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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내가 이야기하기

청향고은 2024. 1. 9. 11:10

법화경 삼독을 하고 4독을 6일 저녁에 시작했다. 글이 순서를 따라 두드리지 않고 기억을 따라 두드리니 어제와 오늘이 바꾸기도 한다. 매일 두드리다가 몰아 두드리기를 하다보니 생기는 현상이기도 하다. 한시간 56분을 독송하고 나갈 준비를 한다. 삼독을 하고나니 숙제를 하는 급박한 몰입이 이완되어 느긋해졌다고 할까나

 

삼參독까지는 백미터 달리기처럼 한숨으로 클리어 하려는 의지가 불타 오르더니 네번째 亖 독송에 들어가면서는 오늘(7일)새벽까지는 바짝 달리기를 했는데, 이제 남은 페이지에는 느리느리 하고 다른 책 두권을 겸하여 보고 있다. 마인드 헌터라는 프로파일링정보와 애니여사님의 신지학에 대한 책이다

 

두 책이 관련이 없는 듯해도 사람의 무의식을 파들어가는 것에서는 어떤 언어로 풀어가는가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선과 악이란 하나를 놓고 해석하는 방향성이니까 어디서 보는가에 따라 저마다 선이거나 악이 되는 것으로 절대선이나 절대악이 없이 상대적이라고 하는 것이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원리만 오직 변치 않는 원리라고 하는것이듯이 내 관점에서 올그름을 말하는 것일 뿐 내 의식이 성장하게되면 이전에 선이라 생각한 것이 아닐 수도 있고 악이라 편견한 것이 오히려 아름다움일 수도 있고 ..그렇게 관점이 변화하는 것이 의식성장이고 그래서 어느 것을 고집하지 않게 되는것을 자유로운 영혼이라거나 성숙한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무엇을 고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만이나 교만이나 좁음이나 편협함이다.

 

작년 한해 내가 고집하던 것을 얼마나 버리었는가 점검하기도 하는 법화경독송인데 이전의 나를 당겨와서 지금의 나와 비춰보면 이전의 나는 결벽증같은 강직된 사유를 고집하였다면 이제는 강직된 사유는 문자언어안에 갇히면 생기는 부작용이구나 하게 되고 문자언어를 벗어나게 되는만큼 많이 온유해진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문자언어에서 자유로와지는 것만큼 부드러워지고 온화해진다는 것이지. 문자언어를 어떻게 벗어나는가? 그것을 나는 예수의 방법을 따르고 있는 것이고 오리가 알에서 깨어나서 가장 먼저 보게 되는 움직이는 것을 엄마로 알고 따라다닌다고 하듯이 내 의식이 생성될 때 가장 먼저 만난 문자언어가 예수 그리스도이기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좌표를 잡고 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땅에서 허공 십자가상으로 올랐다가 다시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 과정에서 예수가 만났던 법화경을 나도 다시 만나게 되면서 예수의식으로 법화경을 읊조리고 있는 것이구나 즐거워하는 것

 

동서남북이라는 방향성은 선과 악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계절의 흐름을 선악이라 하지 않듯이 계절의 흐름을 순리라 하는 것이고 계절을 거술려가는 것을 역리라 하는 것인데 순리를 선이라 한다면 역리를 악이라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은 순리로 계절의 흐름을 따라 간다 그래서 생은 선하다 하고 사는 생에 대하여 반대편에 있음으로 악하다고 하는 것이고 하루 살면 하루 죽은 것이라 하여 생사가 경영된다고 하는 것이다. 육십년을 살았으면 육십년을 죽은 것이다 산 날만큼 죽음의 날들도 쌓이는 것이지. 생은 점점 가벼워지고 사는 점점 쌓여 무거워지는 것이지 그래서 세월이 쌓여 무거워지면 지근地近하다 즉 땅과 가까와진다는 것으로 땅보탬거리가 가까와진다는 것이지

 

독송을 하면서 시간을 계산해보는데 지금 328페이지까지 오는데 4시간 44분이 걸리었다 중간 중간 주석도 하고..이 글을 두드리는 때에는 달린 거리가 7시간을 돌파하고 있다 읽다보니 한페이지에 일분씩 천주를 다 돌리면 십분에서 15분정도 걸리는데 입에 모타를 달면 십분 조금 느리게 씹어가면 십오분즘걸리는데 한번 염주를 잡으면 여섯번은 하게 되니 한시간을 넘도록 읊어댄다는 것이지 독송의 호흡이 길다는 것은 염주를 여덟번 감아게 되면서 야 이거 잘 달리네 잡은 줄을 팔십분은 넘어달리는 것리니까 독송마라톤 장구다라니구나

 

법화일독에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보는 것 592 페이지로 보고 592분이라고 계산을 하면 열시간 정도 소요되리라. 법화경을 108독을 하라고 권하는데 일독에 10시간을 투자하게 된다면 108독을 하자면 천 팔십시간이 걸리는 것이겠다. 내가 나에게 가장 충실한 시간투자, 천국침노하기 천국땅따기 부동산투자가 독송이라는 것을 이제 안다

독송을 하다보면 일단 건강해진다는 것이지. 독송을 하기위해서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면서 소리를 토해내는 것이니 안에 축적되어 있는 활성산소가 소리를 따라 나가는 것이 되니 혈관이 튼튼해지는 것이고 피가 깨끗해는 것이지. 모든 것은 피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듯 그대의 피를 혈관을 잘 경영하고 다스리는 원리가 독송에에 있다는 것이고 나는 그간 소리통 뚫기 독송을 함으로 이제 언어독송을 통해서 그간 내가 투자한 천국부동산(몸과 마음의 기운)을 점검하고 있고나. 일단 독송을 하는 즐거움은 이삭을 줍는 즐거움이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것이지.

 

삼승불 이승불이라고 말하는 방편은 궁극 일불승 즉 독송으로 몰입하기 실천이고 일불승이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과도 같은 것이고 겟세마네기도라는 뜻이거나 명상력이라고도 하는 것이라고 이제 내가 풀어낸다. 소릿줄을 생명줄이다. 내가 생명줄원리를 일단 몸에 새김하는 훈련을 하는 것을 겟세마네 기도라고 하는 것이고 그것을 익히게 되면 기돗줄을 통하여 우주 인드라망에 소리그물을 던져 길어오고자 하는 정보를 당겨오는 것이지.

 

숨과 소리와 육체에너지가 같은 하나를 완성하는 일불승

이런 시간투자가 하루 가벼워지는 생을 붙들고 하루 무거워지는 무게를 털어내는 수행으로 중도를 걸어간다고 말하는 것이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다 생에 집착도 아니하고 사에 두려워하지도 않는다고 하게 된다는 길이다. 그대가 영생하고자 한다면 독송을 하라는 것이지. 이런 저런 방편들을 다 놓고 염불을 하거라 라는 것이니 오래전에 가장 힘든 수행이 염불수행으로 열명이 시작하면 한명만 한다고 하고 그만큼 마장의 유혹이 많은 수행이라고 한다. 염불은 무념무상을 성취하고자 하는 방법인데 염불정진에 몰입하지 않으면 12연기의 사념장에 걸려서 오히려 하지 않음만 못하다고 하는 말을 하기도 하는 것이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사념들을 염불로 극복하고 넘어가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니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수행인 것은 맞다. 방법이 단순한만큼 그 방법을 실천하는 힘, 몰입력이 어렵다는 것이지. 일념으로 독송에만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나..를 스스로 체크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남의 말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시간은 죽음의 무게를 쌓는다면 법화경 한 권들고 읊조리면 생의 가치를 붙들게 된다는 것인데 왜 법화경이냐? 한다면 내가 그간 읽고 배운 바에 따르면 내용이 아름답다는 것이 첫번째 가치이고 그다음 울림이 즐겁다는 것이고 그 다음 이 법화경은 그대의 지적인 레벨을 확장하여 이성적인 멘탈을 강화시켜준다는 것이고 보살도를 이룬 다음코스로 성불을 이루기위한 단계라서다. 나는 성불을 聲紱(인연끈 불, 속안에서 맺히는 십이연기의 끈을 소리로 허공에다 꽃불로 피워내는 것이라고 해석을 한다.

 

내용을 읊다보면 눈물이 난다. 그간 내가 두드린 글들을 법화경에서 재회하는 반가움의 눈물이기도 하고 내가 온 소릿줄을 만들며 온 길의 공부를 이렇게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구나.

 

아는 것을 만나면 반갑고 모르는 것을 대하면 두렵다. 그대가 모르는 것을 대하면 거부감이 생기고 아는 것을 만나면 친근함이 생긴다. 낮선 것은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를 준다. 낮익은 것은 정다웁고 안온하며 편안함을 준다. 누구라도 그러하다. 무지와 낮섬이 같은 말이다. 앎과 의식이 같은 말이다. 알지 못함이 만드는 감정이 '죽음'이라는 낱말로 나타나고 '삶, 익숙한'이라는 감정이 '영생'이라는 말로 나타난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거부감이 느껴지는가를 마주하면 그것이 나의 상태다 모르면 배우면 되고 두려우면 마주쳐야 한다. 마주친다는 것은 불편함을 인정하고 불편함을 편함으로 바꾸는 훈련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요즘 마주하는 낮선세계를 극복하도록 가이드를 하는 스승이 ‘손순희’다. 청정비구니 같은 언어를 쓰던 나에게 문화충격이라고 하는 신선함으로 다가온 인연인데 이 친구는 내가 신단에서 춤훈련을 할 때 달리기를 한다고 스쳐지나가곤 하다가 말을 걸어와 이야기를 하게 되고 일요일 우리가 노는 시간에 등장하게 되면서 같이 어울리게 되었는데 사랑스러운 에너지이기도 하고 밝고 화사한 에너지라 어느 달에 왔는가 했더니 4월 27일생이더라. 즉 사오미 여름의 들어서는 달에너지라 오화와 방합이 되기도 해서인지 거리감이 전혀 없기도 하고, 여자들 나이 육십이 넘으면 이런 저런 벽들이 다 없어지는 그래서 엄마가 되면 무당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인데 세상사 몸으로 격는 것에서는 거침이 없어지는 것이지. 다만 무엇을 어떻게 추구하는가가 화두로 나오면 언어들이 달라지지만 지금 순희와 사귐에서 내가 꺼려하던 언어들, 즉 음담패설에 대하여 거부감을 버리고 있구나. 이 친구의 말에 성이라는 요리를 먹어야 한다면 맛있게 먹어야지...라고 하는 말에 내가 그간 가지고 있던 '속세, 성욕'에 대한 편견이 깨어졌다. 내가 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무지함이고 불편함을 가진다는 것은 그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의미였구나..성에 대한 결벽증은 오히려 집착의 모습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채게 되면서 성담론에서도 이제는 자유로와진 것이지. 이 친구 참 이쁘고 정직하고 천진하고 사랑스럽다. 인간사에서 내가 벽을 쳐서 불편한 언어들을 내가 꺼내어 앞에 두고 언어값의 진위를 극복하는 것을 보살도를 행한다고 하는 것이구나. 법화경을 독송하면서 알게 되는 내가 거부감을 가진 언어에 대한 벽을 허물어가는 것이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인생을 행복하게 경영하는 놀이에 티없이 맑고 밝은 웃음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이 만다라꽃이며 마하만다라꽃이며...법화경에서 나열하는 향기로운 향기며 등이지 않겠는가..허공에서 내리는 꽃비 꽃향...들이 웃음의 에너지라는 것이지 그래서 하늘에 계시는 자가 웃으심이여..라고 하는 이 웃음을 법화경이라고 나는 해석을 하네. 경건이 무엇이며 존경이 무엇이며 찬탄이 무엇이겠나 서로 만나 웃음을 웃을 수 있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예배이며 제사이며 존경이며 사랑이고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유머시니라..고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은 마지막에 웃는 자..라고 하는 것이지. 그대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웃음에 닿지 않으면 조금더 바보가 될 필요가 있다. 웃음을 부드러움으로 파동이라 하고 하는 것이고 울음은 강함으로 주파수라 하는 것이다. 울음은 겟세마네기도로 피를 토하는 강함이고 웃음은 두팔을 펴서 평안이 있을지어다고 하는 유함이다는 것이지. 웃음바이러스라고 하듯이 웃는자의 옆에 있으면 같이 웃는다.

신단에서 손뼉을 치면서 하낫 둘 매겨보면 지나가던 이들도 손뼉을 같이친다는 것이지 그만큼 공명력이 좋은 것이 웃음바이러스인데 이 바이러스를 전파시키기위해서는 겟세마네 울음백신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설명을 한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것이 너를 웃게 하기이다. 내가 울음에서 웃음의 법화 다보탑길을 환히 뚫어내었을 때 웃음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고 선교사 제가가 되는 것이라고...내가 건물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천지자연에서 소리를 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나만의 논리가 있어서다. 문자언어의 벽을 넘어서는 것의 실천으로 사람이 지은 건물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건물안에 거하시지 않는다는 것에 따라 펼쳐진 곳에서 나만의 웃음바이러스를 전달하는 것이지. 이렇게 내가 하늘아래 땅위에 유아독존으로 법화로 나를 기루어온 과정이 있고 같이한 인연이 있어서 일요일 신단, 열린 곳에서 열린 웃음을 나눈다. 하늘아래 땅위에 너가 있고 내가 있다. 닫힘을 싫어하다보니 예수가 시나고그 밖에서 산위에서 복음을 전하셨던 이유도 이해가 되지 안이 있으면 밖에 있지만 안을 걷어내면 나눔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 무량의라고 하는 것이겠다.

나도 참 많이 자랐구나 하는 것을 매번 느끼는 것은 일요일 우리패거리들이 모여서 노는 일을 이끌어가는 때의 내 기량이다. 너를 울리려면 내가울어야 하고 너를 웃게 하려면 내가 먼저 웃어야 한다. 내가 먼저 벽을 깨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나에게는 '문자언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것이였고 이제는 가장 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음담패설, 성담'에서도 너의 음담들이 불편하지 않고 같이 까르르 웃을 수 있을만큼 성장한 것이지. 사람이 만나 가장 밝고 맑게 웃을 수 있는 '화두'는 성담이라는 것을 안다. 성담은 신체언어이기때문에 바로 공명이 생기는 것이지. 법화경은 성담경이라고 나는 해석을 하는데 법화경을 만나게 된 인연이 지금은 환속하신 '성담'스님의 법화경강의에서였다는 것도 나로선 재밌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고 이 스님의 소리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울림이 강하고 아름다운지 한동안 법문을 듣고 독송을 듣고..성담스님의 간증에서 꿈에 예수가 나타나 오악탁세 깊은 잠에 빠진 기독교를 변화시키라는 신탁을 받으셨다고 하신 것에서 예수의 길은 소릿길이구나..하는 확인을 한 바 있다. 내가 파악하기로는 이 분만큼 성량이 법화옥음이 아름답고 그윽하고 맑고 밝으신 분 없다고 본다. 영인스님의 독송을 들어보지만 성담스님의 소리가 나에게는 더 에너지가 높다는 생각이다.

빛결이 남편과 성담에서 서로 불편하지 않게 모든 것을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얼마나 가능할까..라는 되물음을 하였는데 이 영역에서는 이제 벽깨기가 시작된 것이고 이 벽깨기 스승으로 손순희스승이 등장한 것이라고 본다. 내가 가야할 공부에 스승이 늘 앞에서 온다는 것을 안다. 즉 살아있는 스승이 오신다는 것이지. 빛결과 용자 그리고 울릉도 혜숙이를 거쳐 금숙이 그리고 세미와 종순 이제는 순희까지 한줄로 끈이 되어 나를 줄넘기를 하도록 하시는 것이지. 불 법 승이란 삼승과 보고 듣고란 이승과 읽고라는 일불승의 실천을 무엇에서 하는가? 하는 것인데 언어에 잣대를 들이대고 성속을 나눔에서 몸언어인 일불승으로 들어오는 것이고 이것을 숫타파타니경에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라고 하는 것

성문은 너의 정보를 듣고 배우는 단계라면 보고 수기한다는 것은 고요한 벽지불 정진이고 독송한다는 것은 연등불이라 하는 것으로 읽는다는 것은 가장 쉽기도 하고 가장 어려운 수행이다고 한다 연각 보살이 너의 정보를 듣고 보고 쓰는 것이라면 이 단계를 통합하는 것을 일불승 하나님 일체종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것 그리고 쓰는 것의 에너지는 뇌를 훈련한다면 독송하는 에너지는 심장안의 작은 방을 열어서 확장하는 훈련이어서 가슴열기 훈련법으로 혼에너지라 고 한다 뇌파와 심파를 같이 활동하게 하는 일불승이 염주를 돌리며 독송하는 실천이라 나는 설명하는 것이지 물론 사경후에는 자기 글을 쓰는 생경단계가 주어지는데 너의 글을 의지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위한 훈련이다. 남의 글을 베껴쓰는 훈련은 내 글을 쓸 어휘력을 얻기위한 훈련이다는 것이지 문장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어휘를 어떻게 쓰야 울림이 풀림이 생기는 것인가를 찾아내기위한 것이라고 나는 이제 글씀공부의 가치를 설명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멘탈계를 여행하기위한 그물 뉴런을 활성화시킨다는 것이다

성서에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지지말라고 성서는 설명하는데 사랑의 빚외에는 어떠한 빚도 지지말라고 하는 이유가 ‘빚’은 결핍이고 그 결핍이 드러나는 열매가 빚을 짐으로 무게가 생기고 묶이는 것이 되어 빚짐을 지고 있으면 기운이 무겁다. 빚도 세 가지가 있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설명하는 것인데 내 언어로는 정신 빚인 글빚 마음빚인 말빚 그리고 물질살이의 돈빚이다. 자본주의가 되면서 빚을 ‘융자’니‘대출’이니 하면서 당연한 것처럼 세뇌하지만 그대를 어둡게 하는 ‘빚’이다. 그대가 정신승리 마음평안을 말해도 돈빚이 있는 한은 그 빚이 마음을 정신을 누르기 때문에 스스로 부정한다 해도 기운이 돈빚 무게만큼 어둡다 그래서 영적인 길을 가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해결해야하는 것이 물질에서의 빚이다. 그리고 말빚과 글빚의 무게를 인식하는 것은 그 다음 단계다 물질 빚을 지고 있으면 말빚과 글빚에 대하여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물질살이의 빚은 돈빚이다. 돈집이라는 굴레를 벗겨내면 그 다음에 드러나는 말빚이 나온다 돈은 형체가 있어서 무게를 인식하기에 눌림이되고 물림이 되지만 말빚은 혼을 어둡게 하는 무게 된다는 것인데 말을 식언하는 것이 빚이 되고 그 빚이 모이면 丙이 病으로 간다. 말은 피에서 가동하여 밖으로 피워내는 말꽃이라 하여 話라고 하는데 말을 알고하면 빛나는 말로 華(빛나다)라고 하고 모르고 하는 말은 禍(재앙)라고 한다. 말은 안에서 나오기때문에 본심이라고 한다. 꾸며서라도 아름답게 하는 말훈련을 하는 것이 독송훈련이다. 여자가 아름다운 얼굴을 더 아름답게 가꾸듯이 하는 말 이쁘고 아름답게 하는 훈련을 해야 말빚을 지지 않는다 말한마디로 천냥빛을 갚는다고 하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말한마디가 천냥빚을 만든다도 되는 것이지 않겠는가. 말은 안에서 밖으로 나와서 나에게로 돌아온다. 말을 성문이라고 하는데 성문에는 무늬가 있어서 말을 한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니 누워서 얼굴에 침뱉기라고 하는 것이지. 말을 훈련하는 방법으로 가장 좋은 것이 독송하는 것인데 독송을 할 때 아름다운 문장으로 구성된 경을 찾아서 하라는 것이고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뤄진 것이 법화경이라고 하는 것이지. 그래서 법화경은 독송용이라고 나는 설명한다네

 

그리고 멘탈 정신살이의 빛은 글빚이다. 말빚은 내가 짓는 시간, 피에 새겨지는 것이고 글빚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으로 환경에서 즉 물에서 만들어지는 빚債이라고 한다. 그대가 어떤 정보에 발을 딛고 있는가에 따라 그대는 그 정보의 무게에 눌린다는 것이지. 글빚을 식자우환이라고 하는데 그대가 실천하지 못하는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 때를 말한다. 말빚을 丙이라 한다면 글빚을 疾이라고 한다. 질병이라고 하는데 원인은 말과 식자에 있다는 것이다. 아는 게 병이고 모르는게 약이다는 말이 있이 글빚을 지게 되면 나오는 말이다. 아는 척하는 것이 빚이다. 내가 지금도 책을 많이 본 경험이 만드는 머리로만 아는 지식으로 아는 척을 하는 경우가 많기때문에 문득 올라오는 낱말이 있으면 아 이 글귀를 말로 옮길 때 어디서 실천하고 에너지를 확인하라는 것이구나 내가 글로 아는 정보가 소화가 되지 않아 역류하는 현상이구나 다시 풀어라고 울림을 해주는 것이구나 신탁이거나 공수구나..걸려있는 것을 걸러내라는 뜻이라 읽는다.

내가 아는 척한 것을 정말 아는 것인가?를 검색하고 찾아본다. 환경에서 마주하는 정보는 글빚이 된다. 글은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흘러들어온다 들어 온 정보를 기도나 식도를 따라 흘려내려보내게 되면 빚이 되지 않지만 어디선가 걸리게 되면 즉 너가 쏜 화살矢을 맞게 되면 그것이 만드는 것이 疾(병 질)이 된다. 왜 질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해가 되는가? 밖에서 안으로 들어와 걸려 흘러나가지 못하는 것이 쌓이게 되면 그것이 질이고 부담이라고 하게 된다. 너의 말이 부담스럽다고 할 때 그것이 그대가 지는 글빚이다. 내가 하는 모르고 하는 말은 내 빚이 된다. 그런데 너에게서 들어오는 말은 글빚이 되기도 하고 글빛이 되기도 하는 것인데 너의 말에 속이 시원해지면 글빛을 만난 것이고 너의 말에 속이 답답해지면 글빚에 걸린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이 너에게 글빚이 되기도 하고 너가 나에게 전하는 정보가 나에겐 빛이 되어 나를 빛나게 하는 깨달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은 나에게로 돌아오지만 너에게 닿아서 너에게 걸림이 되면 글빚이 되고 너에게 즐거움을 만든다면 빛글이 되는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말을 하여 너로 빛나도록 하고자 하는 것인데 내가 빛나는 글이라고 던져도 너가 소화하지 못할 때에는 빚이 되어 짐이 된다는 것은 안다. 그래서 글은 길게 쓴다. 즉 너가 글을 봐서 빚을 지지 않게 되도록 즉 숨길이가 긴 글을 두드림으로 입구에서 되돌아 나가도록 하는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 길을 인내함 인욕으로 정진하게 되면 빚이던 무게가 점점 빛나게 되는 환희봉송의 즐거움을 얻는다. 내 글은 빛을 담고 두드려가는 글이어서 내가 가벼워진 체험을 담고 있음으로 너에게도 같은 즐거움을 주리라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너에게 전달하는 정보는 내가 실천하고 있고 너도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선택해서 건넨다. .

 

가난하게 살아도 빚이 없으면 빛이나고 말에 어눌하여도 말빚이 없으면 품격이 생기고 글빚이 없으면 정신이 자유하다. 모르는 바보는 너에게 끌려다니는 노예지만 아는 바보는 너의 그물망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바보이다

 

돈빚에서 벗어나면 말빚을 갚아야 한다 말빚을 벗어나면 정신을 이루는 글빚을 갚아야 한다 이 세개의 빚이 청산되어야 영적인 세계를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는 어디에서와서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는가? 라는 화두를 잡을 수 있는 단계가 된다는 것이지 영적세계라고 하는 이 낱말의 현장에 들어서기위해서는 가장 힘든 씨름이란 것도 안다

 

몰입하되 이완한다. 글을 보아야 읊기때문에 긴장과 이완이 동시에 진행되는 양자현상이 체험되는 것이고 일불승이라 한다. 보는 것과 쓰는 것은 이승 삼승으로 방편이지만 읊조림은 일불승이다

소리줄을 훈련하는 것은 명줄을 늘이고 세기를 더하여 일불승을 누리기 위함이다. 그간 내가 몸으로 익힌 일불승을 법화로 설명한 과정을 거치고 이제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온다. 땅에서 허공으로 솟았다가 다시 땅으로 돌아오는 과정

 

소릿줄을 얻게 되면 이승에서 일승으로 건너갈 방편을 얻은 것이다

소릿줄을 어디다 쓰는가는 자기 선택이지만 겟세마네 기돗줄을 잡은 예수의 길을 보면 빌라도의 법정에 먼저 선다.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오고 그 물음에 답을 찾는 길이 비아 돌로로사 눈물의 길이고 갈보리 십자가 세뇌된 모든 정보가 죽는 사망의 골짜기 를 지나가는 길이다. 소릿줄을 얻으면 그 줄을 타고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 제자의 도라고 하는 것인데 이 길은 찾는 이가 없고 좁고 험하다

 

내가 그간 나라고 생각한 모든 아상들을 마주하여 제대로 보는 정견부터 시작된다. 나는 예수에게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물은 그 물음에 답하지 않은 예수에서 예수는 예수의 진리를 추구하였는데 과정에 있었던 터라 설명하지 못한 것이고 다 이룸을 말하는 자리는 빌라도의 법정이 아니라 가상에서 신포도주를 마신 후라는 것이지

 

물이 포도주가 되는 가나 혼인잔치가 있고 가상에서 목이 마른 마지막 숨줄을 불태우리 하려 그 목을 축이려 할 때 우슬초에 적신 신포도주가 있다. 경을 독송하는 것 소릿줄을 뚫고 나면 그 다음공부다. 독송을 위한 준비작업이 소릿줄을 뚫어야 함 즉 보살행을 이뤄야 그 다음 법화를 굴릴 수 있다는 것. 법화경 독송을 하게 되면서 그간 내가 배우고 익힌 것이 무엇이고 이제 갈무리 해야할 에너지가 무엇인가 생각한다

 

혼자 다닐 때 나를 마주한다. 어울림도 좋은 일이고 대화도 즐거운 일이지만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시간을 들인다는 것이 중요해지는 시기구나 한다. 어제 신단으로 가는 길에 금숙에게 치마 가지고 나오라고 톡을 보낼까 하다가 멈추었는데 나서기는 봉무동행이더라 그런데 공항교까지 가는데 걸음이 돌려져 신단에 도착했다 며칠간 봉무동으로 다녔기에 발이 봉무로 가는 것이지

 

신단을 돌다가 팔각정에 오신 이쁜 여사님을 보고 오늘 대화를 해야지 하고 가는데 아래서 세미가 부르길래 오늘은 그냥 패스해라 하고 여사님과 동행을 했다 57년 6월생 95세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20대에 죽었다가 살아나신 체험이 있으신 기운이 맑고 청아하고 소녀같으신 분이라 팔짱을 끼고 같이 망우당공원 화랑교를 지나 아양교를 건너 헤어지는데 강나루에 사신다 하시더라

 

금숙에게 치마 가져 나오라 톡을 하려다 귀가 했는데 금숙이 전화 그래서 신단에서 보자 하고 챙겨 나서려는데 발가락이 너무아파서 가다가 되돌아왔다 오늘 못나간다고 새끼발가락에 티눈이 생겨 통통불어데스

 

저녁에 내일 아침 발이 아파서 못나갈 듯하다고 했다. 티눈 제거작전을 벌리고 법화경 팔십분 독송하고 늦게 잠이 들었더니 늦게 일어났다. 발을 디뎌보니 걸을만하구나 해서 커피 준비하고 간식챙기고 톡을 넣었다 신단에 가니 금숙이 사진 찍고 있더라. 사진을 찍어주면서 이야기에서 세미는 ? 하길래 엄마 병원에 입원해서 간병하는가 보더라 하는데 나이들어 간병을 하게 되면 이래저래 힘들낀데.,..하고 해가 오늘 따라 엄청 이쁘게 올라오는데 사진 찍어 달라는 김경순 64년 11월 23일 생 등장하고 나는 경순찍는 금숙찍는거..추임새를 넣어가면서 일요일 놀이판을 달구게 되더라. 해가 오시는 아침에 해맏이 거리를 하는 즐거움이 있지. 금숙이는 신년 첫날 낙단루 동굴에서 이름매겨 신년올리기를 하지 않았더니 8일 신단에서 이름올리기를 하게 되더라. 동영상을 찍어가면서 매김굿을 하였는데 그 영상을 금숙에게 보내주었더니 얼마나 좋았으면 보고 또보고..하고 있다더라.

그렇게 새로운 얼굴이 들어와 같이 놀게 되고 순희도 등장 나의 신불림굿 구음하기가 신단을 울려내고 분위기 뿜뿜 바람이 불어도 좋은 날 커피 곳감 계란 귤 간식...류성걸의원 다녀가고 그리고 우리의 공부를 한다. 경순이 퇴장하고 바통을 받듯이 영숙이 등장하고 손뼉치고 노래하기 우리의 손뼉수행에 지나가던 이들이 같이 손뼉치고 신단문화로 우리 놀이가 정착이 되어가고 있다. 한번하고 두번하고 반복하여 하게 되면 낮익은 풍경이되는 것이지 않겠는가..일요일마다 두드리고 노래하고 춤추고 노는 풍경이 우리가 만드는 문화가 되는 것이지. 지나던 분들이 같이하기도 하고..

금숙이가 내게 어울리는 복색이 솔색 즉 청색이라고 서문시장가서 이쁜 솔색 티를 샀다고 주더라 수요일 만났을 때 솔색과 아이보리 색 티를 받아왔는데 티만 세개를 받았네. 세미가 가져다 준 방수원단으로 자리도 만들어주고..

하여간 올해 갑진 푸른 용 아용兒龍 얼라용이 까불거리는 에너지니까 신년 첫날부터 일본의 7.6인가 지진 비행기 추락 한국의 손톱테러에 119 헬리콥트사건들이 일어나니 어린 용이 얼마나 까불랑가 싶기는 하다 순희 경순 금숙 윤영이 날개를 펴고 날아라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 올리며 바람날개 달기를 했다 내가 다재다능하다는 것은 안다 글과 말과 소리를 갈아서 굿판의 꺼리를 만들어가는 재능이 탁월하지 그러하기때문에 무엇인가 기운이 탁해지면 원인을 찾아내게 된다. 오늘 금숙이 이야기 꿈이야깅인데 돌 회 올래 달릴 주가 쓰인 한자가 나타나더라고 돌아와 다시 나간다는 뜻이라고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고 그래서 너 타고온 자기 길을 찾아서 나가야 한다고 법화경 에너지라고 나랑 놀다보면 머리 아픈거 사라지지 탁기 털어내어야 하는 것 아직 많다아 사래들리지 않을 때까지 탁기 털어야 한다고 ... 시간이 남아 심심하면 게임하지 말고 건너갈 곳 부동산사는 공사를 하라고 독송을 하면 건너가 내가 거할 나라, 자기천국이 된다고 올해는 부지런히 독송하고 사경도 하라고 대답을 받아내었다. 법화경은 참 아름다운 경전이다.

순희가 금숙이 졸졸 따라다니는 게 귀엽다 나는 철학이지만 금숙인 신점이다고 설명을 했더랬다 철학+신점이 되면 가장 아름다운 영성이 되겠지만 나는 아직 신점보다는 언어를 깨트려가는 철학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문자언어를 벗어나는 훈련이라고 생각하니까 부지런히 언어깨기를 하는 것이지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면서 내공을 쌓고..

나중에 세미와 톡을 했는데 세미는 내가 세미를 불편해 한다고 생각해서 아침에 오지 않았다고 하더라 나는 등산을 갔거나 간병을 하거나 하나보다 생각한 것인데 이렇게 관점차이가 있다. 그리고 세미의 받아들이는 마음이 내가 불편해한다고 생각했구나 그게 각자의 관점이라는 것이니까 나는 내 흐름을 따라가는 것을 편해하지 안다고 아는 척을 해야 한다는 관점은 버린다. 앎은 가벼움이다.세미가 내가 불편해하리라고 해석한 것은 세미의 크기다. 가끔 나에 대하여 나보다 나를 더 아는 것같은 말참견을 들으면서 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가? 돌아보게 되면서 순희가 금숙이에 대하여 물었을 때 한국에 온지 얼마되는가라는 물음에 내가 껴들었는데 그것이 걸리더라. 나름대로 너의 삶의 궤적에 내가 껴들지 않는 훈련을 하고 있어서 나름 그간 무심함을 지키고 있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날은 왜 갑툭튀처럼 금숙이의 영역인데 내가 왜 껴들었을까..그게 걸려서 금숙과 통화를 하면서 너는 의식하지 않았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사실 금숙이는 의식도 안했다고 하더라)너 대신 내가 나서서 너에게 미안타 내가 너가 답할 거를 내가 잘라서 아는 척을 해서..라고 풀었다. 오래 전에 내가 남의 말끝을 내가 채서 그 사람을 내가 아는 척하던 습성이 여전히 남아있구나. 남편에게 묻는 말인데 질문을 내가 받아서 내가 남편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던 습관...이 세미에게서 반추가 되는 것이고, 세미가 나에 대하여 아는 척 하는 것에서 매번 이건 아닌데 이 아이가 나의 자아를 휘두르고자 하는 의지가 이렇게 강하게 나타나구나..자기도 모르는 습관이고 나를 칭찬하고자 하는 의지지만 그런 것에서 오류가 생긴다는 것을 나는 아니까 나를 아는 척한다는 것에서 나도 내가 나를 변화시켜가는 과정인데 그렇게 남에게 나를 고정시키는 언어를 들으면 거부감이 생기는 것이지. 너에게서 내가 정의 되는 것은 나는 싫어하는 것이지. 내가 세미에게서 거부감을 느끼게 된 이유가 내 모습을 세미에게서 보게 되어서구나..알게 되더라.금숙이가 세미가 주문한 것을 바느질 하면서 체험한 이야기와 내가 느끼는 느낌을 비추어보면서 세미에게서 건네오는 기운이 나에게는 무겁고 어둡다는 것이니 가능하면 어둠을 내가 피하고자 하는 것이구나..

너에게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내 안에 그것에 걸림이 있는 것이 있어서다는 것이고 금숙에게서 내가 불편함을 느끼던 것도 내 안에 고인 걸림 즉 내가 옳다는 잣대가 있어서라는 것을 알면서 벽허물기를 하게 되었고 이제는 나름대로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데 세미가 나에게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세미 안의 무엇이 나에게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외연에서 들어오는 정보는 내가 선택한다. 내 허락없이 나에 대하여 정의하는 것은 내 고유영역을 너가 휘두르고자 하는 것이어서 내가 싫어하는 것이구나.. 내가 금숙이가 풀어내는 이야기를 참고하여 내게 오는 정보를 풀어내는데 나는 내 기운을 내가 풀어내기 때문에 남들이 나를 어떻게 풀든지 개의치 않는다. 그런데 내 앞에서 나에게 묻는 의문을 타인이 답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내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이렇게 내 멋대로 산다 오늘 등장한 경순이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려는 인연일까 궁금. 순희는 날로 더 사랑스러워가더라 감기로 콧물이 흐르지만 신나는 놀이 영숙이와 순희 오늘 서로 인사 세권의 책을 번갈아가면서 보는 것도 기술일세. 오늘부터 법화경한문경을 독송한다. 기적수업이라는 책도 주문하고 ..다시 워밍업을 한다는 생각으로 공부에 들어선다

18일 오전 09:24