be/fbwbT13VaJQ?si=pT395AoO8skhCPC5

 

 

기적수업은 5의 계시라고 하는 유란시아가 지수화풍, 천문사신도를 '토-에테르'의 관점에서 설명을 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를 하고 있는데 4중구조를 나는 사단으로 또는 사주라고 이해를 하게 된다는 것이지. 사주의 통합을 5토라고 하는 것이어서 제 5의 계시라고 한다는 것이지. 4단의 구조를 나는 난자의 구조라고 이해한다. 물론 4부에서 다루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있다. 왜 지성소에 대제사장이 들어갈 때 옷자락에 방울을 달았을까라는 궁금증이 무속에서 굿거리를 할 때 방울과 부채를 드는 이유와 같은 것이라는 이해가 되었다. 방울은 소리울림 쇳소리 가장 높은 고주파를 발생하는 도구이고 부채는 접었다 펼치기도 하고 바람을 만들어내는 도구이기도 한데 지성소안에서 대제사장이 신탁을 받았던 전통이 지성소휘막을 뜻하는 부채이고 신탁을 상징하는 방울이 되어 무구로서 내림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 예수가 지성소 휘막을 가르시어 지성소안과 밖을 없애고 누구든지 신의 음성 방울소리의 비밀이 복음인데, 방울소리가 외연에서 울리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고함쳐 터져내게 되면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된다는 신탁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발화된다는 것을 가르치심이고 그것을 내 배에서 생수의 샘이 넘쳐난다고 그것을 복음이라고 하였다는 것이지. 얼마 전에 무구인 방울을 구입을 했다. 1.4cm백개를 샀는데 오색실도 사서 오십개의 방을을 꿴 팔목방울대와 48개를 꿴 방울대를 만들었고 팔찌로 두개의 방울을 꿰어서 팔목에 차고 있다. 아주 작은 찰랑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오래 전에 지붕아래 풍경을 달아서 바람이 지나가면 딸랑거리도록 했는데 어느 날 소리가 별로 나지 않아서 살펴보니 동어는 어디론가 사라졌더라. 그래서 동어를 달았던 추가 가끔 소리를 내는 것..그런데 팔목에 구슬 두개를 단 오색실로 짠 팔찌를 만들어끼고는 왜 두개의 구슬을 달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불알 두쪽을 상징하는 것이고 오색실은 오행을 뜻하는 것이고 오색실로 방울을 하나 덧셈한 것은 여자의 물샘을 뜻하는 것이라고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남자로서 여자가 된자, 여자로서 남자가 된자의 나의 증명법이 방울을 오색실에 꿰어 팔목방울대로 딸랑이는 것이라고..감정공부를 할 때는 안에서 밖으로 토해내는 공부라 외연의 것들이 안의 소리통을 막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벗겨내는 작업이어서 외연의 도구들을 활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게 되었는데 물공부 즉 외연에서 들어와 다시 외연으로 나가는 물색공부에서는 물색이 만들어내는 에너지의 물화를 활용하는 공부가 된다는 것이구나..바깥 무속의 무구들이 왜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것이지. 방울은 남자의 에너지를 의미하는 것이고 물색沕穡(沕-아득할 물, 穡-거들 색)정보이다. 부채扇는 여자의 에너지를 의미하는 것이고 불빛정보다. 접었다 펴고 바람을 일으키는 ..치맛바람이라고 하듯이 부채는 치마를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스카프를 넓게 만들어 그 스카프를 부채이자 바람몰이이자 정보를 받아내는 그릇이라 설명을 하더라는 것이지. 하여간 방울은 남자의 물색에너지를 부채는 여자의 불꽃에너지를 상징하는 것이고 동맥과 정맥을 의미하며 케두세우스의 지팡이라고도 하는 것이고 물과 불이라고 하는 것이니 그대들아 이제는 무속의 방울과 부채가 그대의 동맥과 정맥이며 신경과 혈관이라는 구체적인 지식을 탑재해라. 그러면 피가 만드는 문제는 부채로 부쳐내면 되고 물이 만들어내는 문제는 방울을 흔들면 된다는 이런 치유법을 익혀라. 손뼉치며 하낫 둘 세알리는 훈련을 하면 그대의 혈관과 신경이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돈도 안들고 어디를 가서 배워야할 필요도 없고 그대가 있는 자리에서 그대의 의지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지. 물론 너와 내가 같이하여 손뼉치고 수를 세면 그 신남이 더 활발발해지고 신바람이 일렁인다는 것이지 그래서 두세사람이 모여 손뼉치고 하낫 둘 수를 세면 그 가운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고 하는 것이다. 해봐라..해보면 확인할 수 있다. 내가 길을 다니면서 가르치는 건강법이다. 사람이 건강하다는 것은 신나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웃음이 넘친다는 것이다. 법화는 정자의 정보다. 기적수업은 난자의 정보다 내가 그렇게 가름한다. 법화는 법의 꽃이라고 하는 것이니 남자는 법이고 그 꽃은 정자로 나타나는 것이지. 그리고 그 법화가 난자에 뿌리를 내리면 기적이 일어나 생명이 창조되고 그것을 기적수업이라고 하는 것이라 푼다. 奇蹟(miracle, 미라클이라고 하는데 일전 글에 米羅張이라 한자를 가져왔더라는 것이지 작은 것에점점 확장되어 완전함으로 드러난다는 것. 정자가 난자에서 자라 몸으로 태어남이 가장 놀라운 기적이지. 미라클이 마이클이라고 하고 예수의 이름이라고 도 하는데 이 땅에 태어나는 누구라도 마이클이고 미라클이고 예수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된다. 종교상관없이 기적을 통하여 이 땅에 오는 것이라고..그것이 예수가 그대와 나에게 설명하는 기적이고 복음이고 영생이며 구원이다. 일단 이렇게 요약을 먼저 하고 풀어가보자

 

법화경은 정자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고 기적수업은 난자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다고 기억하자. 유란시아서는 동양의 법화경을 서양의 관점에서 펼쳐놓은 남자의 정보라고 보게 되는데 기적수업은 4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정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난자의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유란시아가 나에게는 깊고 깊은 감동과 환희를 주었던 것은 사실이고 지금도 그러한 감사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정보를 내가 어떻게 활용해서 성육신이 될 수 있게 할 것인가에서는 궁구를 하게 되었는데 유란시아서에도 '복음'의 실체가 감추어져있고, 기적수업에도 '겟세마네원리'가 감추어져 있어서 내가 찾아내지 않으면 유북이나 기적수업도 하나의 문장으로 끝나고 말고 그간 자기가 공부한 크기만큼 지적인 즐거움을 맛보는 혼자만의 기쁨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게 되는 너와 나눔하기는 쉽지 않는 정보라는 것이지. 나는 너와 내가 언제 어디서나 누구라도 나눌 수 있는 너와 내가 같은 하나님을 전도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 원리를 찾아내고자 공부를 했는데 그 원리가 겟세마네기도라고 알려지지만 나는 소리공부라고 하게 되는데 손뼉치고 수를 세알리라 같이 손뼉치고 수를 세다보면 신명 성령이 같이하여 그 판이 얼마나 흥겨워지고 신나고 행복하고 기쁨으로 찬란해지는 지를 내가 매일 반복하여 체험하기때문이다. 누구라도 같이하여 즐거워하는 것이 복음이지. 라는 생각

 

유란시아는 법화경의 서양식전개라면 기적수업은 남들이 소개한 예수를 예수 자신이 직접 해명하고 자기의 ‘천국’을 설명하는 예수가 풀어내는 예수이야기라고 나는 이해하였다. 예수가 예수를 설명하는 이야기인데 그대도 나도 미라클 마이클이라고 기적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이 책을 대한다면 예수 이야기가 내 이야기라고 하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그것이 이상한 것이지.

 

내가 성령에게 배운 가르침과 기적수업의 가르침을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성령이라는 이 낱말을 그대가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허상성령이 생긴다는 것도 알아야 하는데 허상성령을 사탄Satan(Sa를 思라고 탄을 呑 삼킬 탄으로 설명해보는데 생각을 발화하지 않고 삼켜버리는 것을 사탄이라고 한다는 것, 성령은 드러나게 빛나게 토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라면 사탄은 감추게 하고 숨기게 하고 누르는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지)이라고 한다는 정도는 알 것이다. 허상사탄은 ‘말’밖에 없는 정보이고 성령은 ‘말을 있게 하는 숨’에 대한 지식을 갖춘 정보라고 나는 해석한다 

 

‘말’밖에 없는 정보를 ‘에고ego’나 ‘육체’라고 하는 것이고 성령지식을 갖춘 정보를 ‘하나님의 아들 또는 형제’라고 한다는 것으로 기적수업을 읽을 때는 항상 성령은 ‘숨빛’이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독송할 것을 권한다. 숨이 하나님이고 숨을 딛고 나오는 ‘말-로고스Logos’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라는 것을 딛고 읽어야 현란한 문장들을 헷갈리지 않고 가름할 수 있다. 정자가 난자를 만나 몸이라는 생명을 창조하여 태어나게 한 그 생명을 성자 예수라고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너무 멀리 가지말고 그대와 나의 일상 현실에서 확인하고 만질 수 있는 실재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지. 일상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기적이고 이런 기적외의 다른 기적은 허상이고 망상이고 상상이고 착각이고 마술이라고 하는 것이지  

 

숨은 외부에서 내면으로 들어갔다가 내면에서 외부로 나가는 것이고 말은 내면에서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안으로 돌아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 패턴을 다비드의 별 육망성이라고 하거나 8이라고 하거나 그렇게 말을 한다. 들어오고 나가고에서 가운데 만나는 접점자리를 '마음'이라고 한 것이다.

 

숨은 물을 딛고 드나들며, 말은 피를 딛고 드나든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기적수업의 ‘몸’을 부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걷어낼 수 있다. 기적수업에서 찾아내어야 하는 것은 '땀(물)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불)이 되는 원리'다. 손뼉을 치는 것은 부채질을 하는 것이고 수를 세알리는 것은 방울을 울리는 것이다. 무당이 별게 아니라 피의 문제 물의 문제를 풀어내는 힘을 다루는 기술자라는 것이고 그런 기술을 생업으로 하여 살아가는 이들이다. 이전에는 무당과 의사가 같은 에너지였다. 즉 치유하는 에너지라고 하는 것이지.

 

물은 이성을, 피는 감정을 형성하는 바탕임으로 하나님의 뜻은 하늘 이성이라고 하고, 아들의 마음을 땅 감정이라고 하여 하나님안에 아들이 감싸여져 있다고 하는 것이지. 다시 내 언어로 설명하자면 하늘아버지는 물이고 아들 예수는 피라는 것이고 부정모혈이라는 낱말로 ‘나’를 존재케하는 근원을 그렇게 펼친 것이다. 기적수업 넉자를 ‘부정모혈’로 바꾸면 된다. 이전에 유란시아도 넉자로 지수화풍이라 풀면 된다고 했듯이.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인데 이 가치를 놓치게 되면 허상사탄의 사탕발림에 가스라이팅되어 자뻑하지 못하고 죄책감이나 열등감이란 자기비하를 종교에 의해 받게 된다는 것이지. 자만(자기만족)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값인가? 자기만족이 존재가치인데 자만을 죄악시하는 사고가 종교의 패러다임이자 사탄의 깃발이다 자만하지 말라고 가르치는데 자만하지 않고 어떻게 행복할 수 있나 되물어라. 자기가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다는 것을 누구나 알지만 자기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와 자신사이에 종교라는 벽이 있고 그 종교의 시조가 '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라는 것이다. 그대의 주인은 그대인데 그 주인자리에 종교시조들을 담아놓게 되면 행복은 저어기 멀리로 멀어지고 자기와 자신이 분리가 되된다는 것인데 그대의 중심에서 종교를 벗겨내야 비로소 자기와 자신이 만나 하나로 화합하게 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대와 나의 자기는 숨빛이성이고 그대와 나의 자신은 말빛감정이다고 연결을 해라 그렇게 꿰기를 할 빼 분리에서 하나로 이어진다

 

겸손謙遜하라고 하면서 겸손modesty이 미덕이라고 하는데 겸손이 뭔지나 알고 그러한 말을 하는가? 겸손은 너와 손을 잡는 ‘연대’를 뜻하는 것으로 너와 나의 가치와 방향이 같음을 확인하는 절차라고 본다. 한자도 겸손할 겸에 겸손할 손인데 겸손을 풀려면 영어에서 의미를 찾아보아야 보면 mode는 태도 · 양식 · 유행 · 성행 · 방식 · 형태 · 방법이고 sty (v.) Middle English stien, "오르다, 상승하다" 이며 때때로 "내려가다"의 뜻도 있었으며, Old English stigan (과거형 stah, 과거분사형 stigun)에서 유래되었다. Proto-Germanic *steiganan (Old Norse, Old Frisian stiga, Middle Dutch stighen, Old Saxon, Old High German stigan, German steigen, Gothic steigan에서도 볼 수 있음)에서 비롯되었고, 이는 PIE root *steigh- "가다, 오르다, 큰걸음으로 걷다, 걸음을 옮기다, 걷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자세한 내용은 stair 참조). Middle English 시대에 매우 흔하게 쓰였으나 현재는 구식이 되었으며, 보통 up, on, down과 함께 사용되었다.

겸손이라는 것은 같은 곳으로 같이 오르든지 내리든지 같은 곳을 향해 같은 걸음으로  걷는 것을 손잡음 겸손이라고 하는 것이지 기적수업의 특징이 하나님은 같으시다는 것이다 즉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같다는 것인데 같다는 것이 같은 곳을 같은 방법으로 같이가는 것이라는 것. 즉 겸손이란 두 손을 얌전하게 앞에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그런 자세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너와 손을 잡고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것...그렇게 될 때 동료요 동무요 동행이 되는 것이라고..나는 이렇게 이해를 하게 된다

 

자만 즉 자뻑이라고 하는 이 자기만족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로 말하는 것인데 내가 존재함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임으로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는 평가를 받은 생명이기에 자뻑은 기본이고 나를 지으신 창조주가 스스로 만족한 창조물인 나인데 나를 스스로 비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것이 불가능한 반역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기적수업이다. 다시 말하면 도기장이가 빗은 그릇을 도기장이는 모시기에 좋았더라고 만족했는데 그릇자체가 그릇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파기하기가 가능하겠는가? 라는 것이 하나님이 인정한 존재인데 내가 나를 부정한다는 것이 가능하냐? 라는 것이지. 그러하여 하나님의 뜻 보시기에 좋았더라 평점을 받은 내가 자뻑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자만하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지그러니 그대여 그대는 스스로 만족하는 자뻑에너지를 마음껏 누려라.

 

결핍缺乏이란 것이 자기부인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성서 ‘자기부정 하와와 허상사탄’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것. 왜 하와를 자기부정이라고 하는가하면 아담은 하나님이 흙(일차원소 1~26번의 융합결과)으로 생령이 되게 하였는데 아담에게서 시작된 이차융합의 드러남이 ‘하와’인데 하와는 하나님이 아담내면에 심어 넣으신 생령을 ‘외연화’시킨 ‘힘’이라고 본다 하와라는 이름자체가 히다에서 비롯되고 히다는 hide로 숨겨진이란 뜻이다 숨겨진 것이 드러나게 된 것을 하와라고 했고, 하와는 살중의 살 뼈중의 뼈로 생명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이고 흙에 내재된 ‘하나님의 힘’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육체를 집으로 삼아 거하시는 하나님의 힘이 하와이고 이 하와를 드러내고자 하는 방향성을 설명하는 것이 생명이냐 선악이냐로 길이 갈라지는 것이라 가르치시는 것인데 생명으로 드러나는 길을 카발랴 세피로트라고 하고 선악으로 가는 길을 클리포트세피로드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지 길은 하나인데 방향성에서 위로 향하면 방울소리를 따라 가는 것이고 아래로 향하면 부채의 에너지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방울을 부채에 감추고 흔드는 형식을 그대는 궁금해하지 않았는가? 나는 무속의 무구들과 행동들이 궁금했고 그것을 성서의 구약이나 신약의 정보와 연결하고 일상과 연결을 하면서 보편적인 실재값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지

 

방향성에서 영생의 길이냐 선악의 길이냐를 선택해야하는데 영생의 길은 아담안에 숨겨져 있고 선악의 길은 허상사탄 빛을 가져오는 자 루시퍼가 드러낸 준다고 설명한다는 것이다. '숨빛'은 하나님의 길이고 ,'빛'은 루시퍼의 길이다. 하나님의 길은 숨息에 있고 루시퍼의 길은 보고듣는 ’이목耳目‘에 있다는 설명인데 숨을 바탕으로 이목을 갖추면 하나님의 길로 가는 것이고, 숨의 기능을 알지 못하고 ’이목’을 근거로 한다면 사탄의 길로 간다는 것이다

 

방대한 기적수업의 분량인데 그 수많은 문장의 요약은 이 문장은 숨위에서 일고지는 ‘이목’의 역할을 하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확인하지 않으면 그것이 자기를 속임이다는 설명이다. 숨을 성령에게 배워라 그러면 그 위에 올려진 선악은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이지 숨빛을 훈련하면 훈련한만큼 ‘힘’이 되어 나타난다는 것이고 힘을 ‘선’이라 하는 것이고 ‘힘이 없음’을 ‘악’이라 한다는 것이다. 힘이 있음에서 나타나는 것이 자만 또는 자뻑이다.

 

힘이 없으면 불만 또는 자괴이듯이 그대가 불만 자괴감을 말한다면 ‘힘’이 없음이라는 뜻이고 루시퍼가 보여주는 세상을 보기는 하지만 그림의 떡일 때에 나타나는 ‘감정’이다. 이성은 위에서 아래로이고 감정은 아래서 위로라는 방향성을 가지는데 위를 밖이다 아래를 안이다고 이해하면 이성은 밖에 있고 감정은 안에 있다는 출발자리를 찾을 수 있다

 

이성은 물색을 딛고 들어오고 감정은 말빛을 타고 나아간다. 물색으로 들어와 말빛으로 나가는 이 원리를 영생원리라고 하는데 그대가 물을 마시면서 이성을 마신다는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지만 말을 하면서 피를 토한다는 생각 또한 하기란 쉽지 않다. 물을 마심으로 이성을 구축하고 말을 함으로 생명을 꽃피운다 말을 한다는 것은 소비행위다 물을 마신다는 것은 투자행위다. 그대가 물없이 살 수 없어서 이 삶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조건이지만 말없이 사는 것은 생존조건인 것은 아니다 생식에 필요한 수단이기에 그대의 선택이다

생존은 물이란 이성에 있고 생식은 말이란 감정에 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불변의 진리다 물은 생존조건이고 말은 생식조건이다. 생식은 감정에서 생성되는 제 2의 창조이다. 그래서 이성인 하나님의 창조가 수면위를 운행하는 영이라면 이성의 잉여가 만드는 생식이 그 수면위를 스치는 바람 감정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이성은 ‘글빛’으로 열매를 맺고 감정은 말빛으로 열매를 삼는다 이성과 감정 공히 ‘숨’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그대가 기억한다면 이성이나 감정의 근원을 마주하기가 된다는 것이지 글빛은 그대의 몸짓을 잡아놓은 그림이다 말빛은 그대의 소리값에 따른 힘의 발화다. 글공부나 말공부를 문자나 언어로 하기이전에 아기들이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을 눈여겨보면 변치않는 하나님의 진리 혹은 원리를 볼 수 있다 태어나 말을 하기까지의 과정은 대부분의 아이들의 성장 일년안에 담고 있다. 태어나 돐을 하는 이유가 생존과 생색의 전략을 통과했다는 통과증서여서다 태어나 일년이면 생존과 생식에 대하누메듀얼을 다 새겼다는 것이지. 이 과정을 공부해보면 참 신비롭고 신기하고 흥미롭다

 

그대가 배워야할 것은 일년안에 다 배웠다. 가장 맑고 밝고 아름다운 에너지일때 ‘영성’과 ‘감성’과 ‘의지’의 기본값을 다 배우는 것이어서 자면서 배우는 예언자들인 것이다. 그렇게 자면서 배운 예언가들이 신통력에 봉인되게 되는 것이 사회언어를 세뇌받게 되면서다 신통력을 가리는 새회언어에 갇히게 되면서 아기는 점차 신에서 타락하게 되는데 아이가 신으로 사는 시기를 삼신할미가 돌본다 라고 하고 삼년이라고 한다. 세살버릇 여든이라는 말이 왜 나오게 되는지 알 수 있다. 신이 사회 인간이목언어에 갇혀 신통력이 감추어지면 아이는 ‘결핍’을 느끼게 되고 불안 두려움 공포라는 언어로 그 결핍을 실재화한다.

 

언어가 된다는 것이 생각의 실재화이다 언어화하면 그 언어에 갇힌다는 것이다. 상상 망상 공상 이상 환상 등등 생각의 자유지만 그 생각을 입에서 ‘말’로 내놓게 되면 자기말에 자기가 걸린다는 것이지. 앞에서 거론했지만 말은 안에서 나왔다가 나온 곳으로 돌아간다 물은돌아온다는 것이지. 그래서 너의 말에 상처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너의 말에 상처를 받는다는 말은 너와 내가 한몸이라고 상상할 때인데 감정체 즉 생식을 위해 쓰는 도구가 말이기때문에 부부일심동체라는 것에서는 서로 상처받고 줄 수 있다. 그런데 엄밀하게 따지자면 일심동체인가?에서 부터 다시 가름해야한다. 이심이체가 만나 일심동체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어떻게 거쳐야 일심동체가 되는가! 결혼식이 일심동체확인현장인가?

 

생식을 위한 일심동체는 몸의 일이고 그 몸을 연합시키기위해서 ‘말’에 수단이 되는 것이니까 서로에게 걸림없는 연합기능을 발하도록 하는데 ‘말’의 힘이겠다. 결혼은 이심이체가 일심동체가 되어 생식하겠다는 것이지 이성을 서로 나누어 존재가치를 상승시키겠다는 것 까지 욕심을 내면 반드시 ‘성격차’라는 허들이나 트랩을 만난다 육의 결합은 생식의 수단이고 생식기능을 활성화하는데는 ‘말’이 중요한 감정이된다. 생식이라고 하면 아이낳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생식을 숨알息卵낳기라고 해석한다.

 

감정훈련법이 섹스인데 섹스에는 숨알낳기를 위한 마라톤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마라터너들의 러너스하이처럼 섹스도 섹스하이가 있다는 것으로 러너스하이가 심박수가 110~120사이를 삼십분이상 지속할 때 생기는 상락아정 깨달음의 느낌이라고 하는데 섹스는 심박수가 140회에서 180회까지 올리고자 하는 가장 힘든 고행이고 전심전력을 다 해야 하는 운동이다는 것이지. 이 고행을 이인삼각으로 하겠다는 것이 결혼이라는 것이고 결혼은 ‘감정발화’를 위한 학교라는 것이다. 결혼은 감정공부를 위한 학교여서 ‘말’을 배워야 한다 말한마디로 천냥빚을 지우기도 하고 갚기도 하는 것인데 부부사이는 감정에 냉기를 뿌려 심박수 떨구는 말은 조심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지. 그래서 부부의 감정공부 섹스는 엄청나게 어려운 공부다. 나는 생식보다 생존에 가치를 더 두고 있는데 감정보다 이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뜻이다. 안에서 밖으로 토해내면 돌아오는 에너지 감정세계 섹스하이에 이르는 길을 어떻게 공부하면 되는지를 찾아내었기에 심박수를 180회로 높이는 훈련을 통해 숨알낳기를 하는 것이고 그 훈련을 성령충만 겟세마네 기도라고 숨빛으로 숨알낳기를 하고자 한다면 즉 너와의 이인삼각에서는 섹스하이에 이르지 못한다거나 일상에서 말에 상처를 받는다면 겟세마네하이를 권한다. 너와의 이인삼각에서 섹스하이를 성취한다면 건강한 감정살이가 되어서 피에 문제가 없다. 혈액을 건강하게 만드는 운동이 섹스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만큼 섹스는 힘든 운동이고 힘든만큼 값이 바로 돌아오는 운동이다. 섹스하이를 성취하고 살 때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지.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인데 감정을 건너가면 나타나는 것이 이성이라는 세계가 있다는 것이 된다. 말에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감정계에 결핍에 있다는 뜻이다. 감정을 밖으로 토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에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이성에서 정보가 소통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감정을 건강하게 하기위해서 섹스하이를 추구하지만 섹스하이에 들어가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이성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성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와 나가는 물색이라 했다. 남자가 외연에서 안으로 들어와 파드마삼바바를 하고 나간다. 안에 들어온 생명의 씨앗이 자라 다시 밖으로 나간다.

 

안에 가득한 잉여를 토해내고자 하는 것이 생식행위다 먹고 가득차면 소화하여 배출하는 것이 생식이다 감정도 먹고 가득차면 배출하는 것이 섹스 똥누기다 섹스가 별것인가? 감정배출법이다 배출을 잘 해야 건강하듯디 쌓인 감정도 똥싸듯 배출해야 건강한 감정이 된다는 것이지. 나는 감정배출을 소리낳기 숨알낳기로 하기때문에 섹스하이에서는 졸업한지 십년이 넘었다. 잉여감정이라는 것의 효용성을 ‘말’ 통하지 않는 너(남편)의 관계에 쓰기보다 소리에 투자함으로 내가 건강한 감정경영을 한다는 것이지 남편과 내 말이 섹스하이를 향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을 알게 되면서 내 감정을 내가 경영하는 것이 홀로서기구나 그렇게 잉여감정을 소리수련에 투자하면서 섹스계와는 멀어진 것이고 섹스에 따른 리스크도 없어진 것이고 그렇게 내안으로 돌아오는 내 말도 곱고 아름다와지게 되었다. 남편과의 결혼살이가 섹스는 없어도 평화롭고 유쾌하면 늘 반짝반짝 빛나고 행복하다. 그냥 같이 있다는 사실로 감사하고 행복한 것이지. 감정수업에서 이젠 졸업을 하고 이성공부에 들어선 것인데 기적수업이라는 책을 딛고 여태 내가 공부한 공부가 먹물희석시키기 과정이였고 이제부터 물색공부구나 하게 된다.

 

그 싸인을 지난주 해맞이 신단에 복돌이를 데리고 오신 여사님과의 대화를 통해서다. 나에게 신기가 넘친다고 그 많은 신기를 글로 풀어내어 쓴다고 발악을 하였다고 신기를 글로 풀어내는 것도 길인데 앞으로도 글로 풀어내라고 ... 데리고 온 진돗개 이름에 복돌이라 해서 복이 돌아온다는 거네 했던 것과 그 전주에 금숙이가 돌회回 올래來 달릴 주走라는 세 글자가 신단에 씌여있더라고 해서 내가 해석을 했는데 복돌이나 회래주나 같은 이야기구나. 그렇게 기적수업이 복돌이자 회래주구나 이해

 

2024년 1월 10일 오후에 배달된 기적수업을 어제 24일 오후 7시 20분 일독을 했다. 열나흘간 달려온 멀리 울리던 기적소리가 내안으로 돌아왔다 예수를 붙들고 성령스승님께 배우면서 내 먹물을 희석시켜 세족 세초를 한 감정수업이 끝나고 이성수업 즉 영감공부에 들어가자 하시는 것이지. 마지막 감정수업관문이 낙단루 동굴에서 순희다리사이로 지나가기였다는 것도 나로선 즐거운 테스트 순희가 한말이 재미나지 두살 많은 윤영일 내가 낳았다고 ㅎㅎㅎ 나의 낮아짐에 대한 테스트를 거쳐 말이 만드는 감정수업에서 통과하고 물색공부에 입학하는 것 

 

순희가 내가 보낸 기나 긴 글을 주욱 다 보았다고 했다. 두번째 글도 다 보았다고 하나님 부처님을 만난 것이냐 하더라 웃고 춤추고 즐거워하는 에너지가 하나님이고 부처이고 영생이고 구원이라고 말한다.  감정테스트를 하고자 시험관으로 손순희를 등장시킨 섭리구다 참으로 나도 나를 보면서 순희에게는 거부감이라는게 하나도 들지 않을까나 하는 것. 사람마다 나에겐 스승이지만 순희가 내게 준 문화충격이 하도 엄청나 내가 얼마나 답답인가를 인정하게 되었더라는 것이지. 내가 가진 허상이 얼마나 정신이상인지 감정의 발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발견하는 것. 그렇게 내가 넘어야할 관문을 통과하고 이제 이성계 즉 영감계로 들어가는 것이지

수박겉핥기식의 지식들은 다 버리고 물색에 실려오는 하나님의 발걸음소리를 듣는 훈련 이게 ‘의’에 대한 수업일랑가 한다. 의에 대한 수업이 몸에 대한 이해력을 근거로 하는 것이구나 몸공부없이 뜻공부를 할 수 없고 몸공부는 감정을 근거로 하고 뜻공부는 이성을 근거로 한다는 것인데 그간 내가 나에 대하여 심하게 착각한 것이 이성적이라 생각한 내가 나에게 준 정의가 오류더라는 것이다. 글을 쓰고 책을 보고..분석하고..하는 것이 이성인 것이라 착각한 것인데 그것을 먹물이라고 하는 것이고 이제부터는 영감이라는 것이 이성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혼자 다시 웃게 된다. 여태 이성적이라고 생각한 내가 얼마나 감정적이였던가..신단에서 여사님이 내 신기가 저리 불타고 있다고 했는데 뭔말씀이여 했는데 알고보면 내 화기발랄한 신기를 글을 통하여 조절하면서 공부를 해오고 있었다는 것이고 이제 그 활활하는 불을 들고 영감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 감정 말의 공부에서 이성 글의 공부 글로 풀어냈으니 앞으로도 글로 풀어내라는 공수 먹물을 씻어내려 글로 풀었다면 물색에 실려 오는 영감을 보는 영안계인가 일여소원 사사명시를 주문한 그 주문이 이제 열리는가보다. 들음이 되면 이젠 봄이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예수의 겟세마네에서 부활승천까지는 감정수업과정이였구나 땅에서 하늘로 오름하는 불의 길 이제 재림하는 예수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림하는 물의 길 

 

이러한 길이 열린다는 것이 나로선 즐거운 기적수업이 되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