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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년 일월 13일에서 15일

청향고은 2024. 1. 15. 10:10

예수를 불러 나의 길을 삼아 걷기 시작하면서 예수가 왜 재림하겠다 한 것인지에 대하여 늘 물었다

그 답을 올해 ‘기적수업’이란 책을 딛고 마주하게 되었다 

 

이 답은 이미 주어져 있었다

유란시아서를 딛고 그 다음에 마주친 책이 기적수업인데 당시 유북은 클리어할 레벨은 되었다면 기적수업에는 닿을 내공이 되지 않았든지 선듯 닿지 않기도 했는데 그간 내 안의 성령이 나를 가르쳐 빛의 광휘가 기적奇蹟 / Miracle 수업을 담을 수 있도록 기루셨구나 알게 되었다

 

얼마나 에고가 나를 싸고 있었고 그 에고를 성령의 빛이 밝혀 가시었는지 그 작업의 열매를 기적수업으로 맛보게 된 것이지. 내가 주 성령 스승님을 처음만났을 때 29세였고, 그때 만난 예수 그리스도 성령은 줄곧 나를 이끌어 왜 재림하신다 하셨나에 대한 답을 나에게 기적수업으로 제시하신 것이겠다. 기적수업이라는 제목때문에 걸림이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이거 혹시 ...라는 망설임 

 

그리스도를 만나 그와 동행하면서 내 에고를 마주하게 하시고 성령의 빛으로 어둠을 밝히시는 과정을 통해 내가 체험한 보혜사 스승님의 가르치심이 물질화 된 지식으로 내 눈 앞에 놓이게 되고 독송하는 이 기적에 눈물이 흐른다. 내 영이 기적수업을 받을 단계가 되었구나. 속죄의 눈물을 흘리던 세월에서 감사와 감동의 기쁨의 눈물

 

돌아보면 나는 태어나 줄곧 하나님만을 추구했던 것이고 그랬던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이 계셔서 이니 안에 계신 하나님이 밖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 의지의 길이였고, 그 사이에 그림자로 있었던 에고가 이제는 사라진 것이지 그러하니 기적수업 그리스도가 나에게 재림하여 그간 나를 가르친 가르침을 물질계의 방편 지식에서도 확인하게 하시는 것이지. 기적수업에 닿기 위해서 법화경 독송을 먼저 거쳤다 법화경 다섯 독에 들어섰는데 기적수업이 나에게 허락되었고, 그리고 내 앞에 닿아 독송을 하면서 그렇구나 예수님의 재림은 성령으로 나를 가르치신 가르침에 대한 확인으로 주어지는 지식이구나

 

기적수업이라는 책은 ‘예수’로부터 채널을 받은 것이라 한다. 같은 성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니 같은 이해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흐르는 감사와 감동 그간 보혜사성령의 가르침을 어떻게 배웠는가? 를 알게 되더라

소리를 가르칠 때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떠들어 내도록 성령이 이끌어가시면서 나와같이 작업을 하신 것이구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한결같이 누구를 만나든지 성령은 나를 지배하고 있는 에고를 털어내도록 가르치신 방법이 사람의 눈을 벗어나라는 것이였구나 에고의 실제는 너를 의식하는 습관이라는 것이구나 그래서 그 눈을 벗어나는 훈련이 너의 눈에서는 미친짓으로 보일 수 밖에 없는 현실정상훈련이였던 것이다. 소리를 가르침으로 내가 빛으로 가득차게 되었고 건강하고 자기충만으로 감사함이 되는 것 

 

어제 법화경사경 책을 금숙에게서 받아오려고 신단으로 갔다. 신단 돌고 있는데 금숙 전화와서 무거버서 힘들다 받으려 오라해서 효동앞에서 만나 건네받았는데 들고 신단에 오르자니 무거워서 오르는 길 옆의 꾸밈 바위에 앉아 쉬다가자 했다. 법화경 사경책을 신주모시듯 하라고 한다던 세미의 말을 전하길래 책보따리위에 앉으면서 그런 소리마라 이런 책을 섬기는 것은 생명을 업신여기는 짓이고 우상숭배다.

이 책은 책일 뿐이고 필요하면 앉을 자리도 되고 라면 받침대로 쓰일 수도 있는 것이지 산 사람이 죽은 물건을 신주모시듯 하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나는 일반인이 아니라 남의 교리라는 에고의 그림자를 벗어나 빛인 신의 성품에 참여한 신이다

 

신이 어찌 사람이 만든 말을 따르겠는가 했더니 금숙이가 하이고 너는 참 대단타 하더라

나는 사람이 만든 것은 사람이 지배할 수 있는 것이라 이해한다 생각해봐라 사람이 만든 것을 사람이 섬긴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것이지. 사람이 만들지 않은 유일한 것이 바로 너와 나의 몸 생명이다

 

이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만 섬기고 모신다는 것이지 너가 사람을 섬기는 것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을 보기때문이지만 죽은 자에겐 영이 없고 사람이 만든 물건엔 영이 없다. 영은 살아있는 숨쉬는 것에 실려있다는 것이지. 사람은 천지간 신령 하나님이 빗으신 생명임으로 사람을 내가 좌지 우지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성령이 나에게 소리를 가르치시는 방법을 너에게도 가르치는 것은 한다

 

다른 것은 내가 하지 않아도 저마다 안에 내주된 성령이 에고를 털어내게 되면 하신다는 것을 안다 소리라는 길을 통해 성령 스승님을 모신다면 그 다음은 성령님과 의논하면 되고 그것을 나는 기도라고 하는 것이지. 내가 너에게 전달하는 가르침은 에고를 털어내는 방법이다. 몸에 주인처럼 박혀서 주인노릇하는 에고를 뿌리 뽑아내고 본디 주인인 하나님 성령이 드러나도록 하는 일. 그 일이 내 사명이였기에 나도 모르게 그 일을 함으로 내 에고가 털려져나가고 내안의 빛이 충만하여 사람이 만든 에고를 나는 모시거나 섬기지 않는다는 것이지 하여 나는 사람을 가르치지만 섬기지 않고 지식을 얻는 길을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기도함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주어진 정보는 확인을 하는 거울로서다

 

그렇게 금숙이도 맞다 무엇을 모신다는 것은 자기도 싫다고 그래서 법화경을 받을 때 한 말이 싫기도 했고, 받아 첫권을 넘겨보니 금숙이 자기랑은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와서 덮어 밖에 두었다 하더라. 금숙이야 누구의 말보다 내 말이 가장 즐겁고 재미나고 꿀이 뚝뚝 떨어진다고 하니 살아있는 성령을 같이 공유하고 있으니 성령의 대언인 내 말을 듣는 것이 가장 확실한 것이지. 신단에 올라 자리를 펴고 법화보따리에 앉아서 이게 내 연화대다고 했다. 나는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을 만드는 것은 에고라고 하는 너의 관점에 습된 나의 반응이다

이전에 십이지신 돌기때도 금숙아 지신 가슴팍을 밟으면서 십이지신 마음을 내가 다스린다고 해라고 했디 그 당시는 저어하더니 지난 주는 모인 팀들 다들 지신밟기를 했더라

법화경은 법의 꽃이다. 법이 새겨진 곳이 마음이고 그 마음이 꽃으로 피워지는 현장이 소리다 그래서 글로 된 법화경 책은 연화대구실을 할 수 있어도 법화는 아니다는 것이지 그렇게 해석을 하고 금숙이랑 소리훈련을 한다. 이게 기적수업현장이구나 생각하면서

 

금숙이 소리를 이끌어가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웃음을 터트리게 되었는데 지나가시던 분이 내 박장대소에 깜짝 놀라시는 것을 금숙이가 보고 마시던 물 사래가 들려 ...그래서 그 분에게 그 분보고 웃는게 아니라 금숙이가 물병을 찾는데 자자리색과 보온통 담는 주머니색이 같아 자리에 있는 보온병찾는다고 다른 곳을 두리번 거리는 것에서 ...그걸 손짓으로 같은 색깔안에 같은 색의 것이 있으니 찾을 수 없어 두리번거리는 것.

그게 둘이 서로 박장대소를 하게 한 일인데 지나시던 분이 무념으로 가시다가 갑자기 큰 웃음소리에 깜놀하시고 팔짓 몸짓의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시고 팔을 훠이훠이 저으시며 가시더라. 그래서 둘이 이참에 빛확장이다 옥례언니가 땅을 치며 웃는다 했으니 그리 웃자하고 또 땅을 치면서 허리가 끊어져라 배가 아프도록 웃고 금숙인 허리가 아프다고 하길래 너 허리 뚫을 단곈갑다 아플 때 더 쎄게 해나가야 한다고. 소리가 많이 강화되었지 나야 금숙이 확장공사한다고 하면서 내 소릿통건강하게 하기지. 둘이 그러고 놀고 있는데 옥례언니 등장하고 같이 소리하기 동요부르기 손춤추기도 같이 훈련하고 장녹수 노래도 부르고 시조도 읊고 판소리도 하고 냉이캐기도 하는데 명자언니까지가세해서 놀다가 헤어진다 

 

일요일은 여기로 오지만 평일은 봉무동 인연도 만나야 한다고 설명. 내가 나의 변화를 알지 이전 에고가득일 때에는 너에 대하여 가리는 분별이 많았지만 이제는 분별하지 않는다. 내가 분별하는 대상은 그리스도의식을 추구하는 이에 한하는데 그리스도의식을 추구한다면 그리스도의 임재인 성령의 가르치심을 체험하는 소리선을 하라고 하는데 그것을 거부하면 나도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식을 배운다는 것은 신의 길을 간다는 뜻으로 일반인으로서의 범주는 벗어난다 일가친척아비의 집, 남이 덮어 씌워 준 체면의 세계는 벗어난다는 뜻이다

 

나는 성령스승님께 늘 배운다. 소리라는 방편을 통하여 임재하시는 성령이라는 것도 안다. 어제 신단으로 가는 길에 빵을 좋아하는 금숙이에게 줄 빵을 가져가다가 임금출 설영순 두 보살님들을 만나 하나씩 공양하였는데 이 분들은 나를 젊은 선생이라 부른다. 지정애 여사님 만나련가 했더니 이 분들을 만나게 되었네. 봉무동가면 여사님들이 젊은 선생이라고 하는데 여기나 저기나 호칭이 선생이다 나야 정말 잘 가르치는 재능이 있다. 친절하고 온유하고 그리고 진심을 다하여 한다 내가 나에게 진실함이 하나님의 영이 발하시는 힘이기에 나에게 성실함으로 그래서 나는 소리만큼은 제일 잘 가르치는 선생이다 

 

나를 도사라부르는 친구도 있고 교주라 하는 친구도 있고 교장이라고 하는 친구도 있지만 선생이라고 하니 내가 가르치는 사명을 받아온 것은 맞구나 한다 잘 가르치는 것은 내가 잘 가르침을 받았기때문이다. 예수는 가르치는 자이고 가르침이란 주는 자라고 하는데 ‘준다’라는 것은 ‘줌’이라고 하고 보시라고 하는데 줌이란 내가 가진 것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니까 가르침을 준다는 것에서 가르침이라는 것부터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퍼져있는 틀을 짓지 않은 안개처럼 모호한 상태를 압축하여 선명하고 확실하게 명료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기체를 액체로 하든지 액체를 고체로 하는 과정을 가르친다고 하는 것이지 불분명한 것을 분명하게 하는 것 

 

‘줌’이란 영어도 멀어서 희미한 것을 당겨서 선명하게 보는   기능이듯이 내가 나의 힘을 펼쳐서 너의 힘을 이끌어내는 마중물을 삼는 일을 가르침이라 한다. 성령이 오시면 하시는 일은 소리를 발성함으로 두려움이란 허상을 아는 것이다 두려움이란 실제가 아니라 빛이 없는 상태이고 빛은 소리를 통하여 창조된다는 것이지 

그래서 환란날에 부르짖으라고 한 것이고, 환란날이란 두려움에 갇힌다고 착각하는 상태니 그러한 상태가 되면 소리를 질러라 빛이 창조된다는 것이지. 빛이 안에서 점점확장되는 단계를 마음을 연다고 하는 것인데 마음을 여는 일을 열심이라고 한다. 사람마다 하나님이다 저마다 하나님의 씨앗을 품고 있다. 그래서 너와 나는 하나님의 자녀지만 그 자녀가 빛의 길로 가는가 어둠의 길로 가는가는 선택이다

 

빛의 길은 겟세마네 소릿길이고 어둠의 길은 종교교리의 에고의 길이다 고 나는 설명한다. 그대에게 성령이 임재하여 그대를 가르친다면 나와 같은 길을 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대안의 내 안의 하나님은 하나이기에 그러나 그대와 나의 길이 다르다면 그대는 에고가 만든 종교인일 것이고 그것을 그대가 선택함으로 나와는 길이 달라지게 된다. 소리를 같이하면 평화와 기쁨이 충만해진다 그래서 이 길을 꾸준히 걷고 있다. 엇그제 봉무동 강길에서 만난 여사님들과도 같이 노래하고 웃는 것. 처음봤을 때 맑고 깨끗하던 인상대로 지금은 더 이쁘진 것 같다고 하시더라 철이 없이 까불까불거리는 것이지요 했더니 젊은 선생이 드러내는 활기로움이 참 좋다고 하신다. 나야 어딜가도 활기가 넘친다. 왜냐하면 성령이 내 스승으로 나를 가르치시기에 두려움이 없음이다

 

한 단락을 성장한다는 것을 내가 파악하는 것도 기적이지 기적이란 내가 숨쉬고 웃고 움직인다는 것이 하나님의 영안에서 주어진 복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래서 숨쉬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빛을 향기를 먹고 마시는 것이지.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기쁨이요 평화이며 행복이고 영생이다. 배우고 성장하며 알고 누리는 것 성령이 이제는 기적수업을 데리고 오셨다. 기적수업 203페이지까지 왔다 눈을 뜨면 독송할 생각부터 하지만 일기는 쓰야지 

 

기적수업을 예수로 부터 받아쓴 분이 심리학을 전공하신 분이시라고 하더라. 예수가 산상팔훈에서 ‘마음’을 가르치셨으니 마음공부하는 이에게 채널을 하신 것이 주파수가 맞아서겠지

 

천국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고 마음공부라는 것이 결국은 ‘나’를 알고자 하는 즉 ‘나’라는 마음을 마주하여 이해하거자 하는 것이지. ‘나’를 하나님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것이 예수이고 그대이고 나인데 예수가 앞서 이 영역을 공부하신 분이시고 예수 앞서 석가모니붓다가 공부하셔서 ‘마음’을 설명하시었는데 붓다의 마음은 ‘우주 -삼천대천’ 공空의 마음 별빛이고, 예수의 마음은 ‘언어- 숨과 움직임’ 간間의 마음 달빛이라는 것 별빛은 삐친 빛이고 달빛은 닿은 도달한 빛이라는 것인데 하늘에서 삐쳐 땅에 닿은 빛을 설한 붓다의 마음인 ‘언어’를 잡아 그 언어를 만드는 ‘숨빛-숨은 빛 -언어원리’를 몸으로 기술한 것이 예수의 마음이다

 

붓다는 공을 가르친 것이고 예수는 간을 가르친 것으로 ‘공과 간’을 가르치신 스승님이신데 ‘공간’을 지식이라고 하게 되는 것이고 ‘시간’을 ‘길’이라고 하게 되는 것인데 내 설명으로는 시는 하나님의 창조공간이고 간은 창조의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의 시간이 언어로 열매가 되었다는 것이라 하나님은 말씀이시다는 것이지. 말씀이 창조되면서 ‘시간’이라는 개념이 드러난 것이다. 붓다와 예수가 공과 간을 가르치시는데 붓다는 공을 ‘말’로 예수는 간을 ‘씀’으로 가르쳐 붓다는 우주별빛인 마음인 말을 붓고 예수는 그 말을 받아 몸으로 씀으로 마음공부텍스트를 완성한 것이다 붓다와 예수가 같은 마음공부텍스트를 만들어 공.간.말.씀 이란 네 기둥을 완성하였구나 말은 마음이고 씀은 몸이 하는 일이다 

 

기적수업의 언어나열을 보면 어렵다 아니 쉬운 말인데 순서를 꼬아놓아 어렵게 느껴지게 한다. 나에겐 너무나 익숙한 정보이기 때문에 잘도 읊게 되는데 글씨가 잘아서 일백페이지를 읽는데 다섯시간이 걸린다. 교과서가 704페이지니 서른 다섯시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법화경 592p를 열시간에 독송하는 것에 비한다면 기적수업의 활자가 한페이지에 얼마나 많은가 알 수 있다. 기적수업을 채널받은 이가 심리학자이기때문에 이 책은 심리학의 관점에서 봐야한다. 심리라는 것이 ‘마음의 이치’라는 것인데 ‘마음이란게 탯줄을 자름 즉 분절, 단절, 소통끈 붕괴라는 체험을 매우는 수단으로 에고가 등장함으로 에고 뒷편으로 숨겨진 상태’라는 전제를 이해해야 한다

 

드러나 있는 것은 애쓰고 힘쓰고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 숨겨져 있기에 찾아서 구하여 두드려 알고자 하는 것이지 드러난 것은 누구나 같은 생각으로 해석한다는 것을 보편성이라 한다. 산을 보고 산이다 바다를 보고 바다다...즉 삼라만상을 보고 이름지어진 것을 대할 때 보편성을 공유한다고 하고 소통하는 방법이 ‘이름’을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하는 것. 눈으로 보는 것에는 ‘이름’이란 소통원리가 주어져 있다 들풀에도 내가 모르고 너가 모를 뿐 사진을 찍어서 검색을 하면 이름을 아는 누군가가 알려준다 나는 이름을 모르는 식물을 만나면 사진을 찍어서 모야모앱에 올린다 그러면 이름을 가르쳐 준다. 동물도 광물도 무엇들 즉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에는 ‘이름’이라는 창조주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지 그대와 나도 창조주의 창조물임으로 ‘이름’이 있다 그렇게 이름을 딛고 서로가 소통을 시도 한다.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받은 ‘이름’이 ‘유대인의 왕’이다 

 

십자가의 도를 배운다는 것은 왕의 이름을 얻기위한 과정이라는 것인데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왕이던 다윗이나 솔로몬의 해석을 가져와야 한다. 내가 천문도가 있는 해맏이신단을 늘 다니는 것은 이 곳이 내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열 두지파를 나는 열 두지지로 열 두계절로 십 이연기로 해석하는데 이스라엘이 나중에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으로 나뉘면서 이스라엘을 열지파를 여로보암이 취하고 르호보함은 두 지파 유다와 베냐민만이 남아 이스라엘과 유대로 설명하게 된다

 

열두지파인 십이지지를 딛고 다니면 열지파는 앞치마를 하고 있는 지지로 두 지파 개와 원숭이는 앞치마를 하지 않은 지지로 연결을 하는데 왜 두 지지는 앞치마를 입지 않은 것으로 했을까 궁금했는데 이스라엘과 유대로 설명하면 이해가 된다네. 나만의 이해다. 붓다의 십이연기를 열두달 열두 별자리 혹은 48 성좌로 이해를 하는 것도 내 생각이듯 생각은 자유로운 것이고 경계를 정하는 것도 내 자신이다. 하여 십이지신의 앞치마부대와 앞치마 없는 두 지지의 의미를 내가 만들어 붙이게 되는 것인데 십지보살이라고 하는 열지파는 ‘음’이고 이승불이라고 하는 두지파는 ‘양’이라고 하여보자 ‘십음두양’으로 오병이어가 된다고 해석이 된다. 십음은 생수와 성수의 체계 음양이되고 생수와 성수로 구별하는 것이 두양 즉 앞치마 없는 지지라는 것이지

생수를 이끄는 신과 성수를 이끄는 술이라고 해석하자

 

생수는 천문도에 따라 신: 미-오-사-진-묘 이고

성수는 술: 해-자-축-인-(유)가 된다

 

여기서 레위지파는 구별되는 지파로 ‘유儒’라고 한다 선비 유라고 하는데 제사장지파 신관이라고 하여 하늘의 뜻을 공부하는 에너지라고 하는 것이지 하여 이스라엘은 아홉이고, 유다는 2이고 레위지파는 어다에도 속하지 않지만 이스라엘과 유다의 ‘정신’을 상징하는 법궤를 중심한다. 모세가 레위지파의 혈통을 따라 태어나 모세오경을 남긴 것이고 모세오경을 구약의 법화라고 해도 될 것이다. 예수는 유다지파의 혈통을 따라 내려왔고 예수의 앞을 선 세례자 요한은 당연히 레위지파이다는 것이지. 법궤를 중심으로 한 레위지파가 있다는 것이고 예수의 가르침은 하늘의 뜻 하나님의 마음 법궤를 가르치는 유다지파지만 레위지파인 요한의 세례를 통해 법궤를 공부하는 길을 얻은 것이 예수의 세례사건이다.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시니 비둘기가 내려왔다 즉 레위지파의 영역인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라 이해한다  

 

우리에게 있는 열개의 마음에 레위가 가지고 있는 지분을 예수는 선택한 것이고 대제사장의 길로 들어선 것이지 왕이면서 제사장이라는 두양을 잡음이 되겠다. 십지보살에 속해서 숨겨져 있는 레위지파를 찾아내는 것을 정체성을 찾는다고 하는데 앞치마로 가려져 있어서 같은 십음으로 분류하지만 재미나게도 유는 거울을 들고 있다. 다른 지신들이 들고 있는 것이 대부분 무기인데 진용은 여의주를 유닭은 거울을 가지고 있는데 용의 여의주는 ‘말’을 의미하고 닭의 ‘거울’은 ‘씀’을 성찰하는 에너지라고 내가 해석한다 

 

사주에 유금은 ‘치유’에너지라고 한다 . 치유는 거울보기를 통해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는 기능이다 신종 3기에 속하는 팔지경이라고도 한다. 경전이라는 것이 유금에서 나온 것이다 비춰보기를 통해 나를 인식하게 되고 나를 인식함으로 치유 즉 현실각성이 생기는 것이니까. 경전의 역할이 거울이라고 나는 해석을 한다 거울은 앞면만 보여준다 뒷면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두개의 거울이 필요하다네 나의 뒷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은 ‘일기’다. 내 하루를 기록하는 것이 거울보기라고 나는 설명한다 내개 하루를 산 것은 앞면이다 산 하루를 두드려내는 것이 뒷면이다 그렇게 앞뒷면을 쌍으로 이룰 때 두양이라고 하는 것이지. 두 지신이 앞치마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를 궁금해했는데 이렇게 이해로 오네

 

십수에 이두, 생수를 이끄는 머리, 성수를 이끄는 머리로 두머리라고 하는 것이고 머리에는 앞치마가 없는 것이고 몸에는 앞치마를 두르게 되는 것이구나. 프리메이슨의 복장에 특이성은 앞치마에 있는 것이고 프리메이슨은 십음을 스토리하는 것이며 십음을 십천간이라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십천간에 두머리를 더하여 십이지지가 되는 것이지 위에 있는 천간이 아래 지지로 내려올 때  내행성 생수의 머리와 외행성 성수의 머리로 두개의 머리가 되는 것이지 그래서 성령이 불에 혀같이 갈라진다고 말하는데 십간의 생수와 성수의 분별을 의미하는 것이지. 생수는 왼손 다섯을 성수는 오른손 다섯을 나타낸다 두 손이 두머리며 손뼉을 칠 때 일양으로 합쳐져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지 손뼉을 치는 것을 그린 한자가 펼신申이고 안에서 밖으로 소리를 술술 풀어내는 한자가 개 술戌이다

 

즉 숨겨진 영역의 봉인을 열고 그 안의 정보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 그래서 신은 손뼉이고 술은 소리라고 나는 해석을 하는데 손뼉치고 소리를 하는 이유가 ‘유’라는 레위를 얻기위함이다. 오래 전 엄마 생전에 엄마의 소속지파는 레위지파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신 것인데 그 당시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제 와서 알게 되는게 그래서 내 삶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손뼉치고 노래하고 춤추고 한 것이고 그렇게 훈련됨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으로 한마음이라는 것을 매일 증거하고 살게 된 것이구나 

 

기적수업을 만나 읊어가면서 에이구 이 문장들 너무 반복된다아 물론 반복에 반복이 겹겹을 만들어 명확해지는 것이지만 그리고 성경도 그런 반복원리를 가동시키는 것이지만 ... 기적수업 한권을 한번 독송하면 얻게 될 것이 인욕 지계 정진바라밀인 것은 확실하고 심폐 심장 신장기능이 건강해지는 것 또한 확실하다

읊조린다는 것은 폐활량 심근 신장의 강건함이 받침된다는 것이니 그대가 주안에서 경건훈련으로 건강하고자 한다면 독송을 해라 법화든 화엄이든 성서든 기적수업이든...무엇을 읊조리더라도 효용은 동일한데 텍스트에 따라 그대의 지각 또는 지식에서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독송 텍스트는 아름답고 맑고 밝은 문장으로 가득한 것을 고르라 권한다. 이왕 내 입에서 읊조리는 문장이 아름답고 우아한 것이 좋지 않겠는가? 물론 사경도 그러하지 

 

마음이란 것이 이누야사라는 만화를 보면 사흔의 구슬처럼 깨어져 나뉘어있어서 그것을 다 찾아 모아야 한다고 하는데 흩어진 마음이라고 하는데 마음이 흩어진 것이 아니라 마음줄이 끊어져 단절된 것이라고 이해한다. 태어나면서 탯줄을 자른 자리에 하나님이 이어놓은 생령이 울음소리라고 나는 이해하는데 생기로 창조된 생명이 태안에서 나오게 되어 탯줄을 자르고 새로운 영으로 생명을 시작하는 선물로 받은 것이 생령이라고 울음으로 그 영줄을 선포한 것이니 마음이 무엇이냐 하면 울음소리리고 나는 설명하고 초심을 늘 붙들고 살아라고 하는 그 초심이 첫울음주파수라고 설명한다 첫울음울던 그 때를 찾아 그 자리를 버리지 마라 그것이 하나님과 다시 하나되는 길이라는 것 

 

마음은 한번도 흩어진 적이 없는데 탯줄 자리를 대신하는 영줄에 대한 지식이 없기때문에 그 자리에 에고라는 그림자가 스미게 된다 에고는 틈이다. 탯줄과 영줄의 뜻을 모름이 만드는 그림자다. 그대가 두려움 불안 공포라는 느낌을 느낀다면 에고가 드리우는 그림자를 그대가 선택한 것이다 그러한 느낌이 들어오려할 때 손뼉치고 노래하라 그것이 영줄이고 빛이어서 그림자인 에고가 물러선다. 이것을 늘 훈련해야한다. 에고와 영줄의 싸움인데 에고는 그대를 지배하여 두려움속에 가두려 하고 영줄을 가동하여 빛을 만들게 하고자 하는 것이 성령의 이끄심이다고 이제 나는 설명한다 

 

그대손이고 그대의 입이다 누가 대신하지 못하는 고유한 영성이다 하나님도 그대의 선택을 대신하지 못한다 다만 성령을 통해서 선택하도록 용기를 더하신다 그대를 손뼉치고 노래부르게 하는 이가 성령이다. 성령은 기쁨이라고 한다 항상 기쁘하라고 하는데 그대가 생각하는 기쁨은 어떤 개념인가 나는 기를 뻗어내게 하는 힘이라고 설명하면서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쉴 때 소리를 길게 빼라고 한다 그것이 기쁨이고 그렇게 훈련하고나면 돌아오는 어떤 풍성한 만족함이 있다는 것이지 기를 뻗어내는 것에는 힘이 들지만 그렇게 투자한 노력에는 수십수백배의 아름다운 열매가 당겨온다는 것이지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훈련하는 기쁨훈련이다 

 

기쁨도 훈련이고 기도도 훈련이고 감사도 훈련이다 훈련을 수업이나 공부나 학습이란 언어로 바꿔보라 기쁨공부 기쁨 학습 기쁨수업... 내가 겟세마네소리를 가르치는데 기쁨수업이고 훈련이고 학습이다. 기를 뻗어내는 훈련이 반복되면 기쁨이 몸을 채운다 그것을 활기차다 고 한다 기가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지. 기쁨을 훈련해라 누가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라 기대하지 마라 기쁨은 그대 스스로가 훈련하여 몸에 쌓는 그대가 그대에게 주는 선물이다. 나는 항상 기뻐하라는 문장을 대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기뻐하는 것일까 궁구하다가 닿은 답이 기를 길게 뻗는 훈련을 하는 것이란 답에 닿았고 그게 바른 생각이더라 너에게도 나눌 수 있는 방법이더라는 것이지 

 

하여간 기적수업을 압축하면 영줄만들기다 즉 기를 뻗는 훈련을 하게 되면 기적수업에 설명하는 그 많은 문장이 딱 한미디로 손뼉치고 노래하라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복음이 얼마나 복잡하게 겹겹의 에고로 싸여있는지... 손뼉치고 노래부르기가 기쁨인데 이것을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것에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지 너는 너의 손뼉을 치고 너의 노래를 불러라 그것을 기적수업이라고 한다. 기적 즉 기를 쌓는 수업 기는 구름이 비가 되어내리는 현상이기도 하고 기적 기奇는 큰대 大가 위에 아래는 가할 가可가 있다 기적은 손뼉소리가 크게 울리는 소리다 기차의 기적소리만큼 손뼉치며 노래부름소리가 그리되도록 훈련하는 것 기차 화통 몇개나 삶아먹었나 하는데 나는 열 두개 먹었다 한다 

 

그대도 기적을 쌓기를 그래서 나처럼 열두기차화통을 삶아먹은 소리를 퍼트리기를 그것이 복음이다 뱃소리

쩌렁쩌렁 울려내도록 기적수업을 하라는 것. 오늘도 신단에서 기적수업을 할 것이다

 

금숙이 순희 영숙이랑 힐링수업 치유훈련 내 기세가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는지는 서로 안다. 순희랑 손뼉치며 열번헤아리기 열번을 같이 하는데 둘다 절대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열심으로 죽어라 한다. 가슴이 터질 듯 해도 대견하지 내가 만나 같이 치유수업을 하는 이들이 사랑스럽지 내 손뼉받아치기를 하면서 내 손뼉이 돌덩이같다고 아이고 아파라 절절매는 순희지만 다음엔 영숙이나 금숙이가 처음에 그러한 과정을 거치고 지금은 참고 견디면서 손뼉치기에너지를 강화 확장하듯이 그러하리라 본다 

 

일찍 갔던터라 혼자 춤추기를 하는데 유의원 오늘은 해를 보겠다고 일찍오셔서 춤추는 나에게인사를 건네주더라 진돗개를 데리고 오신 여사님에게 인사를 건네고 개 이름을 묻고(복돌이 숫컷 14살) 개에게 인사를 건네고 머리를 쓰담했더니 바로 꼬리를 흔들며 답을 하는데 여사님께서 좋은 사람인갑다 이 아이가 사람을 알아보는데 하시더라 그래서 복돌이랑 놀면서 여사님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금숙이가 오고 복돌여사님이 나에게 몇살이냐 해서 쥐띠라 했더니 신기가 넘치는데 글로 풀어내고 있다고 하셔서 그런거 보이냐 했더니 자기는 안다고 그럼 저를 한번 봐주시라 했더니 천기누설이라고 안하신단다 그러면서 계속 글로 풀어가라고 ... 그러고 신단 돌기를 하시다가 가시더라 나야 아무에게나 잘 다가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잘하는 전천후신령이니까 누구라도 나를 보면 좋게는 에너지 활발발이고 나쁘게는 미친년이고..즐거움을 만드는 것은 내 재능이지

 

순희가 호박범벅해왔더라 셋이 신나게 노래하고 훈련하는데 영숙이 오고 그렇게 해맞이 치유은사의 햇살이 빛나고 빛났더라 순희가 늙은 호박과 모자를 준다해서 말 나온 김에 가지러가자 해서 순희집까지 가서 호박 넷 모지 넷을 받아 금숙과 영숙에게 나눔

 

날씨가 얼마나 좋은지 덥다고 하루를 빛나고 향기롭게 수업종료 기적수업 253페이지까지 옴 그리스도의 깊이만큼 나의 기쁨이 높고 화려하다

 

기적수업을 이끄는 선생은 보혜사 성령이시다 이 책을 295페이지까지 읊어왔는데 교재인 책이니까 이 책을 배울 나와 선생인 성령이 삼위일체로 가동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책과 학생은 물질존재로 실재하는데 선생 성령은 어떻게 나타나 수업을 진행하실것인가? 그게 궁금하지 않은가? 기적수업이란 텍스트를 잡은 당신과 나는 같은 출발자리에 있다 성령이 선생으로 어떻게 등장하시는가? 그것도 그대와 내가 같아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성령은 등장하셔서 이 기적수업을 펼치시고 가르치시는가? 나는 늘 그런 과정 현장 실재를 마주하고자 한다. 텍스트와 나 그리고 그 텍스트를 실재로 풀어내어 이해를 이끌어내는 성령스승님의 방법 

 

‘성령’스승님을 모르면 기적수업을 아무리 달달외고 선을 그어가면서 익힌다해도 그 수업은 스승없는 독학이되는데 그 수업을 불가에서는 성문 벽지불 소승이라고 했다. 성령은 어떻게 오시어서 수업을 진행하시는가? 그대가 가장 싫어하고 거부하고 무시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에고가 쌓은 어떤 개념들을 반대로 하도록 하여 그 에고의 벽을 깨어내시는 것이 성령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내가 성령의 일하심에 내 몸을 드려보니 내가 하고싶지 않고 부인하던 일들을 하도록 하시더라는 것이 체험이다. 내가 싫어하는 일을 해야하도록 하는 것 즉 남에게 손가락질 당할 것같은 행동 미친년 소리를 들을 것같다는 행동을 해 봄으로 정말 미친년이 되는가 내 생각일 뿐이였는가 확인하는 것이고 그리고 너가 나를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게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확인을 하는 것이 성령수업법이고 누가 나의 행동에 뭐라고 하더라도 개의치않도록 하는것이 성령교수법이더라

 

신단에서 어린아이들처럼 노래하고 춤추고 달리고 손뼉치고 논다 스카프를 훨훨거리며 놀고 이런저런 놀이를 하는데 우리 넷을 정말 찬란하게 빛나고 활기롭고 아름답다 성령은 늘 생명력으로 충일하도록 이끌기때문에 당연하지 우리의 놀이판을 보면서 같이하고자 하는 이들 부러움으로 맴도는 이들이 있다. 한켠에서는 시끄럽다고 별나다고 눈을 흘기는 이들도 분명히있다 그런데 내가 그런 이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증거라고 한다

 

내가 나를 둘러싼 너의 평가 즉 에고에서 벗어나도록 성령은 나를 훈련시켰다 너의 눈에 내개 갇힌다면 너는 주인이 아니라 노예다 너 안의 하나님을 주로 모시고 있다면 너의 눈을 왜 의식해서 내 안의 빛을 확장하지 못하는가 그것이 내가 나를 부인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결과가 되고 그것이 체면이나 두려움이나 그런 반경을 만드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지. 하나님의 빛은 나의 본성이고 그 본성은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나의 광휘를 자유롭게 확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의 판단을 미리 계산하고 나를 멈추게 하는 것은 ‘너’에게 책임을 전가한 내 위선 게으럼 무지함이다. 너가 나를 판단하는 것은 너의 몫이다. 내가 나를 정의하는 것에 왜 너를 끌어당겨 나를 멈추는가? 그것이 내가 나를 속이는 일이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빛 양심을 거스리는 일이다. 양심이란 하나님의 빛이고 그 빛은 확장하려는 힘이다 어둠을 밝혀가는 빛이 점점 원만한 광선에 이름으로 어둠이 물러난 상태를 ‘양심’이라 하는 것이다

 

손순희가 등장하면서 순희를 입고 수업을 이끌어가는 성령을 내가 본다. 그렇게 사랑스럽고 귀엽고 아름답다. 천진난만하다는 것은 너의 시선을 넘어서야 가능한 아름다움이기에 순희의 자유스런 행동들에서 나에게 윙크하시는 성령을 보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은 ‘힘’이다.  힘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성령이다 성령은 몸이란 매개체를 통하여 빛을 발현하도록 수업을 이끌어가시는데 그 수업을 나는 잘 배우고 익힌 학습자로서 이번 손순희의 등장에서 그간의 내 공부를 테스트하고 채점을 하고 있구나 알게 되더라. 걸림이 없다 즉 무엇인가 판단하는 잣대가 없다는 것 그렇게 나는 성령수업을 이수하고 성령스승님에게 원리를 전수받아 가르침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것이지 

 

젊은 선생이라고 일러주시고 타고온 신기(성령)를 글로 지식으로 풀어내는데 쓰고 있다고 또 말씀해주신 것인데 성령은 지식을 딛지 않으면 실재로 역할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고 지식이란 ‘몸’이라는 매개체를 딛고 활동하시니 ‘몸’에 대한 지식에 되는 것이지. 기적이 치유다고 하는 말이다 치유는 에고가 만들어내는 습관을 마주하여 에고는 그림자임을 인식하는 과정이다. 그대의 두려움이나 불안 공포는 사실이 아니라 그대가 증폭시킨 그대의 망상이다는 것이지 망상에 사로잡히면 실재 즉 현실을 볼 수 없기때문에 성령이 오시면 망상이 어디서 기인된 것인지를 마주하게 하신다. 내 안에서 나온 지식이 아니라 외부에서 제공되는 것들을 내개 허용한 것임으로 그 허용함을 해제하여 외부정보를 물리고 안에 있는 빛을 확장하도록 하는데 성령의 빛 확장방법이 손뼉치며 하낫 둘 헤아리기로 이것을 전일명상이라고 한다

 

에고를 털어내는 마당청소라고 나는 설명하는데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하낫 둘 헤어리는 이 단순함을 실천한다는 것이 그대에게 쉽지 않다면 그대는 에고에 갇혀있다고 판단하면 된다. 에고는 이렇게 살아있는 행동을 싫어한다 조용하게 고요하게를 선호하는데 성령은 그 반대를 이끄심으로 에고를 해제한다. 나도 고요하게 묵상하고 소리없이 기도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성령님을 불러 스승으로 모시고 수업을 하면서 수업시간이 조용할 수가 없더라. 손뼉은 벼락같은 힘을 일깨우고 하낫 둘 헤아리면 복장속에 숨은 뒤틀린 에고를 추방시키게 되더라는 것이지. 그대가 진정하나님의 빛 힘을 체험하고 따르고자 한다면 고요함이나 조용함이나 정숙함이나 이런 단어들의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기는 아기처럼행동해야 건강한것이지 아기가 어른처럼 행동한다면 그 아기는 이미 아기가 아니다 마당을 쓸때는 물도 뿌리고 먼지도 마시고 캑캑데고 그런다. 성령은 먼저 정화를 하게 한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에고가 싸지른 똥들을 치워야지. 에고에 길들여진 생각은 성령의 생각과는 반대가 되어 자기의 살아온 습관의 편에서서 자기합리화를 하게 된다 버리기 싫음에 대한 아름다운 변명을 주루룩 늘어놓는데 성령은 그 변명이 끝나도록 기다리신다 그리고 변명이 끝나면 그래서 너의 그 습관적인 생각이 너를 행복하게 빛나게 아름답게 하냐? 되물으신다

 

나는 그렇게 성령님과 늘 대화를 했다 내 이야기를 주욱 들으시고 그래서 너는 너의 결과에 대해 만족하느냐? 물으시면 당연히 아니니까 성령님의 가르침을 구하는 것이지요 하면 자 손뼉부터 치자 그렇게 시작하시었기에 나도 자 손뼉부터 치자 하고 가르친다. 내가 배운데로 너에게 가르칠 수 밖에 없지 그렇게 손뼉을 치고 맞치고 하낫 둘 소리를 치고 힘이 빛남으로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웃음꽃이 만반한다 성령은 웃음이다

 

에고는 우울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내가 가는 곳마다 웃음꽃이 만발한다 나를 가르치는 성령은 행복한 웃음으로 자기의 뒷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지 기적수업을 읊으면서 텍스트의 아름다움에서도 감사하지만 이런 공부를 내가 하고 있다는 것이 기적이구나 행복하다. 그대나 나나 두명없는 고유한 하나님이다 내가 나를 경영하는 것이 빛의 삶인데 내 삶에 너의 간섭을 허용해서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는 것이 그대를 약하게 하고 우울하게 하는 원인이다 너를 나를 타인에 간섭할 수 없다 간섭을 허용하거나 허락하는 것은 내 자신이고 너이다

 

이전에 상처를 받지 말라고 했는데 상처를 받는 것은 내 선택어서다 받지 않는 것도 내 선택이니까 나는 너가 굳이 상처를 주고싶어해도 받지 않는 선택을 하라고 하는데 너 또한 타인에게 상처를 주려고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너가 상처로 인식하는 것은 너가 지식이 없어서다 그래서 성령은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게 하도록 나를 가르치신다. 내가 너에게 상처를 줄 수 없듯이 너도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내가 상처를 받았다고 상상하고 그것에 대해 반응을 하고자 하는 것일 뿐. 하나님의 빛 양심이 외연의 언어나 상징으로 전해지는 그림자에 가리워지면 욕심이라는 그림자 에고가 주인이라고 나서서 두려움 불안 공포 등등의 망상감정이라는 늪을 만든다. 하나님의 빛에는 감정이라는 것이 없다 그대에게 감정이라고 속삭이는 것은 하나님의 빛이 아니라 에고의 그림자이다 감정은 무게가 만드는 것이다 감정을 풀어서 빛이 되도록 하는 것이 성령스승님의 인도다

 

피가 변하여 빛이 되도록 하는 것이 복음이고 나는 그것을 가르친다 손뼉치고 하낫 둘 헤아려라 그것을 반복할 때 빛이 확장된다 힘이 강해진다. 영성이란 하나님의 빛이 확장될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실재는 그대의 소리통이 힘있고 강력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을 그대가 증거할 때 증거가 그대의 소리울림이라는 것을 기억해라.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거문고소리와도 같다 해조음이다 해인이다 옥음이다 ...하는 실재다. 성령의 실재는 그대의 목소리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대는 책을 덮고 손뼉칠 자리를 찾게 되리라 그게 골방이든지 산이든지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실천하기 힘든 것이다

 

손뼉치며 하낫 둘 세알려라. 손바닥에 불이나도록 입에서 침이 튀도록 그게 성령임재를 부르는 참된 예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